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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광무황제 폭붕과 광복투쟁

浮萍草 2015. 2. 23. 11:51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음이 위에 있고,검정색이다),고종황제가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태극무늬가 회오리 모양),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
    '대한독립'이라고 쓴 안중근 태극기 (왼쪽부터 시계방향) 사진편집=김영조 © 편집부

    7. 광무황제의 폭붕(暴崩) 병활동 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던 초기의 광복투쟁에서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거나 광무황제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의논했던 많은 의병장 들과 밀사들의 광무황제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강제로 퇴위 당한 후에도 광무황제는 신임할 만한 사람들에게 밀지를 내리거나 독려하는 방법으로 의병항쟁이나 광복활동을 지속시켰다. 왜구들은 광무황제야말로 이러한 모든 광복운동의 배후조종자라고 여기고 광무황제를 암살해 버리려는 흉악한 음모를 추진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 회영은 광무황제를 비밀리에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총지휘탑으로 하려 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거미줄같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성공적으로 망명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광무황제 자신도 탈출을 기도했으나 이완용에게 정보가 탐지되어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각국대표들이 빠리에 모여서 강화회의를 열자 왜구들은 그 기회에 저들의 강제합방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학명분으로 일본에 강제로 끌고 갔던 황태자 영(친)왕과 왜왕족인 방자(芳子:마사꼬)를 결혼시킨 후 신혼여행이라는 명분으로 유럽지방 여러나라들을 친선방문토록 하다가 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참석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한일 두 나라가 동화(同化)되었다는 증거로 내세우려 했다. 또한 왜구들은 영왕의 결혼을 추진하는 동시에 한일합방이 양국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문서를 작성해서 매국노 윤덕영을 시켜 광무황제의 어새를 누르도록 핍박 하려 하였으나 광무황제는 깨끗이 거절했으며 영왕의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얼마후인 4252년(서1919) 1월 21일 오후 3시에 광무황제는 궁녀들이 가져 온 식혜를 마신 후 곧 절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왜구들에 의한 암살혐의가 짙은 황제의 폭붕에 대해서는 어떠한 공식적인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왜구들은 시해사실을 감춘 채 서둘러 영왕을 결혼시켜 빠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했으나 시해소식은 시해당일부터 궁중에서부터 흘러나와 곧 전국으로 퍼져 갔다.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국각지에서 몰려 든 대한국인들은 3월 1일 아침에 민족대표 33인이 요리집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 왜구들 에게 체포당한 시간을 전후하여 탑골공원에서부터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며 독립만세시위에 들어감으로써 한민족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독립운동의 금자탑중의 하나인 삼일광복투쟁이 전개되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한국인들이 거주하는 곳 어디서든지 만세소리가 계속되었는데 왜구들은 평화적 시위에 대해서 야만적 대탄압을 자행했다. 그리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결코 광복을 이룰 수 없음을 뼈저리게 재확인한 대한국인들은 스스로의 실력으로 광복을 쟁취하기 위하여 주저 하지 않고 무력항쟁과 의열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8. 대한국인들의 국권회복투쟁
    북간도의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본격적인 국권회복투쟁을 위하여 이 역시 대종교인들이 대부분인 강력한 무장투쟁부대를 양성해 갔다. 삼일운동 탄압으로 국제적인 여론의 공격 대상이 된 왜구들은,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양민 수만 명을 살상한 죄악을 감추기에 급급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문화정치'라는 것을 하겠다고 헛 수작을 둘러대었다. 도대체 문화 문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날강도들이 한다는 문화정치라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 문화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는 10여년 후의 결과가 잘 증명해 주었다. 