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음악가가 사랑한 여인

7 스트라빈스키, 아내가 있는 데도 샤넬과…

浮萍草 2014. 7. 24. 06:00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Fedorovich Stravinsky 1882~1971)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로 손꼽히는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평생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기법으로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했는데 그에게 유일하게 견줄만한 이는 피카소 정도였다. 두 사람 다 격변하는 20세기를 거치며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맘껏 표출했기 때문이다.
    ㆍ연인보다 가까웠던 아내, 예카테리나
    스트라빈스키는 1905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사촌 예카테리나와 결혼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8살, 예카테리나가 9살 때였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던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언젠가 서로 결혼하게 될 운명임을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그녀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는 단짝처럼 때로는 연인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예카테리나는 스트라빈스키를 내조했을 뿐 아니라 네 아이 엄마로 스트라빈스키가 편곡한 피아노 연탄곡을 같이 연주하고 악보 필사를 돕는 등 음악적으로도 좋은 동반자였다. 그녀는 1939년 3월,58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그보다 석 달 전 스트라빈스키 부부의 큰 딸 류드밀라도 같은 병으로 29세 짧은 생을 마감한다.
    ㆍ“내가 곧 스타일이다” 코코 샤넬과의 로맨스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서전 형식의 책을 여러 권 썼으나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바 없다. 오히려 후대에는 2011년 개봉되었던 영화‘샤넬과 스트라빈스키’를 통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13년 5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세 번째 발레작품 ‘봄의 제전’이 초연된다. 음악도 안무도 너무나 파격적이었던‘봄의 제전’초연 공연장은 관객의 야유와 항의에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스트라빈스키는 객석에서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왔고 안무가 니진스키는 무용수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무대 뒤에서“하나 둘,셋,넷”계속 박자를 불러줘야 했으며 기획자 였던 디아길레프는 조명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이 자리에 샤넬이 있었다. 이 항의와 혼란 속에 진행된 공연에서 샤넬은 그 분위기를 즐겼으며 디아길레프를 눈여겨보게 된다. 1년 후 1914년 4월,‘봄의 제전’은 안무를 뺀 콘서트 형식으로 다시 한 번 연주되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Igor Stravinsky - Le Sacre du Printemps - Vaslav Nijinsky-Version 1913 - Ballett Mariinski-Theater

    전쟁과 아내 예카테리나의 병으로 스위스에 머물던 스트라빈스키는 1920년,파리의 몽마르트르에 터를 잡는다. 병약한 아내와 함께하며 예술적 활동도 중단하고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고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도 끊겨 궁색한 생활을 하던 스트라빈스키에게 샤넬은 자신의 별장에 와서 머물 것을 권한다. 스트라빈스키 가족이 샤넬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둘만의 은밀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사는 집에서. 영화에서는 샤넬이 도도한 여성으로 스트라빈스키를 강하게 유혹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샤넬은 훗날 이렇게 추억한다. “스트라빈스키는 내게 너무너무 잘해줬어요. 어느 날 내가“이고르,부인이 당신이 이런다는 걸 알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더군요. “물론 아내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내가 아내 말고 누구에게 그런 사실을 털어놓겠어요?라고요.” 샤넬에 의하면 스트라빈스키의 사랑은 오로지 음악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2년여를 샤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샤넬과 남편의 사이를 알게 된 스트라빈스키 부인 예카테리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그곳을 떠났고 스트라빈스키도 얼마 후 샤넬 곁을 떠난다. 그 시기 연인이었던 드미트리 대공과 헤어진 샤넬은 또 다른 연인을 찾아나선다.
    영화

    ㆍ스트라빈스키의 두 번째 부인인 러시아 출신 무용수 베라 드 보세트
    1920~1921년,스트라빈스키가 샤넬의 집에 머물던 이 시기에 스트라빈스키는 베라 드 보세트라는 여인과도 사랑의 불장난을 시작하고 있었다. 베라는 외향적인 성격에 관능미를 겸비한 러시아 출신 무용수로 스트라빈스키의 부인과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베라와의 관계 또한 스트라빈스키의 부인은 알고 있었으나 참고 침묵으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빈스키 부인 예카테리나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 이듬해인 1940년 3월 9일 스트라빈스키와 베라는 오랜 내연관계에서 정식 부부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다. 앞서 예술세계에서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를 비교했는데 이들은 부부 관계에서도 흡사한 면이 있다. 피카소는 열한 살 아래인 발레리나 올가 호흘로바와 결혼한 상태에서 아들의 유모였던 마리 테레즈 발터와 불륜에 빠진다. 올가가 이 사실을 알고 이혼을 통보했으나 피카소는 재산을 분할하기 싫어 거부하고 18년 동안 법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한 뒤 아내가 죽자 발터와 재혼한다. 스트라빈스키가 20년을 애인으로 삼던 베라와 아내 사후 재혼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와 베라. 왼쪽은 결혼하던 해 1940년의 사진. 오른쪽은 1969년 뉴욕에서.

    스트라빈스키와 베라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으며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두 사람은 젊은 날의 스냅사진부터 함께한 노년기까지의 사진들을 모아 짧은 설명을 곁들인 사진작품집을 만들었다. 1971년 4월 6일, 스트라빈스키는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성 요한과 성 바오로 성당에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죽은 자의 섬’이라 불리는 산미켈레 섬에 묻혔다. 스트라빈스키 무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그와 함께 많은 발레작품을 성공시켰던 공연기획자 디아길레프의 묘가 있었다.
    Premium Chosun        고은영 피아니스트 21c.muse.ke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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