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11 바그너가 사랑한 여인

浮萍草 2015. 1. 24. 06:00
    바그너, 연상의 부인이 장사꾼과 눈 맞아 집나가자…
    Richard Wagner (1813-1883)
    그너는 작곡가이면서 음악극의 모든 대본을 스스로 써내려간 극작가이기도 했고 동시에 철학가이며 혁명가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과 철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고 쇼펜하우어,니체 등의 철학가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자신의 이념 안에 흡수하고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글이나 음악은 많은 반발을 사기도 하고 때론 호응도 얻었지만 바그너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이뤄냈다. 그의 삶 전반에 걸쳐 바그너는 끝없는 좌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누군가 손 내미는 사람이 있었고 그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조차도 끝없이 바그너를 후원했다. 바그너가 사랑한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남편들이 그러했다. 바그너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친아버지를 여의고 그다음 해 어머니는 재혼한다. 6남매를 두었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헌신적 이었으나 충분한 사랑을 전하지는 못했고 어린 바그너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바그너는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갈망했고‘남성은 여성의 영혼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작품을 통해 쏟아냈다. 그의 작품은 온통 사랑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가 추구하는‘사랑’이란 정신과 육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ㆍ첫눈에 반해 결혼한 민나 플라너
    1834년 여름, 바그너는 마흐데부르크 극장 협회로부터 음악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다음날 바그너는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극장 감독 베트만은 의욕이 없는 사람이었고 극장은 전속 오케스트라가 없이 매 공연 때마다 다른 악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당장 주말에 무대에 오를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연습시켜달라는 얘기를 듣고 바그너는 실망감에 거절하려 했다. 그때 극단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배우 민나 플라너를 만난다.
    민나 플라너
    그리고 그는 계약서에 서명한다. 민나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바그너보다 4살 연상인 민나는 9살짜리 딸을 사생아로 두고 있었다. 그 딸은 친척집에 맡겨 민나의 동생으로 키워지고 있었다. 민나는 바그너를 쌀쌀맞게 대하며 바그너의 애를 태운다. 그러나 바그너는 열정적으로 구애한다. 1년 후 11월에 민나는 공연 때문에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바그너는 민나에게 그리움을 호소한다. “민나, 당신은 떠났고 내 심장은 무너져 내리고 있소. 가만히 앉아있는 것조차 힘겹다오. 그저 어린아이처럼 울고만 있을 뿐이오.” 민나는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고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1835년 11월, 22세 바그너와 26세 민나는 결혼했다. 바그너 인생은 경제적으로 순탄치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후원이 있었음에도 늘 빚에 쫓기고 가난에 허덕였다. 마땅한 직장도 없고 음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민나와의 결혼 초반엔 말할 것도 없었다. 결혼하고 2년도 채 안 되어 민나는 디트리히라는 장사꾼과 눈이 맞아 도망가고 만다. 바그너는 민나와 디트리히를 찾아 헤맸고 바그너는 디트리히에게서도 버림받고 친정에 가 있는 민나를 만난다. 그러나 민나는 궁핍한 생활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 새 아파트를 마련했고 결국 민나는 그를 따른다.
    민나는 바그너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바그너의 반복되는 실패와 가난 속에서도 남편의 재능과 성공을 믿고 응원한다. 그러나 이후 바그너와 민나의 30년간의 결혼생활은 전쟁과 가난 그리고 바그너의 스캔들에 의한 다툼으로 만남과 별거의 연속이었다. 1865년 민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바그너는 그녀 장례식에조차 가지 않았다.
    ㆍ이룰 수 없어 안타까운 사랑, 마틸데 베젠동크
    마틸데 베젠동크
    1849년 드레스덴 봉기 이후 수배자 명단에 오른 바그너는 이후 11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된다. 이 기간에 그의 음악적 창작력은 멈출 줄 모르나 여전히 경제적으로 쪼들린다. 그런 바그너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나타났다. 1852년 알게 된 상인 오토 베젠동크는 일만 프랑에 달하던 바그너 빚을 모두 갚아주고 자신의 집 근처 목조 집을 개조하여 바그너 부부가 살도록 한다. 1857년 민나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긴 바그너는 그곳을 ‘아쥘(Asyl)’이라 불렀다. 속세와 떨어진 안전하고 평화로운 안식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미 오토 베젠동크의 부인 마틸데를 사랑하고 있었다. 극음악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 중이던 바그너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영웅서사시 <트리스탄>을 떠올렸다. <트리스탄>은 마르케 왕에 대한 충성심에도 왕비 이졸데를 사랑하는 트리스탄의 이야기이다. 자신을 믿고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주는 오토 베젠동크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아내를 사랑하는 바그너! <트리스탄>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바그너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대본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1857년 9월 18일 마틸데에게 대본의 초고를 보여줬고 마틸데는 바그너의 품에 안긴다. 또 같은 해, 마틸데의 시에 곡을 붙여 <베젠동크 가곡집>을 만든 바그너는 그해 12월 23일 그녀의 생일에 선물한다. 바그너와 마틸데!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WAGNER - Tristan und Isolde - Prelude and Liebestod