소위 '대정데모크라시'를 하고 있다는 작자들이 대한국에서 저지른 수탈과 만행을 보면 데모크라시의 본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 생각이나 해 본 적이 있는 자들 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는 왜구들의 선배격인 서양제국주의자들도 모두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떠벌리고 있는 판이었으니 그 알량한 민주주의를 배운 왜구들이라고 해서 제대로 민주 주의 원칙을 지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주문일 것이었다. 하여간 왜구들이 내세운 그런 기만술책과는 관계없이 대한광복군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왜군들이 설치한 각종 관공서와 시설물 등의 수탈보조기구들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중화민국의 상해에서도'임시정부'가 망명 애국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활동을 개시했다. 안 창호·신 채호·신 규식·이승만 등 대체로 젊은 애국계몽운동 출신자들 중에는 미국에 독립청원이나 하러 다니게 되는 꼴볼견의 '권력지향성'인물도 있었으나, 대체로 정의감과 진리수호의 정열에 불타는 훌륭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임시정부는 난데없이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삼은 데다가 서양열강 등 국제사회로부터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지 못하여 난항을 거듭하게 되었다. 즉, 대한제국을 되찾으려는 광복투쟁 단체로서보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새나라 대한민국을 세우려한 데 대해서 국제사회가 그 명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민족이 낳은 당대의 가장 박식한 사학자이자 진정한 혁명가이기도 한 신 채호 선생은 국권회복운동에 꼭 필요한 '민족정기'의 화신으로서, 한민족의 긍지를 북돋울 수 있는 바른 민족사의 연구에도 다대한 업적을 남겼으며,그러한 강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조선혁명선언·의열단 강령 등의 불꽃튀는 문장과 함께 혁명운동에 큰 기대를 걸고 직접 참여했다. 중화민국에서 활동하던 광복운동가들 중에는 러시아에서 불붙기 시작한'정체불명'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그 본질적인 면의 추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들도 많았다. 국제적인 정보나 지식에 과히 밝지는 못했어도 그들 모두는'순수한 조국해방의 열정'으로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더구나 레닌이 혁명전쟁의 전략상 '소수민족의 해방'을 크게 내 걸었으므로 그 새로운 국가에 대하여 다소 과다한 기대를 걸었다고 하여 대한국 혁명가들의 잘못은 아니다. 막강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고립무원 상태에서 맨 손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대한국의 모든 혁명가와 광복투사들은,농담으로라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내 세운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였던 러시아의 새로운 정부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믿고 싶었던 것 뿐이다. 레닌의 쏘비에트 정부도 동맹세력을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식민지 해방투쟁을 전개하던 혁명가들에게 처음에는 다소간의 원조를 해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도지방의 국권회복운동이 격렬해져서 하루도 편하게 발 뻗고 잘 날이 없게 된 왜구들은 광복군근거지를 아예 말살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북간도의 광복군에 대한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 백군의 요청에 따라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왜구들의 병력과 함경도 나남에 근거지를 둔 왜구의 수개 사단 병력이 남쪽과 북쪽에서 협공을 하기로 한 것이다. 국권회복운동에 중대한 일대 위기가 초래되었던 것인데,시기각각으로 조여들어 오는 위기감을 느낀 북로군정서는 원시적인 무기만으로는 도저히 난국을 타개할 길이 없었으므로 최신 무기의 구입을 서둘렀다. 때마침 러시아 백군을 돕기 위하여 지구를 반바퀴 돌아서 연해주 방면에 출병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군대가 철수하기로 되었음을 알고 북로군정서는 비밀리에 그들과 교섭을 벌인 끝에 많은 우수한 신무기들을 구입했다. 교섭에서 운반까지 모두 백두산 밀림지대를 이용하여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므로 천우신조와 함께 한 그 작전은 완전히 뜻대로 진행 되었다. 한편 왜구들은 한반도와 연해주에서 북간도로 침략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상 형식적으로라도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소·만 국경의 비적들과 음모를 꾸며서 두만강 건너에 있는 훈춘성을 비적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그 비적들은 대한광복군을 가장하고 일본 영사관을 비롯한 관공서들을 습작하여 수명의 일본인 사상자를 내었다. 왜구들은 곧 자기 동족들을 희생으로 삼은 이'작전'을 빌미삼아서'일본인 민간인을 살상한 조선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출동했다. 