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50> 캄보디아 ②

浮萍草 2015. 2. 16. 10:49
    신성과 세속의 즐거운 만남
    코르와트의 천상계인 3층 지성소(至聖所)에서 여행객의 자취가 사라진 마지막까지 내려가지 않고 남아있었다. 
    해가 지고 난 즈음, 텅 빈 거대한 회랑의 사방을 홀로 헤매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지붕도 벽도 기둥도 온통 회색과 먹색인 석조건축에 겹겹이 둘러싸여 시간과 공간이 가늠되지 않는 성계(聖界)에 놓인 듯 그렇게 천 년 전 크메르왕국의 자취에 압도
    되었다.
    ‘텅 비어있음’ 또는 공(空)의 느낌이 가장 고조된 순간이기도 했다. 
    혼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여행객과 함께였던 다른 앙코르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득한 시간 너머의 장엄한 종교예술과 거기에서 내뿜는 무채색의 고색창연함이 인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시간은 ‘영원’이었고 그곳의 공간은 ‘신성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지성소 사방의 작은 공간에 모셔놓은 불상에 이르러 ‘텅 비어있음’은 깨어졌다. 
    신성의 시공간을 부순 것은 불상이 걸친 붉은색 또는 노란색의 옷이었고 그 앞에 바친 공양물이었다. 
    석조·철조 불상이 걸치고 있는 원색가사가 공(空)을 깨뜨린 색(色)이었다면 향을 피운 흔적과 공양물은 ‘영원’에서 건너온 ‘지금’이었다. 
    물론 여기서 ‘공과 색’ 운운은 감각적인 느낌의 표현일 따름이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누빌 때도 느낄 수 없었던 온기를 불상의 얇은 원색가사와 공양물에서 비로소 느꼈다면 과장일까. 
    불전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가사를 걸친 불상은 남방불교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이 참으로 반가웠던 건 아득한 고대유물이 관람의 대상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내면적으로 소통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적지 이면으로 눈을 돌려보면 신성과 세속의 즐거운 만남은 보다 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 
    유적지마다 현지아이들이 잠자거나 뛰어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여행객들이 티켓을 끊고 들어가는 유적영역 안에 주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앙코르가 놀이터이자 산책코스이고 신성과 세속의 세계를 구분하며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거대한 해자(垓字)는 아이들이 다이빙하는 물 놀이터이다. 
    3층 지성소에선 불전함의 돈을 훔치려는 아이들과 관리인이 숨바꼭질을 하며 천상계를 누비기도 한다.
    캄보디아 일정 내내 운전을 도맡아준 툭툭이기사는 일찍 결혼하여 네 아이를 두었는데 집에 놀러가도 되는지 물어보자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는 형제들과 열 집 남짓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열대나무를 얽어 원두막처럼 만든 그의 집은 놀랍게도 앙코르와트 바로 옆이었다. 
    매일 앙코르와트를 눈과 가슴에 담으며 출퇴근하는 그에게 저절로 엄지손가락이 치켜세워졌다. 
    유적지 곁에는 사원이 있어, 천 년 전의 성지를 보고나서 사원에 들러 부처님과 스님께 절을 올리는 마음 또한 어찌 특별나지 않겠는가.
    견고한 석물과 불상의 얇은 원색가사처럼 과거와 현재 영원과 찰나가 함께하고 신성과 세속의 만남이 새삼스레 신비로운 곳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득히 먼 곳의 먼 시간 속에서 들려온 북소리에 이끌려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북소리가 들리는 날이 있다면 아마도 앙코르를 찾을 듯하다.
    
    ☞ 불교신문 Vol 3081 ☜       구미래 동방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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