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91 쏘련의 등장

浮萍草 2015. 2. 11. 12:06
    4. 쏘련식 공산주의의 시행착오 돈에 혼돈을 거듭하고 있던 후진 자본주의국가인 러시아사회 - 온갖 사상적 괴물(유령)들이 난무하고 있던 쓸모없이 덩치만 큰 그 북국에는 톨스토이같은 이상 주의자들도 가끔 있기는 했지만,잔인하고 음흉한 음모가들에게 더욱 적합한 토양인 듯 했다. '세계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대규모 공장들이 보다 많이 건립되는 현상으로 파악하고 보다 진보하는 사회란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고 노동자들 마음대로 모든 권력을 주무르는 사회를 뜻하는 것쯤으로 파악한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마르크스 자신도 그 확실한 사회적 모습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바 없는 공산 주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과욕에 사로잡혔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목표지향성이 강했던 자는 레닌이었다. 러시아 왕국의 관리였던 부친을 둔 레닌은 일찌기 그의 친형이 사상범으로써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의 반체제적 사상전개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10대 소년시절에 형을 처형시킨 러시아 정부에 대한 원한이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나로드니키들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 토지를 소농민들에게 평등하게 분배하자는 주장을 하자, 레닌은 그 방법이 지주들에 의하여 발전해 가고 있던 자본 주의적 대농경영(大農經營)을 해체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반대하는 기묘한 작태를 연출했다. 그는 농민들이 소경영자로서 자립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에 반동적이라는 논리부재의 논법으로 나로드니키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단지 대규모 경영과 고도의 생산력이라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증거 불충분한 하나의'가설'을 관철시키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 듯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세력으로서의 프를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뭉쳐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자신은 노동자도 농민도 아니었다. 결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던 그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직업적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도한다'는 괴상한 논리까지 끄집어내는 등 횡설수설을 벌였는데 그가 모델로 삼았던 사회는 묘하게도 신흥제국주의 국가로 급성장해 가고 있던 미합중국이었다. 그의 논리전개 방식이라는 것은 결국 러시아가 이상적인 농본사회주의적(農本杜會主義的) 사회로 나아가서는 안되며 러시아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치닫다가 거기서 발생하는 자체 모순의 심화로 인한 혁명이 발생해서 멸망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논리는 러시아 왕정에 대한 그 자신의 증오를 교묘하게 위장하려는 논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레닌이 정신병리학적으로 관찰해야만 할 심각한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책임지지도 못할 우려할만한 작화증(作話症 ; Confabulation)의 증상을 나타내고 있던 중 에도 러시아 왕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큰 사건들은 연달아 발생했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하여 태평양에 도달한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에 대한 이권을 확보하려다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충돌했는데(서1904), 전쟁개시 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러시아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을 격퇴시킨 이후 세계 최강의 육군국임을 자랑하던 러시아는 크리미아 전쟁에 이어서 잇단 패배를 기록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국내의 불안도 격심해졌다. 패색이 짙어가던 서기1904년 가을에 페트로그라드 경찰은 노동자로 취업하기 위해 농촌에서 몰려왔던 유랑민들을 20여만 명이나 추방하는 무모한 조치를 단행 했는데 패전이 확실시 된 다음해 1월 9일 아침에는 15만 명 이상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생활보장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들고 겨울궁전으로 행진하는 사태가 벌어 졌다. 그런데 궁전수비대는 그들을 구두(口頭)로 해산시키려다가 실패하자 무작정 발포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피의 일요일 사건). 그로 인하여 시위군중 천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과격한 볼셰비키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짜르전제 타도'를 외치며 파업과 시위를 선동했다. 소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가자 한 달여 후인 2월 18일에 짜르 니콜라이 2세는 스스로 양보하고,"법안의 준비와 심의에 국민대표를 참가시킬 것이며 장래의 자문 국회는 농민우위로 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또한 원로원에 대해서도, "충성스러운 신민 및 그 단체가 국정개선에 관한 청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도록‥"하는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히려 볼셰비키들의 선동은 활발해졌고, 더욱 혼란상태가 가중되어 갔다. 니콜라이2세는 난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같은 해 10월에'시민적 자유와 선거권을 확대하고 입법국회도 만들겠다'는 제안을 했으나,도시 노동자 대표기관인 페트로 그라드 쏘비에트는 자신들의 요구조건만을 막무가내로 내 걸고 무조건 거부하고 나섰으므로 공장들이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찌기 군주제도에 반대하여 자유를 쟁취했다는 프랑스는 러시아의 금융을 장악하고 러시아에서의 큰 이익을 보장받으려고 군주인 짜르를 지원하는 모순을 저지르기도 했다. 