    1872년 빈에서의 코지마와 바그너
    바그너의 극음악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서곡 60여편의 오페라를 외웠던 것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이 세상의 모든 오페라 중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으뜸으로 꼽았고 바로 이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에서 인생을 배웠다 고 했다. 1858년 4월 7일 바그너는 마틸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쏟아낸 편지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악보 안에 돌돌 말아 넣는다. 그러나 그 편지는 마틸데의 손에 전해지기 전에 민나가 먼저 발견한다. 이미 눈치 채고 있던 바그너의 아내 민나는 결정적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마틸데는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오토 베젠동크는 아내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바그너는 아쥘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오토 베젠동크 부부와 바그너의 인연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년 뒤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해 바그너는 다시 오토를 찾았고 오토는 바그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바그너의 베짱과 오토의 아량.. 이들의 놀라운 관계는 몇 년간 더 이어진다.)
    ㆍ바그너가 바라던 이상적인 아내, 코지마
    코지마는 바그너가 친밀하게 지내는 리스트의 딸이었다. 그리고 코지마의 남편 한스 폰 뷜로우는 리스트의 제자이자 바그너의 추종자였다.
    그러나 남편과의 결혼생활에서 행복을 맛보지 못하던 코지마는 딸 둘을 데리고 민나가 떠나버린 바그너의 집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1865년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태어난다. 바그너는 이 아이에게 이졸데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 바그너는 50이 넘어 자신의 아이를 처음 갖게 된 것이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같은 날 코지마의 남편 한스 폰 뷜로우는 오케스트라 연습을 시작한다.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위한 연습이었다. 한스 폰 뷜로우는 10여년 후 바그너가 계획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건립 때도 거액의 후원금을 냈다. 자신이 연주 여행에서 벌어들인 수입 전액을 기부한 것이다. 인간적으로 배신을 당했음에도 바그너에 대한 음악적인 존경심이 뷜로우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일까? 2년 뒤에는 바그너와 코지마의 둘째딸 에바가, 또 2년 뒤에는 아들 지크프리트가 탄생한다. 지크프리트가 탄생한 다음 해 1870년 7월 18일 이미 진행 중이던 코지마와 뷜로우의 이혼이 승인을 받았고 다음 달 8월 25일에 바그너와 코지마는 결혼식을 올렸다. 바그너 57세, 코지마 33세였다. 그 해 12월 25일 코지마의 생일에 바그너는 그녀가 자고 있는 침실 계단에 15명의 연주자를 대기시키고 코지마가 일어나자 그녀 몰래 작곡한 <지크프리트의 목가>를 들려준다. 코지마의 생일과 자신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아들 지크프리트의 탄생을 기뻐하는 마음을 함께 담은 것이다. <지크프리트의 목가>는 바그너의 그 어떤 곡보다도 감미롭고 사랑스럽고 평화롭다.
    Wagner - Siegfried Idyll

    바그너는 자신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수용할 수 있는 축제 극장 설립의 꿈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25년간 놓지 않았던 극음악 <니벨룽의 반지>를 끝내 완성한다. 1876년 8월 13일, ‘라인의 황금’ 공연을 시작으로 4일간의 <니벨룽의 반지> 전체 사이클이 커다란 박수갈채와 함께 초연되었다. 이 첫 번째 바이로이트 축전 기간 바그너는 31세의 작가 유디트 고티에와 사랑에 빠진다. 이를 코지마는 눈치 챘고 바이로이트 축제가 끝나고 유디트 고티에가 바이로이트를 떠남으로써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두 번째 축전극 <파르지팔>의 대본을 쓰고 곡을 부치는 동안 고티에를 향한 바그너의 고백은 계속된다. “당신이 나를 안았을 때 그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습니다.” 바그너는 그녀에게 편지와 악보를 전한다. 1878년 2월 10일 편지는 중단되었고 2월 12일 코지마는“나를 두렵게 만드는 고통이 멈춘 것은 아니다”라고 일기에 적어놓는다. <파르지팔>은 1882년 8월 26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883년 2월 13일 바그너는 영국 출신의 젊은 소프라노 캐리 프링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녀와 바그너의 관계를 의심한 코지마의 추궁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심한 언쟁이 오갔고 바그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날 오후, 하녀 베티는 책상 위에 쓰러져있는 바그너를 발견했다. 코지마가 달려갔을 때 바그너는 숨이 남아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눈을 감았다. 코지마는 밤새 잠든 바그너 곁을 떠나지 못했다. 20년을 믿음과 사랑과 존경으로 섬겨온 남편의 마지막을 다툼으로 끝내버린 코지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Wagner - Die Walküre: "The Ride of the Valkyries" 바그너의 극음악 <니벨룽의 반지> 중 <발퀴레>.바그너는 암벽타기를 취미로 즐기던 때가 있었다.그에게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진기한 암벽세계는 <발퀴레>의 무대배경을 구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살아있는 동안 그에 관한 말과 행동 심지어 잠꼬대까지 모든 기록을 남겨 바그너가 자서전 <나의 생애>를 집필하는 데 바탕을 마련해줬다. 또 바그너 사후 47년을 더 살았던 그녀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와 바그너의 음악적 유산이 보전토록 직접 관리했다. 바그너에게 코지마는 자신이 그리던 이상형 -음악과 사상을 이해하고 헌신적인….-과 일치하는 바로 그런 아내였다.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