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12 하이든이 사랑한 여인

浮萍草 2015. 2. 23. 15:00
    첫사랑 여인이 수도원 가자 그녀 언니와 결혼했지만…
    Joseph Haydn / Symphony No. 45 in F-sharp minor "Farewell" (“고별”교향곡) 에스텔하지 궁정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가정을 떠나 오랜 공연생활에 지친
    나머지 하이든에게 자신들의 심경을 토로했다.하이든은 니콜라우스 공작이 기분이 언짢지 않으면서도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며 이 교향곡을 작곡
    했다.보통 교향곡의 4악장은 활기차게 마무리되지만 하이든은 f♯단조의 아다지오 템포로 설정하고 각 연주자는 자기 파트가 끝나면 촛불을 끄고 악기를 들고
    나가도록 계획되었다.이 연주를 감상한 니콜라우스 공작은 “이들이 모두 떠난다면 우리도 떠나야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다음 날 에스텔하자를 떠난다는 지시를
    내렸다.단원들을 아끼는 파파하이든의 지혜와 유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실제 생일은 4월 1일인데 만우절이라 일부러 3월 31일로 기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이든의 부모님은 노래를 좋아했고 아버지는 하프로 직접 반주도 하면서 노래를 즐겼다. 덕분에 12남매 중 세 아들 이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후에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은 작곡가로서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모차르트 일가와 함께 일했고 막내 요한 에반젤리스트는 테너가수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인 하이든은 8세부터 명망 높은 성 슈테판 성당 부속 합창단 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하이든은 합창단에서 고음역의 수석 독창자로 활동했고 그의 음성에 감탄한 교장선생님은 거세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 했다. 카스트라토로서 찬란한 경력을 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하이든의 아버지는 고향으로부터 달려와 하이든이 수술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만 17세가 지나며 변성기를 맞은 하이든은 고음역 수석 독창자의 역할을 해낼 수 없었고 더는 수업료를 지원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학교 측은 1749년 11월에 하이든을 졸업시켰다. 부모님은 하이든이 성직자의 길을 가기를 원하셨지만 하이든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빈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무일푼인 채 일정한 직업도 없었던 하이든은 굶기를 반복하고 비가 새는 친구의 집에 얹혀살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ㆍ첫사랑의 추억, 테레제
    재정적인 불안정 속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던 20대의 하이든에게 첫사랑의 여인이 나타난다. 하이든은 가발 제조업자 요한 페테르 켈러의 두 딸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이든은 요한의 둘째딸인 테레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켈러 부부 또한 하이든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으나 1755년 테레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수녀원에 들어간다. 이듬해 5월 12일에 공식적인 서원식이 있었는데 이 행사를 위해 하이든은 <오르간 협주곡 C장조>(Hob.ⅩⅧ:1)와 <살베 레지나>(Hob.ⅩⅩⅢ b:1)를 만들고 테레제 에게 헌정한다. 테레제도 하이든을 사랑했는지 두 사람이 얼마만큼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하이든에게 테레제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는 1756년이라고 날짜를 기록한 두 작품의 초고를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유언장을 작성할 때에도 테레제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말이다.
    ㆍ빗나간 사랑의 화살, 결혼
    테레제가 수녀원에 들어간 후 직업이 없던 하이든은 모르친 백작가의 음악 감독직을 제안받는다. 숙식 제공과 함께 연봉 200굴덴을 받는 조건이었다. 하이든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걱정을 내려놓은 채 맘껏 작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안정적인 가정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일까? 하이든은 1760년 결혼한다. 그 상대는 첫사랑 테레제의 언니 마리아 안나 켈러였다. 모차르트가 사랑하던 여인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했던 것처럼 하이든도 테레제와 닮은 여성상을 그의 언니 마리아 안나에게서 찾았던 것일까? 그러나 이 결혼은 평생 하이든의 마음 한구석을 외롭고 힘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이든은 후에 그 원인을 부인이 낭비벽이 심한 것과 아이를 낳지 못한 점을 들었으나 무엇보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을 음악가로서 조금도 이해해주지 못했다. 마리아 안나에게 남편의 직업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심지어 머리를 마는 컬 페이퍼로 사용했다고까지 전해진다.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이 결혼은 불행이었고 마리아 안나가 죽을 때까지 40년간 부부의 맥을 유지하기는 하나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낸 기간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인에게 정을 주지 못했던 하이든은 또 다른 사랑의 통로를 열어두게 된다. 그것은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도 다르지 않았다.