간도의 주권자였던 대한국 조정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간도지역은 이른바 '간도협약이라는 청나라와 왜구들간의 불법적인 조약으로 인하여 어처구니없이 청나라에 넘겨진 이래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중원지방을 장악한 중화민국에 형식적으로나마 넘겨져 있었다. 만주의 동북지역을 관할하는 길림성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엉뚱한 트집을 잡아서 만주로 진격해 오려 하지나 않을까 우려하여,북로군정서를 길림성에서 떠나도록 종용했다. 북로군정서를 현실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중앙정부는 없었으므로 광복군들은 할 수 없이 정든 숙영지를 떠나서 길게 뻗친 백두산 줄기를 따라 백두천산으로 향하였으나 미처 도착도 하기 전에 청산리에서 왜구들과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울창한 백두산 줄기의 밀림과 익숙한 지형을 잘 이용한 천오백명의 북로군정서 용사들은 김 좌진 장군과 이 범석 연성대장 등의 주도면밀한 지휘하에 기습 공격을 가하여 왜구의 연대장 이하 천여명 이상을 총살시키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현대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삼만여명에 달하는 왜구들을 패퇴시킨 북로군정서의 손실은 오십여명에 불과하였으나 그 하나하나가 왜구들의 천 개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용맹한 훌륭한 영웅들이었다. 정신을 못 차릴 지경으로 참패를 당한 왜구들은 다시 복수를 하겠다고 덤벼들었으나 이번에는 광복군을 가운데 두고 자기들끼리 포탄을 주고 받는 작태를 연출하여 다시 수백명의 왜구 사상자가 났다. 그 틈에 북로군정서군은 산길로 하루에 약 백여리를 이동하는 최고의 기동력을 발휘하여 왜구들의 포위에서 벗어나서 재정비에 들어갔다. 모든 광복군들은 그 소식에 환호하고 사기충천했다. 그처럼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왜구들은 대한광복군 유격대를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 한번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북간도에서 철수하던 왜구떼는 대한광복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두만강 연안과 북간도쪽의 백두산 줄기 일대에 널리 펼쳐져 있던 대한국인 부락들을 깡그리 불태우고,학살하고,약탈해 가는 소위 '삼광(三光)작전'을 선보였던 것이다. 주로 광복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던 수만명 대종교인들의 거처였던 북간도 일대가 모두 학살당하고 폐허화함으로써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헌신적이었고 반외세투쟁에 앞장섰던 대종교는 그 뿌리가 뽑히다시피 되었다. 사만여명에 달하는 대한국 양민들을 학살한 왜구들은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어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기도 하고,고통에 울부짖는 어린 소년을 총창에 꿰어서 들고 다니다가 냇물에 던져 죽이는 등 잔인무도한 왜구들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삼백년 전의 임진왜란때 보다도 더욱 퇴보한 괴수들의 모습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광복투쟁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동족이 살상당하는 것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백두산 근거지를 떠나 소만국경인 밀산으로 향했다. 대종교의 총책임자이기도 한 서 일(徐一) 총재는 밀산에서 다시 광복군을 양성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왜구들은 다시 비적 이만여명을 뇌물로 매수하여 밀산의 근거지를 야밤에 덥쳤으니 그 어처구니없는 야습에 의하여 수백명의 아까운 용사들이 북만주의 밀림속에서 비명횡사를 당했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밤새 전투를 벌여 비적들을 격퇴하기는 하였으나 광복군의 손실은 너무나 컸으므로 서 일 총재는 자신이 부덕하여 사전에 비적들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감으로 스스로 숨을 멈추어 버리는 폐기법(閉氣法)으로 자결해 버렸다. 그리하여 북로군정서는 일단 움직이기 쉬운 여러 부대로 나뉘어 후일을 기약하며 흩어져 갔다. 그 중 일부는 시베리아로 들어가서 쏘비에트 적군(赤軍)을 도와 시베리아에 왜구들을 불러 들인 러시아 백군을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쏘련은 일본의 적국이었으므로, 일본제국주의 강도들을 쳐부수려면 쏘련과도 협력을 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 적군(赤軍)과 대한국광복군과는 긴밀한 협조관계하에서 왜구들을 응징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이라는 극도의 혼돈 속에 빠져 있던 시베리아의 정세 또한 극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따라서 한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도 여러 계열로 갈리는 분열 상을 보였다. 동부 시베리아 지방에서 왜구의 반격이 심해지자 적군과 쏘련 영내의 대한광복군은 잠시 흑룡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모두 자유시로 집결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흑룡강 상류에 위치한 자유시는 갑자기 광복군의 집합장소처럼 되었고 일기당천의 광복군 용사들은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한인 공산주의자들 간에 이들 한인 무장세력을 자기 수중에 장악하기 위한 치사한 암투가 벌어졌다. 