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8 푸치니를 끝까지 사랑했지만 질투의 화신 아내 엘비라는 끝내…

浮萍草 2014. 11. 17. 06:00
    자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1924)
    대로 음악에 재능이 있는 가문에서 자란 푸치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학교에 다녔지만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파이프를 떼어다 팔아서 담배를 사기도 했다. 그럴 때면 파이프가 빠진 부분을 피해 화성을 바꿔 찬송가를 연주했다. 그러던 푸치니가 22세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의 공연을 본 후 오페라를 만드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날 내게 음악의 문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베르디의 뒤를 이어 감동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사랑받는 푸치니는 <마농레스코>,<라보엠>,<토스카>,<나비 부인>,<투란도트> 등 12개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는 평생을 한 여인의 남편으로 살았지만 쉴 새 없이 다른 여인들과의 스캔들을 만들어냈고 크고 작은 연애는 모두 그의 오페라 작품 속으로 투영되었다. 그의 삶 자체가 사랑 없이는 전개될 수 없는 한편의 오페라였다.
    ㆍ친구 부인을 사랑하게된 운명의 푸치니
    1884년 푸치니는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다. 장례식을 위해 고향인 루카를 찾았을 때 푸치니는 옛 친구인 나르시스코 제미냐니를 만난다. 옛 친구는 푸치니에게 자신의 아내 엘비라에게 음악수업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26세의 푸치니와 두 살 연하 엘비라는 일주일에 세 번, 피아노와 성악 레슨을 통해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고 2년 후인 1886년 엘비라는 푸치니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엘비라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의 기반을 과감히 버리고 여섯 살 큰딸만 데리고 가난한 푸치니를 따라나선다. 푸치니의 누이들은 엘비라를 비난했고 작은 마을 루카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분노했다. 엘비라는 푸치니를 따라 밀라노에 갔다. 그러나 얼마 후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면서 서로 다른 모습에 ‘불행’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푸치니는 자연을 사랑하고 시골을 좋아해서 한적한 토레 델 라고에 별장을 마련했으나 엘비라는 시골생활을 따분하게 여겨 밀라노의 아파트에 남아있었다. 그녀는 푸치니의 작품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푸치니와 그의 아내 엘비라
    게다가 푸치니는 카사노바 기질이 다분한 남자였다. 그는 남자가 가정의 임무에 충실히 하는 한 다른 여성과의 관계는 전혀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품 속의 주인공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작곡가 자신이 직접 현실 속에서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정열적인 사냥꾼이다. 우선 거위를 쫓고 최고의 오페라 대본을 쫓고 매력적인 여성을 쫓는다" 푸치니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곁에는 여성팬들의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푸치니에게는 그녀들을 뿌리칠 생각이 없었다. 이에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는 계속해서 남편을 의심하고 염탐하며 불안 속에서 마음의 병이 깊어만 갔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두 주인공처럼 푸치니는 카사노바의 기질을 접지 못 했고 엘비라는 끝끝내 그만을 따라갔던 것이다. 이름마저 돈 조반니의 여자 주인공 도나 엘비라와 같았던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 그녀의 가슴 속엔 사랑에 대한 뜨거운 갈망과 참을 수 없는 질투의 감정이 동시에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Puccini. Tosca - 'Vissi d'Arte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Angela Gheorghiu

