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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인도와 지나지방의 반제국주의 투쟁

浮萍草 2015. 2. 25. 11:32
    9. 인도인들의 각성
    시아의 남쪽지방에 치우쳐 있었던 오랜 문명국 인도 지방에는 칭기스칸의 후예들이 세운 무갈제국(=무굴제국)이 번영하고 있었으나, 
    서양의 여러 해적국가들의 침략으로 국력이 급속히 쇠퇴해 갔다. 최후로 포르투갈과 프랑스 세력을 인도지방에서 이겨낸 영국섬의 해적들은 무갈제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점점 심하게 하더니, 
    급기야는 인도지방를 완전히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 따라서 아시아 남부 아열대지방의 풍요한 산물과 온갖 보물들이 모두 영국섬의 국고로 들어가 버렸고,영국섬은 자기들의 싸구려 공산품들을 인도를 위시한 전 
    세계의 식민자에 팔아 먹음으로써 이중삼중으로 식민지를 착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에 편입되어 있던 인도인들의 용병부대인'세포이'의 대대적인 반란을 계기로, 마침내 인도지방에서도 항영투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영국섬의 해적들은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을 잔인하게 탄압하였으나 한번 불붙기 시작한 독립에의 염원은 그칠 줄 모르고 확대되어 갔다. 
    서기 1857년에 발생한 세포이 반란은 영국섬의 인도지방 지배가 그 종말에 가까와졌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세포이 소속 병사들이 총을 쏠 때 입으로 물어서 끊는 방법으로 사용하던 소총알의 약포를 소기름과 돼지기름으로 발랐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데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이며 돼지는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이 입에 대서는 안되는 금기동물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힌두교도 아니면 이슬람교도인 인도인에게 그러한 소문이 미친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마치 수십년 후 조선인들이 단발령에 반발하여 전면적인 의병봉기를 일으켰듯이 세포이들은 오랜동안 인도지방을 착취해 온 영국섬의 통치배들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감추지 않고 대대적으로 궐기했다. 
    그것은 곧 반란이 아닌 당당한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해 갔다. 
    영국섬의 해적들에 대한 전면적인 독립운동에는 대부분의 인도지방 민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방 토후들도 참여했으며,심지어는 형식적으로나마 존속하고 있던 
    무갈제국의 왕과 왕족들까지도 가담했다. 
    백여년 전에 북미대륙에서 거대한 식민지를 상실했던 언짢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영국섬 통치배들이 인도지방 독립운동을 탄압한 방식은 잔인성을 극한 것이었다. 
    당시 영국섬의 풍요를 지탱해 주고 있던 인도지방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해적들은,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서'어쩔 수 없이''백인의 
    부담을 져 왔다'던 저들 자신의 주장도 잊어버린 채,
    "교회 하나가 파괴당하면 힌두교 사원 백 개의 파괴로 답하라! 백인 한 명이 살해당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천명의 힌두교도를 사형에 처하라!"
    고 아우성쳤는데, 불행히도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발악은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독립운동에 강력한 단결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해적들은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을 열심히 조장하면서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밀고 나아가서, 3년만에 
    독립운동을 짓누르고 말았다. 
    끝까지 저항하던 무갈왕자는 마침내 항복하려고 했으나 영국섬의 해적들은 항복하려고 해적진영으로 찾아간 그를 즉석에서 총살해 버렸다. 
    일국의 왕자에 대한 태도가 이랬을 지경이니 나머지 민중에 대한 대접은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인도지방 전역은 무참하게 살해된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억울한 시체들로 완전히 뒤덮이다시피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영국섬 통치배들은 그때까지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간접통치하던 가면마저 내던져 버리고,무갈왕국을 직접 통치하는 보다 솔직한'신사다운 방법(?)'
    으로 전환했다. 
    영국섬의 젖줄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인도지방만은 영국해적들이 결코 놓칠 수 없는 보물단지였고 따라서 서서히 각성하기 시작하는 인도지방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보다 악랄한 탄압책이 강구되었다. 
    그러나 탄압이 가중될수록 그에 대한 반발도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수백년간 서양해적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인도지방의 민중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회복하여 독립투쟁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큰 사상적 지주가 된 것은,미사여구로 
    요란하게 분칠한 서양의 인권사상이나 서양의 근대문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인도인들의 오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적 유산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인도지방의 민중 속으로 널리 퍼져서 독립의식을 고무시키는 데 크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민족지도자의 하나였던 파알은,
    "인도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상 사로잡을 수 없었던 옛 전통 속의 남신(男神)·여신(女神)들이 숨을 되돌렸다. 
    그들의 모든 것이 참신한 역사적·민족주의적 해석아래 인도의 마음과 영혼위에 되살아났다."
    고 기뻐했다. 이러한 강한 민족적 의식이 회복되어감에 따라서 많은 우수한 민족지도자들이 탄압을 무릅쓰고 다양한 항영투쟁을 전개해 갔다. 