물론 광복군은 그러한 난잡한 속사정을 알리가 없었으나 볼셰비키들은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이미 검토하고 있었다. 백군이 전멸하다시피 한 시점에 '제국주의자인 왜구'들에게 쓸데없이 더 이상 시베리아 출병의 구실을 줄 우려가 있는 광복군의 존재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자임을 자처하던 볼셰비키'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거창스러운 것이었다. 이윽고 볼셰비키들은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추잡한 갈등을 핑계삼아서 광복군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무기들을 전부 거두겠다는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수십년의 세월에 걸친 풍찬노숙의 험한 시련 속에서도 오직 내 손으로 오랑캐 왜구들을 때려잡고 문명의 세상을 회복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광복군 노장들이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따를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실제적으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지 못하고 무기를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며 만일에 그 진짜 이유를 알았더라면 더욱 더 내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소민족의 해방'이나 '제국주의자들과의 투쟁'보다는 제국주의국가들로부터 불똥이 튀어 올까봐 잔뜩 겁먹은 비겁한 혁명정부는 광복군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고 강제로 무기를 압수하려 했다. 수천명의 인민해방군이 중화기로 포위한 가운데 대한광복군은 단호히 무기인도를 거부하고 흑룡강을 건너 북만주땅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기들이 멋대로 정한 시간 내로 무기를 압수할 전망이 없게 되자,'설마'하고 있던 대한국 광복군을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졌다. 우세한 중화기로 무장한 몇배나 되는 인민해방군을 대적하여 가망없는 처절한 투쟁을 벌인 광복군 용사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원통한 선혈을 태극기에 흩뿌리며 쓰러져갔다. 숱한 사상자가 나는 가운데서도 흑룡강쪽으로 혈로를 뚫고 탈출을 기도하던 광복군들은 간신히 강을 건너다가도 인민해방군의 총격을 받아 한맺힌 피로 흑룡강을 붉게 물들였다. 청산리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뜨거운 애국자들의 피가 그들이 도와주었던'혁명가'들의 배신에 의하여 시베리아의 산하에 어지러이 흩뿌려지고 만 것이다. 쏘련군 및 한인 공산당원의 파렴치한 배신행위를 당했거나 전해 들은 모든 광복군은 이를 갈았고 그 어느 누구도 자유시의 처절한 교훈을 잊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쏘련공산군과 함께 작전 중이던 이 범석 장군이 인솔한 광복군도 우수리강 상류지역에서 쏘련군의 부당한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했고 쏘련군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파렴치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생각지도 못했던'해방군'의 기습을 받은 광복군의 피해는 엄청났으며 이 범석 장군 자신도 꽁꽁 얼어 붙은 우수리 강변에서 이마를 찢고 지나가는 총탄세례를 받았다. 사선(死線)을 넘어서 배신자인 해방군을 가까스로 격파한 광복군은 이번에는 중화민국 수비대로부터 끝내 치욕적인 무장해제를 당하고야 말았다. 우여곡절끝에 민국군대와 함께 왜구격멸전을 벌리던 그는 왜구들의 강세에 밀려서 다시 쏘련 영내로 부득불 철수할수밖에 없었다. 그후 수개월간 그는 많은 광복군동지들 및 민국군 패잔병들과 함께 황량한 시베리아의 중심지인 톰스크의 수용소에서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공산집단이란 사기꾼·배신자·광복군의 철천지원수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한국 현대사의 최악의 비극인 좌·우의 격전은 이미 이때부터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베리아에서 생존하는 행운을 얻었던 광복군 용사들은, 동족인 광복군이 괴멸되어 가는 데도 오히려 배신자인 혁명정부를 두둔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유시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그들 몸에 남겨진 상처와 함께 영원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사건 이후로 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의 광복운동은 한동안 만주와 시베리아지방에서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고 자연히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민중 해방운동'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 북간도에서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싹트고 있던 새로운 형태의'식민지해방투쟁'이 미묘한 국제관계와 연관을 가지면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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