    ㆍ토리노 사건··· 오페라 ‘나비부인
    푸치니가 바람기가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 아니었던 만큼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할 만큼 큰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법률학도였던 코리나와의 우연한 만남은 1900년 초부터 3년간 이어진다. 푸치니가 아내를 ‘신경과민증 경찰’이라고 불렀듯이 엘비라는 푸치니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기에 이 사실도 알게 된다. 엘비라는 처음으로 푸치니와 헤어지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가족들뿐만 아니라 지인들 모두가 토리노 사건으로 걱정한다. 그러던 중 1903년 2월, 푸치니는 자동차 사고로 누워지내야만 했고 그가 다시는 코리나에게 돌아갈 수 없도록 주변인들 모두 힘을 모은다. 푸치니의 배신에 분개한 코리나는 그녀가 살던 토리노에서 푸치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두 사람의 로맨스는 ‘토리노 사건’으로 기억된다. 자동차 사고 다음 날 엘비라의 남편 제미냐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당시 미망인은 배우자가 사망하고 10개월이 지나야 재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미냐니가 사망하고 정확히 10개월 후에 푸치니와 엘비라는 정식으로 결혼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 후 20년이 지난 시점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지쳐 있었는데 법적인 결혼 절차를 밟아야만 했을까? 푸치니로서는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 데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었을까? 또 엘비라에게는 진정한 동반자의 위치에서 푸치니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한 가닥 희망이었을까?
    Puccini.Madama Butterfly - ‘Vogliatemi bene (나를 사랑해주세요)’,P.Domingo,M.Freni.오페라 ‘나비부인’은 푸치니가 코리나를 만나고 있을 때 쓰여졌다.
    푸치니는 연극 ‘나비부인’을 본 후 주인공에게서 가장 이상적인 여인상을 발견하고 이를 오페라로 만들었다.그의 많은 요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트를 나비
    부인의 이름인 ‘초초상’이라고 이름붙일 정도로 나비부인을 사랑했다.

    ㆍ16세 소녀를 죽음으로··· 오페라 ‘투란도트’
    푸치니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자 엘비라는 간호를 위해 도리아 만프레디라는 16세 소녀를 고용한다. 도리아는 열심히 일했고 진정으로 충성을 다했다. 엘비라도 도리아를 딸처럼 아꼈다. 그러나 5년이 지나 20대에 접어든 도리아는 귀여운 소녀에서 매력적인 숙녀의 모습을 띠게 되었고 엘비라는 그녀를 남편의 최근 애인이라 상상했다. 지금까지 엘비라의 의심은 대부분 들어맞았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상상을 극대화한다. 엘비라는 도리아를 구박했고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사제에게 압력을 가해 도리아를 마을에서 내쫓았다. 또 의도적으로 온갖 나쁜 소문을 동네방네에 퍼뜨렸다. 견디다 못한 도리아는 결백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다. 도리아가 죽은 후 그녀의 순결은 입증되었고 도리아의 가족은 엘비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당시 ‘이것이 바로 오페라다’라는 제목으로 신문 1면을 장식했고 후에 TV 드라마와 영화 ‘푸치니의 여인’에서도 다루어졌다.
    Puccini. Turandot - 'Nessun Dorma (공주는 잠 못 이루고)'The three tenors.Carreras,Domingo,Pavarotti.오페라‘투란도트’에서 칼라프 왕자의 노예인‘류’는
    칼라프 왕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푸치니의 최후의 오페라‘투란도트’는 억울하게 죽어간 도리아를 떠올리며
    만든 것일까?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쓰던 중 각혈하며 쓰러졌고 후두암 선고를 받고 벨기에로 떠났으나 그는 관 속에 몸을 뉘인 채 밀라노로 돌아오게 된다. 1924년 11월 29일 그의 나이 66세였다. 위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 중에서 자신의 업적만큼이나 악처를 둔 불운한 남자로 유명한 이들이 있다. 나폴레옹,링컨,아우구스투스,아인슈타인,워싱턴,유방 등.음악가 중에서는 하이든과 푸치니가 이에 속한다. 왜 푸치니의 아내 엘비라는 악처의 군단에 이름을 올려야만 했을까? 왜 푸치니는 아내의 감시 속에서도 끝없이 다른 여자를 흠모해야 했을까? 가정을 버리고 질투의 화신이라 불리면서도 푸치니를 끝없이 따랐던 엘비라의 왜곡된 사랑과 아무 죄없이 사라져간 도리아 그리고 끝없는 연애를 했으나 진실된 사랑은 해 보지 못한 푸치니 푸치니의 삶 속의 모든 이들이 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오페라를 탄생시키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것일까?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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