    영국섬 통치배들은 인도지방의 상류계급을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이용해 먹었으나 바로 그러한 상류계급 중에서 변호사로서 교육받은 간디에 의해 인도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간디는 이른바'무저항 불복종운동'과'국산품 애용운동'등을 벌여서 영국해적들과의 무력투쟁에서 과다하게 발생할 수 있는 인명피해를 줄이고 국제적 여론에 호소
    하고자 했다. 
    간디의 무저항투쟁에 의해서 곤경에 빠져들어 간 영국섬 통치배들은 그래도 왜구들보다는 약간 나은 편이었는지 이를 잔혹하게 탄압하지는 못하고 타협적으로 
    대하되,인도지방에서의 이권만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인류문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마하트마 간디의 선진적인 저항자세는 인도국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다소 생각이 깊은 서양의 몇몇 지식인들에 의하여 높이 평가받거나 찬양되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간디 개인에 대한 찬사였을 뿐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 강도국들의 수탈이 약화된 것도 아니었고 그럴 가망도 보이지 않았다. 
    영국섬은 인도반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인도반도 북부의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지역까지도 손을 뻗쳐가고 있었고 동쪽의 버마와 서쪽의 이란 및 아라비아 
    등의 지역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바야흐로 영국섬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 세계 제국주의국가들 중에서도 단연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영국섬의 무력을 상대로 무력
    해방투쟁을 한다는 것은 마치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러한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모한 무력투쟁보다도 인도국민 스스로가 각성하기를 기대하면서 무저항 불복종운동을 일으켰다. 
    간디 자신도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공장에서 나온 옷감이 아닌,손수 물레를 이용하여 만든 거친 옷감을 걸치고 최소량의 음식만을 섭취하면서 근검 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무력투쟁 진압에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는 영국섬의'신사'들도 새로운 투쟁방법을 고안한 이'문명인'에게는 무슨 방법을 써야 좋을지 몰라서 허둥지둥했다. 
    그러나 인도지방만은 결코 내놓기 싫었던 영국섬의 해적들은 최후발악적인 탄압에 인색할 수 없었다. 
    일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 든 서기 1919년 2월에 인도지방에 대한 항구적인 탄압을 목적으로 로올라트법(Rawlatt Bill)이 제정되자,국민의회파의 지도자 간디는 그 
    악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4월에 인도반도 북부의 펀잡지방에 있는 암리차시(市)에서 악법반대 집회가 열리자 영국섬 해적들은 그들 비무장 민중에게 무차별 조준사격을 가하여 무려 1516
    명의 군중을 학살해 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문명국 조선에서 벌어진 왜구들의 학살만행이나 별로 다를 것 없는 대규모 학살사건은 인도지방 민중을 크게 자극하여 반영운동은 더 한층 고조되어 
    갔다. 
    학살사건으로 인하여 '영국신사'라는 간판에 스스로 먹칠을 한 셈이 되어 버린 영국섬의 제국주의자들은 국제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그렇다고 해서 인도
    지방을 순순히 내놓을 용의는 없었다. 간디가 이끄는 인도지방의 무저항 독립운동은 더욱더 광범위하게 전개되어갔다. 
    
    10. 지나지방의 풍운
    군벌의 난립에 의하여 전란속에 지새우던 지나지방은 어떻게 변해 갔는가? 비적(匪賊)사회에 한자리 끼어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 되다시피 할만큼 비적 또한 난무하던 '민국'도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대략 몇 개의 큰 세력권으로 나뉘었다. 그 중에서도 장강 남북에 걸쳐 세력이 성장한 손문의 국민당 군벌과 만주지방의 장작림 군벌과 중원지방의 원세개일파 세력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삶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도탄속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래도 동부해안 지대인 북경·천진·청도·상해·한구·광동 등지에는 서양의 자본과 일본의 자본· 매판자본·민국의 상인자본 등 각종 자본가들이 공업진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상해에는 서양의 각종 공관들이 들어서 있었고, 아예 한 구역씩을 떼어서 이른바 조계라는 것을 만들어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각 나라마다의 조계에는 물론 그 나라의 선교사·상인·외교관·군인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 조계에 살고 있던 서양(일본을 포함하여)침략자들은 자기들이 지나지방에서 저지르고 있는 큰 죄악에 대해 스스로 갈등에 싸여,오히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피해망상 비슷한 자위 본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엉뚱하게도 중화민국인들에 대한 경멸과 천대로 나타났다. 가장 단적으로 그 당시 침략자들의 못된 심성을 가리키는 일화의 하나로 프랑스 조계의 입구에는'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경계표시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서양제국주의 침략자들 자신이 늑대나 승냥이 같은 작자들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한가닥 양심은 있었다고나 봐 줄 것인가? 늑대나 승냥이보다는 그래도 개쪽이 한결 점잖을 테니까! 그런 날강도들이 문명이라는 가짜 간판뒤에서 갖은 퇴폐와 타락에 빠져 들고 있는 동안 민국인들의 생활은 처참을 더해갔다. 