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10 베르디, 사랑하는 여인과 11년 동거하면서도 결혼 못한 이유는?

浮萍草 2015. 1. 5. 06:00
     
    ▲ (左)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1901.1.28 ▲ (右)Margherita Barezzi, 1814~1840

    르디는 1813년 10월 10일,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마을 론콜레에서 태어났다. 론콜레란 ‘낫’이란 뜻인데 베르디가 태어날 무렵에는 대장간과 농가 몇 개만 있었다. (론콜레 마을은 베르디를 기념하기 위해 1963년부터 마을 이름을 ‘론콜레 베르디’로 고쳤다.) 아버지는 식료품점을 하며 행상인을 위해 숙박도 제공하고 있었다. 베르디는 교회에서 음악을 접하고 10세 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가까운 도시 부세토의 상인으로 베르디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바레치(Antonio Barezzi)는 베르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후원한다. 1831년 5월, 부세토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던 베르디는 기숙사를 떠나 바레치 가(家)에서 동거하며 바레치의 네 딸 중 장녀였던 마르게리타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친다.
    ㆍ베르디 첫사랑과 결혼했지만
    …. 5년 뒤 1836년 베르디는 부세토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그는 마르게리타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이후 4년 동안 베르디는 연년생 남매의 탄생에 이은 기쁨도 잠기 두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고 1840년 6월 부인 마르게리따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게다가 같은 해 9월 라스칼라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희극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마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말년에 그의 자서전에서 베르디는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무시무시한 운명이 연이어 나를 가격했다. 4월 초부터 아프기 시작한 아이가 결국 어머니의 품에서 숨졌다. 며칠 뒤 더 어린 딸까지 병에 걸렸다! 이 병 역시 죽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6월의 첫 며칠 동안 젊은 아내가 심한 뇌막염을 앓았고 1840년 6월 19일 집에서 세 번째 관을 내가야 했다! 나는 혼자였다. 혼자! 두 달여가 흐르는 동안 사랑하던 세 사람이 영원히 나와 작별했다. 내 가정은 무너져버렸다.” 베르디는 자서전에서 2년여에 걸쳐 있었던 일을 두 달이라고 표현했다. 그에게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큰 고통이라 느껴졌던 것일까!
    Verdi, Rigoletto - La donna mobile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1851) 중 '여자의 마음'

    Giuseppina strepponi, 1815-1897
    ㆍ절망의 순간에 피어난 새로운 사랑
    베르디는 너무도 좌절한 나머지 삶도 음악도 모두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한 친구의 요청으로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오페라를 통해 반세기를 함께할 반려자 주세피나를 만나게 된다. 베르디는 나부코의 큰딸 아비가일 역을 소프라노 주세피나에게 맡겼고 그 확답을 듣기 위해 그녀를 방문했던 것이다. 1842년 12월 22일 두 사람은 처음 만났고 <나부코>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다. 1834년 말 19세에 첫 무대에 데뷔한 이후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몸을 돌볼 틈도 없이 수많은 무대에 올라야 했다. 오페라 공연을 하는 동안 주세피나는 테너 나폴레오네 모리아니를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모리아니는 네 아이의 아버지였으나 1837년부터 5년간 두 사람의 내연 관계는 이어진다. 1842년 주세피나는 모리아니의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소프라노로서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이와 동시에 아이 양육비 문제와 관련하여 모리아니에게도 환멸을 느끼고 그와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 베르디가 주세피나를 처음 만나던 때는 베르디가 그랬던 것처럼 주세피나 역시 삶과 음악 두 가지 모두에서 절망적인 시기 였던 것이다. 베르디는 주세피나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격려했고 1846년 <나부코>의 공연에서 주세피나는 박수갈채를 받는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1848년 함께 살기 시작했고 1859년 8월 29일 마침내 결혼했다. 11년을 함께 살면서도 정식 부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주세피나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베르디 부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세피나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특히 부세토의 사람들은 수군거림을 넘어 주세피나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에 가장 분개한 사람은 베르디였다. 그들은 부세토를 떠나 산타 아가타의 베르디 소유의 농장으로 가서 정착하고 둘만의 사랑을 가꿔나갔다. 이들은 무려 5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베르디에게 주세피나는 더없이 고마운 반려자였다.
    Verdi, La Traviata - ‘Libiamo ne'lieti calici’,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1853) 중'축배의 노래'베르디가 파리에서 주세피나와 함께 본 연극‘카멜리아의
    여인’에서 감명을 받아 만든 오페라. 육체는 타락했지만 영혼은 맑고 순수한 연극의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보며 주세피나를 생각했던 것일까!

    ㆍ휴식의 집
    베르디는 1901년 1월 27일 호텔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87세의 생을 마친다. 그의 사랑스러운 부인 주세피나는 베르디보다 4년 전에 그를 떠났다. 베르디는 말년에 밀라노의 노쇠한 음악가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집을 짓고‘휴식의 집’이라 불렀는데 그 집 예배당 안쪽에 베르디와 주세피나,그리고 첫째 부인 마르게리타의 묘가 있다. 당시 일반 묘지 이외의 장소에 매장하기 위해서는 시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한 달 동안 밀라노 기념묘지에 머물렀다가 ‘휴식의 집’으로 이장되었다. 이때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8백여명의 합창단원과 오케스트라가 오페라〈나부코>의 유명한 노래 ‘히브리 노예의 합창’을 불렀고 밀라노의 모든 거리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로 검은 물결을 이루었다. 베르디는 이 집을 스스로 ‘인생 최대의 걸작’이라 불렀고‘휴식의 집’은 자신의 인세로 유지비를 충당하라는 유언 덕분에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다.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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