프랑스공화국은 짜르체제의 붕괴를 막으려고 다음 해 봄에 8억 루불이라는 막대한 차관을 러시아에 제공했는데 그로 인하여 한숨 돌린 짜르정부는 새로운 농업 정책을 채택하여 혁명의 열기를 가라앉히려 했다. 그리고 당분간 짜르정부는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세력확장을 목표로 해서 주로 주변 회교국가들에 대해 내정간섭을 통하여 상품시장 확대를 꾀했다. 유럽지방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서기 1914년에 스위스의 베른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뒤늦게 헤겔철학 연구에 몰두하여 그 역시 헤겔 연구가였던 마르크스와 맥을 같이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교적 간단한 그의 결론은, "세계는 발전적이고, 운동적이고, 모순적이며,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우월하다‥ 세계는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으로 세계를 변혁시키려고 결심한다."는 등 극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2년 후 취리히로 거처를 옮기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 그는, "자본주의(특히 제국주의)는 민주주의를 환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대중 속에 민주주의적 지향을 형성시키고 민주주의적 제도를 만들어 내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제국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중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킨다." 라는 그 혼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언어의 유희를 하기도 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부르조아에 반대하고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민주주의적 조직화를 통하여 부르조아를 수탈하고 제국 주의를 타파하여 경제적·민주적(?) 개혁을 완수한다." 는 극도의 언어적 혼란을 구사하기도 했다. '민주'라는 용어를 누구보다도 뻔질나게 구사했던 그는 나중에는 '민주독재'라는 엄청난 '언어적 독재'를 자행하기도 했다. 5. 러시아민중반란과 볼세비키혁명
    일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자동적으로 독일과 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 러시아가 힘을 모아도 감당하기 힘든 전쟁을 치르는 판에 노동자들의 파업은 격화되었고 전쟁개시 2년 후인 서기 1916년에는 볼셰비키들의 선동으로 더욱 많은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그 1년 전인 서기 1915년 8월에 짜르 자신이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후 정치는 주로 신비주의적인 수도사(修道士) 라스푸친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후방의 소요사태를 우려한 왕족들은 그를 처단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기 1916년 12월에 그가 암샅당한 후에도 사태는 오히려 악화되었고 다음 해인 서기 1917년 2월에 섬유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선두로 페트로그라드는 기어코 반란의 광란에 빠져들었다. 쏘비에트가 이끈 반란군은 6일만에 수도를 석권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에 따라서 짜르는 스스로 퇴위하기로 결정했다. 왕위를 이어 받은 미하일 대공은 사퇴해 버렸으므로 권력은 반란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쏘비에트조직 자체로서는 정치적 역량이 미약했으므로 주로 부르조아 계층이 내각의 구성에 임시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데 7개월 후인 10월 25일에 페트로 그라드의 노·병(勞·兵) 쏘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했고 임시정부의 수상이었던 케렌스키는 도주해 버리고 말았다. 2월 혁명 당시 여전히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레닌은 제2차 국제노동자조직(즉, 인터내셔날)이 전쟁 중에는 각 국가의 이기적 목적에 봉사하려고 각각 분열되어 버려서 한낱 백일몽에 불과했음이 드러나자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전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전쟁광란을 벌였던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그의 가치를 잘 알고 이용하려 했다.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레닌을 소위 봉인 열차(封印列車)에 태워서 러시아로 돌려 보내는 데 협조하는 대신, 레닌으로 하여금 러시아 후방에서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밀약을 맺었다. 민족이나 국가 등의 개념이 별로 없었던 듯한 레닌은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으로 4월 중에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가서 소위 4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러나 반란의 2차적 공헌자였던 고참 볼셰비키들이 레닌의 독선적인 주장에 크게 반발했으므로 그는 고립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특히 반란군의 기본적인 정책이었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에 반대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데 그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소부르조아적 농민층이 그 기반이며, 짜리즘의 전통을 신성한 것으로 지키고 있는 소경영주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라고 강변하면서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러시아 혁명의 발전에 있어서 최대의 적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스위스에서의 망명생활이 그의 작화증 완화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증세가 심각해졌음을 드러낸 그는 그후로도 도무지 종잡을 수조차 없는 횡설수설을 연발했다. 일일이 예를 들 수도 없는 그의 망발 중에는 소위 '민족해방논리'라는 걸작도 있었는데 한 때는, "타민족을 계속 억압하는 한 어떠한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 는 일견 그럴듯한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레닌은 자기 자신이 선호해 마지않았던 미합중국식(또는 다른 자본주의나라 방식)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쳐서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예전의 주장을 송두리째 망각한 듯한 이런 식의 주장을 마치 카멜레온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서 편리한 대로 내뱉곤 했다. 