    Haydn: Quartet in E-flat major, Op. 33 No. 2, "Joke" 하이든 현악 4중주 "Joke"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은 끝난 듯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음악은 다시
    이어진다. 하이든의 음악에는 이렇듯 예기치 않는 요소들이 등장해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ㆍ10년의 사랑, 10년의 책임
    하이든이 결혼한 이듬해 모르친 백작은 음악분야에 지나치게 열정을 쏟은 나머지 경제적인 출혈을 감당하지 못해 오케스트라를 해산시켰고 하이든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놓고 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을까? 모르친 백작가에서 하이든의 활약을 지켜보던 파울 안톤 에스텔하지 공작이 하이든을 자신의 오케스트라의 부카펠마이스터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하이든은 카펠마이스터 베르너 사후 카펠마이스터로 승진했고 4명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 40년을 에스텔하지 가문 안에서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간다. 1779년 말, 하이든은 오페라단에 들어온 메조소프라노 루이지아 폴첼리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루이지아는 바이올린 주자인 남편 안토니오 폴첼리와 함께 에스텔하지 공의 궁정과 계약했으나 둘 다 실력이 좋지 않았다. 하이든은 루이지아에게 개인레슨도 해주고 아리아를 소화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원곡에 없는‘끼워넣는 아리아’를 작곡하는 등 루이지아를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힘쓴다. 루이지아는 하이든보다 열여덟살 연하였는데 그녀의 남편은 늙고 경제적 능력도 없었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혼생활의 불행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이든은 그런 루이지아를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1783년,아들이 하나 있던 루이지아는 둘째아들 안토니오를 출산한다. 이 아이를 두고 사람들은 하이든의 아들이라고 수군댔고 하이든은 둘째 안토니오뿐 아니라 루이지아의 큰아들 피에트로에게도 음악을 가르쳤고 후에 피에트로는 빈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 안토니오는 에스텔하지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하도록 평생에 걸쳐 지원해준다. 하이든과 루이지아의 관계는 1790년 루이지아가 에스텔하지가를 떠날 때까지 11년간 이어진다. 하이든은 루이지아와의 결혼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루이지아의 남편 안토니오가 죽었을 때 하이든은 루이지아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즉 두 쌍의 눈이 감기는 순간이 오겠지요. 한쪽은 이제 감겼으니 다음 한쪽도 하나님께서 부르시기를 빕니다.” 아…. 얼마나 절절하면서도 한편으론 얼마나 무서운 바람인가? 루이지아에겐 너무나 가슴 떨리는 사랑의 고백이지만 하이든의 부인 안나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심장이 무너질 듯 비참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이든과 루이지아 두 사람의 마음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1800년,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지아는 하이든에게 ‘결혼’에 대해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미 70세 가까이 된 하이든은 여생을 조용히 창작생활에 몰두하며 지내고 싶어했다. 그러자 루이지아는 하이든에게서 다음과 같은 서약서를 받아내고야 만다. “내가 재혼한다면 루이지아 이외의 다른 여성과는 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홀아비로 남아있는다면 내가 죽은 후 그녀에게 3백 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 이었다. 물론 루이지아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서약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루이지아는 이탈리아의 가수와 결혼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이든은 후에 유서에서 위의 서약 내용을 수정해 매년 지급하기로 한 연금을 150 플로린으로 삭감한다.
    마리아 안나 사비나 폰 겐칭거(Maria Anna Sabina von Genzinger)
    ㆍ마음을 열었던 유일한 여인, 친구의 아내
    1789년 하이든은 친구이자 에스텔하지 공의 주치의로 이름을 날린 의사 페터 폰 겐칭거의 부인 마리아 안나 사비나 폰 겐칭거(Maria Anna Sabina von Genzinger) 와 가까워진다. 음악을 사랑했던 겐칭거 부부는 친구들을 초대해 음악회를 열고 음식을 대접했다. 마리아 안 나 폰 겐칭거는 하이든의 음악을 좋아했고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던 그녀는 그의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주기도 했다. 또 하이든이 좋아하는 요리를 기억해서 대접하기도 했다. 하이든은 겐칭거의 집에서 그가 꿈꿔 왔던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맛보았을지 모른다. 마리아 안나 폰 겐칭거와 하이든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에는 이성으로서의 특별한 애정표현은 담겨 있지 않았으나 사적인 표현을 하지 않던 하이든은 유일하게 그녀에게 만은 자신의 모든 상황과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4년 뒤인 1793년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하이든은 <피아노 변주곡 F단조>로 그 슬픔을 노래한다.
    ㆍ뒤늦게 찾아온 사랑
    하이든은 1791~1795년 런던에 머문다. 이때 영국의 숙련된 피아니스트인 레베카 슈뢰터(Rebecca Schroeter) 는 하이든에게 22통의 사랑의 편지를 전한다. 그녀는 대단한 자산가로 18년 연하인 요한 사무엘 슈뢰터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1788년 요절했다. 16년 뒤에 하이든은 자신의 전기 작가 디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베카 슈뢰터(Rebecca Schroeter)
    “그녀는 60인 데도 (사실 레베카는 57세였다)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어요. 만약 내가 독신이기만 했다면 그녀와 결혼했을 거요.” 하이든은 피아노 3중주곡 3곡을 작곡해 레베카에게 바친다. 63세의 하이든에게 새로운 여인의 정열적인 사랑은 분명히 또 다른 창작의 힘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것 같다.
    ㆍ‘나는 결코 소멸하지 않으리라’
    1800년대 초 70대에 접어든 하이든은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난 후 거의 집 밖 출입도 하지 않았고 창작활동도 접게 된다. 1807년 의사들은 그가 작곡을 생각하느라 힘을 빼지 않도록 안방에서 피아노를 치워버린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창작에 대한 의욕과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이토록 철저하게 무너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기억력도 사라졌다. 가끔 피아노 앞에 앉으면 좋은 악상이 떠오르지만 그걸 적어두지 못하다 보니 울고 싶어진다.” 1808년 3월 27일 하이든은 빈 대학 축제 강당에서 열린 <천지창조> 공연에 참석하고 더이상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809년 2월 7일 하이든은 8년 전 이미 작성해둔 유서에“모든 이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글귀를 추가했고 그 해 5월 31일에 77세를 일기로 하이든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숨졌다. 전쟁 때문에 굼펜도르프의 지역 묘지에서 간단한 장례식만 치를 수 있었다. 장례식은 그 다음 날 오후 5시에 거행되었다.
    5년 후 하이든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노이콤은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거기에는 1814년이라는 숫자와 ’나는 결코 소멸하지 않으리라’(Non Omnis moriar)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후 그의 유골은 니콜라우스 에스텔하지 2세 공작이 1820년에 세운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 성당의 영묘에 안치되었다.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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