상해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공업지대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취업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어느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였지만 노동자들은 쉽게 공산주의 사상을 동경하게 되고 자신들의 한심한 생존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쉽사리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지나지방은 이를테면 전 세계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은 '자본주의 주변국'이었고 따라서 지나지방에서의 노동자 착취와 농민의 피폐상은 소위 '자본주의선진국'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유랑민들은 꾸리(苦力)라는 싸구려 임시 노동자가 되어 가족들의 식량을 얻기 위해 지나지방 천지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으므로 공장에 필요한 인력은 언제나 남아 돌 지경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대우'라는 것은 관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았고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서양침략자들의 집에서 기르는 개만큼도 취급받지 못했다. 지나지방에 있는 '인도적인 선교사들'의 집 개들은 날마다 빗질하고 자주 목욕하고 거지들을 쫓기 위해서 항상 식사를 풍족하게 제공받으면서 매질이나 생명의 위협 같은 것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 동물 애호' 정신이 투철한, 또한 적자 생존이라는 동물적 논리에 투철했던 서양 '문명인'의 마음과 정신 속에는 유색인에 대한 인간 사랑과 인간존중은 자기들 욕심을 채우는데 매우 불편했고,유색인종은 개보다도 못한 동물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서기 1917년에 성공한 쏘비에트 혁명은 이처럼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던 지나지방 민중의 마음에 한가닥 희망을 불어 넣었다. 상해지방에서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치는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므로, 매판세력인 군벌들은 앞을 다투어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의 이익은 곧 지방 군벌들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호남성 장사에서 성장한 모택동(마오쩌뚱)은 청년다운 문제의식과 의협심으로써 새로운 서양의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반식민지인 지나지방의 인민해방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노동자가 아닌 중산계급 출신 교육자였으나 이상적 사회를 갈망하는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쉽사리 공산주의 사회건설 운동에 참여했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져 가자 국민당 군벌의 총수였던 손문은 그들을 차라리 국민당의 조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감시와 견제에 용이하게 하고자 했다. 손문의 명망은 국민당 군벌 내부의 타락과는 관계없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으므로 그러한 손문의 정책도 받아 들여져서,서기 1922년에 이른바 제일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손문은 처음에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혁명운동을 시작했으나 연륜이 쌓여가면서 점차 지나지방의 옛 문화에 심취되어 갔다. 그리고 그는 깊은 연구끝에, "동양적 이상사회인 대동주의와 공산주의가 그 이상에 있어서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손문은 북방 군벌인 단기서와 회담하기 위하여 북경에 갔다가 지병인 간암이 악화되어 서기 1925년에 일생을 마쳤다. 손문의 포용력과 지도력으로 간신히 표면상의 합작을 유지하던 공산당과 국민당 군벌간에는 곧 대립이 시작되었으나 당분간은 공존할 수 있었다. 다음 해인 서기 1926년 6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인 장개석은 북벌을 단행하기로 하였는데 공산당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남쪽 항구인 광동에서 출발한 북벌군이 항주에 이르렀을 때 주은래가 관여하던 상해총공회에서 서기 1927년 2월 19일 새벽에 총파업을 시도한 사건이 벌어 졌다. 파업은 항주지방 군벌인 손전방의 가혹한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나 3월 23일에는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하여 마침내 상해가 점령되고'상해꼼뮨'이 성립되었다. 3월 26일에 상해까지 진격해 간 장개석은 노동자 봉기에 당황한 서양침략자들의 요구를 받아 들여 3월 24일에 발생한 엉뚱한 선교사 살해사건을 이들 '상해꼼뮨'에 뒤집어 씌우고 깡패와 군대조직을 동원하여 4월 12일과 13일에 노동자들을 습격해서 370여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었다. 이른바 '4·12쿠데타'로 불리운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국공합작은 깨어지고 장개석은 갑자기 반공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로써 막을 올린 장개석의 백색테러는 전 지나지방으로 확산되어, 5만여명이 학살당하는 처참한 동족상잔을 빚었다. 무 한에 있던 국민정부는 4월 17일에 장개석에 대한 당적 박탈과 체포령을 결의했으나,장개석은 이에 반발하여 4월 18일에 남경에 새로운 국민정부를 세움으로써, 국민정부는 둘로 갈린 채 극렬한 대립상태에 들어 갔다. 이로써 장개석이 노렸던 것은 우선적으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장비의 열세로 인하여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쫓겨 다니기 시작했다. 북방군벌인 단기서와 만주군벌 장작림과 내통하고 있던 일본제국주의 강도들은 이러한 지나지방의 어지러운 분열을 틈타서 만주와 지나지방으로의 침략을 기도했다. 일제침략자들은 저들의 본토인 열도지방과 조선에서도 퍼져가기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지나지방의 공산주의 운동도 사전에 꺾으려 했다. 일제는 단기서·장작림·장개석 등과 각각 음흉한 계략을 꾸미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각 군벌간에 이간질을 하기가 매우 용이했던 것이다. 모든 힘을 합해도 제국주의 강도 세력을 몰아내기 힘든 판에,간교한 제국주의자들의 이간질과 군벌들의 야욕에 의하여 사분오열되어 있었던 지나지방 민중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입장이 난처하게 되어갔다. 기회주의자들의 천국인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믿을 수 있는 우방은 아무 데도 없었던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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