자신의 언행에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던 듯한 그는 수년 후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신명을 다 바쳐서 왜구들과 싸우던 동맹자인 문명국조선의 광복군들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학살해 버리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와 극빈농(極貧農)에 의한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행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던 듯한 그는, 4월 테제(Th se) 발표 이후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 온 농민들의 지지라도 얻어 보려고 그 스스로 비판해 온 '농민에의 토지배분'을 합리화하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는 무정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기 1917년 7월에 레닌을 위시한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기도했던 민중폭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레닌은 재빨리 핀란드로 도주했다. 전쟁과 내란의 혼란 속에서 민생고는 극에 달했고 볼셰비키들은'땅과 빵과 평화'를 구호로 내걸고 계속 민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년말에는 독일군이 드디어 백러시아 지역의 내분을 틈타서 백러시아에 괴뢰정부를 수립했고 얼마 후에는 러시아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우크라이나 지방마저 점령해 버렸다. 10월에 케렌스키의 멘셰비키 정부를 몰아 내고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조국방위를 포기하고 독일침략군과 굴욕적인 '브레스트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에 의하여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인류의 적'으로 비난해 마지않던 볼셰비키 정권으로부터 정식으로 우크라이나의 제철공업지대 및 곡창지대를 얻게 되었으므로 볼셰비키의 러시아란 얼어붙은 쓸모없는 커다란 땅덩어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처럼 무력화되자 코카사스 지방의 여러 민족들도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여러 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어 나가버렸다. 볼셰비키들은 러시아를 침략해온 자들에게 총 한 방도 안 쏴 본 채로 러시아의 가장 풍요하고도 중요한 지역들을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겨 준 것이었다. 비밀 봉인열차에 레닌을 실어 러시아로 되돌려 보냈던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톡톡히 그 댓가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볼셰비키들의 매국적 행위에 분노한 러시아 왕국의 지지자들은 볼셰비키를 타도하고자 궐기했고, 따라서 러시아는 다시 격렬한 내란상태로 돌입했다. 궁지에 빠진 볼셰비키들은 민중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미사여구와 장미및 환상으로 민중을 선동했고 약 1년간에 걸친 볼가 - 우랄지역에서의 내전끝에 서서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 갔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타쉬켄트 지역에서는 회교 민족지도자들이 볼셰비키의 배타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임시정부를 세웠는데 볼셰비키 군대는 서기 1918년 2월에 회교도들의 중심도시인 코칸드를 점령한 후 도시 주민 대부분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와 같은 볼셰비키의 강압적 점령은 대부분의 회교도 주민들에게 깊은 분쟁의 씨앗이 될 원한을 남겨 주었다. 연합군에 밀린 독일군이 국내의 사회적 불안이 겹쳐서 서기 1918년 11월을 고비로 무너지기 시작하자 볼셰비키는 그 기회에 우크라이나와 발트연안 등을 장악하려 했으나 각 지역의 민족지도자들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잦은 분쟁을 일으켰다. 연합군은 미합중국의 경제불황 타개를 목적으로 한 무제한적인 대량원조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일단 독일을 제압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볼셰비키를 몰아 내고 자본 주의 국가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려고 러시아 왕국의 세력인 백군(白軍)에 대한 원조를 제공했다. 이에 고무된 백군의 데니킨 장군은 우크라이나를 점거한 후 파죽지세로 모스크바에서 250마일 지점까지 진격했고 볼셰비키 정권은 곧 붕괴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주의 국가들의 간섭은 오히려 러시아 민중의 전통적인 애국심을 자극하여,그때까지만 해도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민중을 결속시키는 방향으로 작용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볼셰비키들의 권력을 강화해 주는 셈이 되었다. 민중의 전통적인 애국심과 위기의식을 역이용하여 이번에는'조국수호' 구호를 외치게 된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은, 마르크스 이론이 아닌 민족주의적 애국심에 의해서 비로소 그 기반을 다지는 기회주의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볼셰비키 정권을 위협하는 어떠한 세력도 반혁명적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려 하던 볼셰비키는 그 자신들이 짜르체제의 극악한 폐단이라고 극구 비난했던'비밀경찰조직'을 강화함으로써,볼셰비키 정권의 체질이 짜르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도 했다. 새로운 러시아가 결코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위협이 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게 된 외국들의 간섭이 지나가고 볼셰비키가 비밀경찰 조직을 최대한 활용하여 소수독재 체제를 확립해 갈 무렵인 서기 1922년에 레닌은 뇌출혈로 직무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그의 후임자로서는 그루지아공화국 출신의 스탈린이 부상했다. 마키아벨리스트로서 비상하게 유능한 행정가이자 냉혈한인 그의 등장은 러시아 전체를 휩쓰는 피비린내를 몰고 왔다. 그리고 반란으로 시작되었던 이른바 '혁명'도 그의 잔혹한 철권정치 하에서는 그 문자적(文字的)인 의미마저 점점 더 찾을 수 없게 되어 갔다. 6. 러시아 혁명의 문제점
