♬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13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사랑한 여인

浮萍草 2015. 3. 17. 12:38
    극장 감독과 외도한 아내 마음 되돌리기 위해 '키스왈츠'를 작곡했지만…

      
    ▲ (左)Johann Strauss 2, 1825-1899 ▲ (中) 젊은 시절의 예티 트레프츠 초상화 ▲ (右 ) 중년을 넘어선 예티와 슈트라우스 부부의 흑백사진
    츠의 왕’으로 널리 알려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함께 19세기 빈의 음악을 지배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며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파리와 런던 등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파리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여하여 연주하기도 했고 빈에서 슈트라우스 1세는 황실 무도 음악 감독직에 임명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셋은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와 아들들은 폴카, 갤럽,까드리유,행진,왈츠 등 가벼운 음악으로 모든 사람을 춤추게 만들었는데 맏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훤칠한 외모에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게 되고 그런 만큼 그의 인기는 그보다 10여년 앞서 태어난 헝가리 태생의 리스트 못지않았다. 어느 곳을 가든 여성팬들이 줄을 이었고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다. 하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여성편력’이라든가‘카사노바’라는 말과 연관시키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을 향한 수많은 관심과 눈길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세 번을 결혼하지만 자신 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와 결혼했고 그 결혼기간엔 한 여자에게만 순정을 바쳤다.
    ㆍ첫 번째 아내. 예티 트레프츠
    Johann Strauss II: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Op.314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대패하자 국민들은 실의에 젖는다.이에 힘을 돋우기 위하여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왈츠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이다.빈 신년 음악회의 고정
    레파토리이자 슈트라우스의 가장 유명한 왈츠.

    37세까지 독신이었던 슈트라우스는 1862년 예티 트레프츠(Jetty Treffz)와 결혼하게 된다. 본명이 헨리에타 살루페츠키 (Henrietta Chalupetzky)로 유명 메조 소프라노 가수였던 예티는 슈트라우스보다 7살 연상이었다. 예티는 가녀린 외모에 아름다운 목소리와 교양을 갖춘 성악가였다. 베를리오즈와 멘델스존 같은 당대 음악가들이 그녀의 매력에 빠져 그녀에게 자신의 가곡을 헌정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와 결혼할 당시 예티는 갑부 모리츠 토데스코의 정부로 토데스코의 아이 둘을 낳은 상태였고 그 외에도 5명의 사생아가 더 있었다. 그러나 44세인 예티에게도 아내라는 이름으로 가정을 꾸리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슈트라우스를 위해 헌신을 다한다. 그녀는 음악가 남편을 이해하고 도와주고 충고해주는 동시에 가정의 일도 빈틈없이 해내는 내조의 여왕이었다. 슈트라우스에게 예티는 친구이자 매니저이자 아내이자 정부였다. 예티와 함께하는 동안 슈트라우스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옛날 매력적인 성악가였던 예티는 풍만한 모습으로 60대 노년에 접어들었고 슈트라우스는 여전히 멋지고 중후하며 잘 나가는 중년의 음악가였다 슈트라우스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동행하던 예티는 이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게 된다. 게다가 어느 날, 예티가 젊은 날 낳은 한 아들이 찾아와 그녀에게 돈을 요구하며 협박하는 사건 이 발생한다.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다 못한 예티는 1878년 4월 7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슈트라우스와 첫 번째 아내, 예티 트레프츠의 16년 결혼 생활은 이렇게 끝이 난다.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채워주던 아내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이 컸던 탓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 (左) 두번째 부인 릴리와 슈트라우스의 사진▲ (右) 세번째 부인 아델레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슈트라우스의 사진

    ㆍ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순간의 선택, 두 번째 결혼
    슈트라우스는 첫 번째 아내 예티가 그의 곁을 떠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25살 연하의 여배우 앙게리카 디트리히 (Angelika Dittrich)와 결혼한다. ‘릴리’라 불리던 앙겔리카는 발랄하고 관능미 넘치는 처녀였다. 첫째 부인 예티와는 다른 그녀의 젊음에 매혹되었던 것일까? 슈트라우스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오직 릴리와 작곡, 두 가지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그러나 20대의 재기 발랄한 여인, 릴리는 젊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결혼 전과 다름 없는 생활을 꿈꿨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극장 감독 프란츠 슈타이너와 사랑에 빠져 남편의 품에서 도망친다. 슈트라우스는 그녀의 외도를 눈감고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편지를 보내고 ‘키스왈츠’를 작곡한다. “진심으로 키스를 보내오. 다정한 릴리. 제발 내게서 떠나지 말아줘요. 나와 같이 있어줘요.” 그러나 릴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기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거의 실패작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온 맘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 전부를 잃은 듯한 기분에 휩싸 일 수밖에 없다. 슈트라우스 역시 그랬던 것이다.
    ㆍ마지막 여인, 아델레 도이치
    사랑의 배신을 경험한 슈트라우스는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 상대는 31살이나 어린 아델레 도이치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3년 만에 미망인이 된 채 앨리스라는 딸을 하나 두고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앨리스도 친딸처럼 아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우선은 종교적인 문제였다. 아델레가 유대인이었고 슈트라우스는 가톨릭이었다. 또 가톨릭에선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류상으로 슈트라우스는 아직 릴리와 부부관계였던 것이다. 그는 아델레와의 결혼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국적을 포기하고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아델레와 슈트라우스) 작센의 국적을 얻고 1882년 57세의 나이로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아델레는 젊지만 현명한 여자였다. 어쩌면 그녀는 예티와 릴리의 좋은 점만을 모아놓은 듯한 그런 여자였다. 아델레는 슈트라우스에게 새 삶을 안겨줬다. 사랑이 완성될 때에야 창작력도 함께 폭발하는 슈트라우스는 세 번째 결혼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는 아델레와 결혼한 이듬해에 <봄의 소리 왈츠>를 작곡하고 2년 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페레타 <집시 남작>을 작곡한다.
    Johann Strauss II: "Frühlingsstimmen" Op.410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

    1899년 74세의 슈트라우스는 아델레의 곁에서 평온히 눈을 감는다. 슈트라우스의 묘소는 비엔나 중앙 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있다. 세 명의 부인 중 그와 합장된 사람은 세 번째 부인 아델레였다. 그녀는 슈트라우스가 떠난 후 31년 뒤,74세까지 살았다. 비엔나 중앙 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의 수많은 음악인 중에서 부인과 합장된 경우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유일하다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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