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6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浮萍草 2014. 7. 20. 06:00
    차이코프스키, 아르토에 배신 당하고 동성애자가 됐나?
    P. I.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flat minor, Op. 23. Conductor: Herbert von Karajan Pianist: Evgeny Kissin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이코프스키!의 삶을 따라가노라면 거친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조각배가 떠오른다. 평생을 크고 작은 파도에 부딪히면서 간절히 정박하고 싶어했지만 끝내 홀로 견뎌내야 했던 차이코프스키. 그는 길고 지루한 인생의 항해 속에서 자신만의 감수성 짙은 음악들을 탄생시킨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러시아 비야트카 지방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상하고 상냥한 성격의 광산 감독관으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구사하며 피아노와 하프를 연주할 줄 아는 교양있는 여성이었다. 차이코스프키는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인 모데스트와 가장 친하게 지냈으며 후에 모데스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토대로 차이코프스키에 관한 전기를 남겼다. 차이코프스키는 열 살이던 1850년 여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예과에 들어갔다.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러시아 작곡가로 손꼽히는 차이코프스키는 이때부터 10년을 음악과 상관없이 법률 공부에 매달린다. 1859년 졸업한 뒤에는 처음 뜻한 바대로 법무부에 직장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차이코프스키는 1861년부터 오직 음악에만 열중했다. 다음해 9월에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이 건립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세운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초빙된다. 이 시기의 작품 중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위해 썼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은 협주곡의 가치가 없으며 완전히 연주 불가능한 것이니 수정하든지 아예 새로 작곡해야 한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음표 하나 고치지 않고 이 작품을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 에게 헌정했다. 뷜로우는 “당신은 모든 피아니스트의 감사를 받을 만합니다” 라고 감사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 곡을 보스턴에서 초연한 후 뉴욕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도 연주했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청중들의 환호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곡이며 피아니스트들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니콜라이는 후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ㆍ데지레 아르토를 사랑했지만 배신 당하고
    데지레 아르토 (Desiree Artot)
    1868년 봄에 차이코프스키는 한 여인과 결혼을 약속한다. 그녀는 소프라노 여가수인 데지레 아르토였다.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 초청공연을 왔던 그녀는 차이코프스키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두 사람은 잦은 만남을 계기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나누게 된다. 같은 해 12월, 차이코프스키는 아버지에게 아르토와의 결혼 결심을 알린다. 그러나 아버지만이 아니라 주위의 만류가 이어졌다. 차이코프스키가 고민하고 결정할 새도 없이 오페라단을 따라 연주여행을 하던 아르토는 불과 몇 달 뒤인 1869년 초 스페인 바리톤 가수인 마리아노 데 파디야 이라모스와 결혼한다. 차이코프스키는 충격과 함께 일종의 안도감마저 느끼게 된다. 데지레 아르토 (Desiree Artot) 1년 후 아르토가 다시 모스크바로 오기에 앞서 차이코프스키는 그 쓰라렸던 기억의 흔적 속에서도 그녀를 기다리게 된다. 두 사람은 친구처럼 만났다. 그리고 1888년 베를린에서 재회한다. 그때에도 차이코프스키는 아르토를 20년 전과 다름 없이 아름답다고 칭송한다.
    ㆍ인생 최대의 실수, 최악의 선택, 결혼
    1876년 9월 차이코프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요즘 많은 생각을 한단다. 나 자신에 관해서 즉 나의 미래에 관해서도.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단다. 누구하고 결혼하든지 간에 말이다.”
    며칠 후 차이코프스키는 여동생 사샤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동성애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당시 사회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아니 그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스스로 책망으로 늘 괴로워했다. 그는 사회의 시선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와 밀류브코바
    그리고 다음해 7월 6일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류브코바와 결혼한다. 그것은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이목에서 도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7일간 이어진 신혼여행 후 차이코프스키는 동생 아나톨리에게 편지로 자신의 심경을 전한다. “나는 그녀에게 단지 나의 형제애 같은 사랑만은 믿어도 좋다고 설명해주었단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혼 후 3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모스크바 강가의 한적한 장소를 찾아 강물이 가슴에 가득 찰 때까지 걸어 들어갔으나 그의 자살은 시도로 끝난다. 차이코프스키는 이혼하지 않은 채 평생 다시는 밀류브코바를 만나지 않았다.
    ㆍ만나지 않는다는 조건,1200여통 서신왕래로 14년 동안 계속된 사랑
    1876년 말, 차이코프스키는 열렬한 팬의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것은 마흔 네살의 과부 메크 부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엄청난 철도산업의 부호였고 그녀는 18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11명만 살아있었다. 남편과의 사별 후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던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몇 개의 소품과 편곡을 의뢰하며 작품에 대한 사례비를 제시한다. 이로써 그들의 기나긴 서신 왕래가 시작되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연금으로 본격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단 그녀의 조건은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데즈다 필라레토브나 폰 메크 (Nadezhda Filaretovna von Meck)
    메크 부인은 왜 그런 제안을 했을까? 14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서신만 교환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상 차이코프스키는 이 제안을 오히려 반겼고 이들은 이 약속을 지키려 애썼다. 차이코프스키는 종종 메크 부인의 별장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때는 메크 부인의 부재 시에만 허락되었다. 피렌체와 파리에서 두 사람은 같은 공연을 관람할 때도 목례조차 나누지 않았다. 메크 부인은 단지 후원자였을 뿐이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평생 많은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항상 속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격식을 갖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그때그때의 심정,고민 등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기도 했다. “제가 온 가슴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태까지 당신처럼 저에게 가깝게 있고 또한 저와 닮았으며 저의 모든 생각과 제 가슴의 모든 고동소리에 귀 기울여 반응해주는 그러한 영혼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에게 당신의 우정은 없어서는 안 될 공기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메크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모든 고민을 들어주었지만 그의 결혼소식에는 질투를 느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아주 부당한 일이지만 제가 질투심을 가지게 된 것을 아시나요? 당신이 결혼할 때 마치 저의 가슴이 찢겨 나가는 것처럼 제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부인과 당신이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정말 고통스럽고 쓰라리며 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메크 부인의 후원은 14년간 이어졌고 이들은 1200통 넘는 편지를 교환했다. 후에 차이코프스키의 동생 모데스트는 이 편지들을 엮어 출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을 맺을 때에는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통보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몇 번의 서신을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자존심을 상한 차이코프스키는 오랜 연인이자 친구인 메크부인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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