    국가의 사활을 건 중대한 대외전쟁을 치르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도외시하고'혁명'에 성공하여 러시아 왕국을 찬탈한 레닌의 쏘비에트 정부는 과연 어떠한 길로 나아갔는가? 일찌기'제국주의론'을 발표하여 서양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간파하여 비판한 바 있던 레닌은,'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하여 노동자들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구호로나마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레닌의 쏘비에트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대부분 유태인 출신 지식인 내지는 부르조아 출신 혁명가들이었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제국주의에 대한 외면상의 철저한 증오심으로 인하여 서양의 여러 강대국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내정 간섭을 불러 일으킨 쏘비에트 정부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만국의 노동자 단결'과'소수민족해방'을 부르짖음으로써 내우외환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일차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 패권국가들은 전쟁초기에 같은 연합군이었던 러시아의 급격한 변신에 주목했다. 제국주의자들은 쏘비에트식의 사회혁명이 서양세계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내정간섭을 하기에는 별로 명분이 서지 않았으므로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왕국의 백군은 그래도 같은 제국주의였던 서양제국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일차대전 후에는 서양에서도 반전분위기가 일시적이나마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형식적인 지원을 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여러 제국주의 나라들은 차라리 레닌의 쏘비에트 정부를 잠정적으로 인정하고 러시아 지방의 이권에나 개입할 수 있기를 바라는 형편이었다. 러시아 왕국은 하위 자본주의 국가로서 서양각국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 자본가들은 혁명정부를 위협해서 자기들이 투자했던 자본을 되찾으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정복고를 원하는 백군이 승리할 가망성이 사라지자 혁명정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돌렸으나 곧 이어 국내의 경제적 파탄을 해결해야만 하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미 러시아의 마지막 왕인 니콜라이 2세의 왕실가족을 모조리 우랄산맥의 폐가에서 학살하고 근왕세력을 숙청한 바 있는 쏘비에트 정부는 지주들과 자본가들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공장과 농토 등을 노동자·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워낙 재정이 빈약했던 관계로 마음먹었던 만큼 제대로 혁명사업을 수행해 나가기에는 힘겨웠다. 궁지에 빠진 레닌은 수년도 지나지 않아서'신경제정책'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밀고 나갔으나 그것은 별다른 묘책이 아니라 자신들이 비방해온 바 있는 '제국주의자들' 에게 경제적 원조를 받아서 쏘비에트 사회를 공업화하자는 내용이었다. 거창한 표어와는 달리 그 정책의 실제적 내용 자체는 러시아 왕국의 공업화정책과 별다른 차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합중국의 최대 재벌인 록펠러 재단은 쏘비에트에 대한 대폭적인 물자수출을 시도했고 서기 1926년에 록펠러 재단의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그 자회사인 '바큠석유'는 유럽시장에 소련의 석유를 수출하는 거래를 체결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서기 1927년에는 스탠다드 석유회사가 러시아에 석유정제시설을 건설하는 등으로 미합중국의 금융자본과 민간 상업자본은 쏘비에트에 큰 관심을 가진 경제적 이권단체로서 등장했다. 일차대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제국주의적 거지'들의 세상인 유럽에 대하여 당시의 미합중국이 행사할 수 있었던 강력한 자금 및 물자공급 능력을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이상한 관계로 보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단편적인 몇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무리한 연관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유태인 혁명가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주의건설' 사업을, 이 또한 잘 알려진 유태인들의 대표적 다국적기업으로서 세계 경제를 주무르다시피 하고 있는 록펠러 재단과 체이스 내셔날 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힘쓰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만으로 보기에는 여러가지로 분석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그 이후에도 서로 내세우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가장 살벌하고도 적대적인 구호·비방과는 달리 단 한번의 사소한 충돌조차 직접 일으킨 적은 없었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핵무기를 비롯한 최첨단 군사국으로서의 균형이 생기기 전에 극심한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가 누구의 안목으로도 확실하던 시절에서조차 마찬 가지였다. 속사정이야 어쨌건 레닌의 쏘비에트 정부는'신경제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한번 쏘비에트의 권력 상층부를 장악한 중·소 부르조아 출신의 혁명지도자라는 통치배들은 결코 그들의 지위를 놓으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른바'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는 새로운 '혁명귀족'계급을 형성하여 강력한 관료독재 체제로 돌입해 갔다. 과연 무엇 때문에 '혁명'은 필요했던가? 러시아인들은 불안하게나마 '빵'을 얻는 대신 비밀경찰의 번뜩이는 감시 속에서 '자유'를 잃게 된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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