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년 5월 대법원이 부부 강간죄 성립 여부에 대해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 왼쪽이 양승태 대법원장. | 정부조직법이 통과되고 새로운 부처 중심의 인사가 있었다.
언론에서는 연말연시 개각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다.
개각은 직원들의 초미의 관심사다.
장관에 따라 정책방향, 인사 및 조직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어서 모두 촉각을 곤두
세운다.
30년 동안 공직 생활을 했지만 지금도 생생히 생각나는 개각이 있다.
2004년 1월 초 새해 벽두부터 이뤄진 장관 개각이었다.
개각 발표가 나기 직전까지 우리 부처(여성부)가 개각 대상에 포함될 거란 예상은 거의
없었다.
당시 여성계의 오랜 숙원인 호주제 폐지와 성매매방지법 제정 등 큰 실적을 남겼기 때문
이었다.
당시 장관은 여성단체 출신으로 여성 정책에 오랫동안 헌신해온 분이어서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장관이 되어서도 열정과 추진력을 갖고 부처를 잘 이끌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 그가 예상을 깨고 갑작스레 교체돼 부처 공무원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대체 왜 교체된 거야?
곳곳에서 무성한 추측이 난무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온 얘기로는 그가 추진한 진보적인 정책들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 많았다.
특히 그가 부부 강간죄 도입 필요성을 언급했던 것이 결정타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2003년 11월 그는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부부사이에서도 존중돼야 한다”며“부부 강간죄를 도입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부간의 성폭력은 대개 성폭력만 따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폭력적 성행위는 안 된다고 본다”는 말도 했다.
이후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여성부 홈페이지와 전화로 남성들의 비난과 질문이 쏟아졌다.
부부 강간죄는 부부 사이에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린 뒤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경우가 있어 여성단체에선 부부 강간죄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오던 터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부부 강간죄란 용어에서 남성들이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장관의 발언은 10년 앞을 내다 본 소신 발언이었다.
작년 5월 대법원이 실질적인 혼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폭행이나 협박으로 배우자를 간음한 경우엔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확정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1970년엔“설령 남편이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다고 해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43년 만에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사실 이 판결은 10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큼 세상이 바뀌었고 그런 추세가 대법원 판결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10년 전 그해 가을 곤혹을 치렀던 여성부 홈페이지도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엔 조용했다.
예의 그 장관은 부부 강간죄 도입 필요성을 역설한 지 두 달 후 바뀌었다.
보통 장관은 2년 하면 바뀐다.
그도 2년 가까이 했으니 바뀔 때가 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책 없이 좋은 실적을 냈던 그를 갑자기 바꾼 것은 지금도 아쉬운 대목이다.
☞ Premium Chosun ☜ ■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bslee8812@gmail.com
草浮 印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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