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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일차세계대전, 공산주의혁명 전야의 러시아

浮萍草 2015. 2. 3. 09:59
    1차 세계대전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2. 일차대전 편, 중세 이후로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다가 근세에 들어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항상 민족독립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세르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왕세자부부가 폐결핵환자인 두 명의 세르비아 청년들에 의하여 저격당해 암살당함으로써,그동안 불안하게 잠재해 왔던 여러 유럽국가간의 뿌리깊은 대립이 폭발하여 제일차 유럽대전이 벌어졌다. 유럽의 후진 자본주의국가인 독일은 그러한 사태발전을 식민지획득의 절호의 기회로 보고 오스트리아 및 투르크와 함께 동맹을 맺은 후 프랑스와 러시아를 공격 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밀리자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어서 미합중국도 병력과 물자를 조달하며 영국·프랑스와 합세했다. 신생국 이태리는 중립을 지켰으나 전쟁의 후반기에 가서는 영국으로부터 좋은 조건을 제시받고 연합군측에 가담했다. 이태리는 북아프리카에 진주할 수 있는 빌미를 얻게 된 것이었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와 영국에 의하여 전선이 고착상태에 들어가자 동쪽의 러시아로 주력부대를 깊숙이 진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러시아측도 강력히 대항하였으므로 동·서 양쪽에서 포위당한 꼴이 된 채로 끝없는 소모전을 전개해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쟁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독일로서는 언제까지나 소모전을 감당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국내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커져갔고, 독일정부는 극도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이 그러한 곤경을 해결해 줄 수도 있는 '이용가치가 큰 인물'임을 곧 파악했다. 서기 1917년 2월에 러시아에서 반란사태가 발생하자, 독일의 정략가들은 반정부적인 볼셰비키 지도자의 하나였던 레닌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독일 국내에서는 공산주의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으나 상대방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 주면 그것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간에 내분이 일어 날 것이며 따라서 러시아의 전력은 감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속셈이었다. 그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를 서부전선에서 물리친 후 다시 러시아를 공격해도 늦지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레닌은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후원을 약속받고 곧 비밀열차편으로 러시아에 잠입했다. 변호사 케렌스키를 필두로 하는 멘셰비키 혁명세력이 이미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레닌이 할 일은 혁명세력간에 주도권 다툼하는 것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후방에서의 레닌의 역할은 독일정략가들의 기대이상이었다. 볼셰비키들에 의하여 고무된 페트로그라드의 해군병사들이 노동자·병사 쏘비에트를 외치며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최전선에서도 마침내짜아르 타도'를 외치게 되었으므로 독일은 서부전선에 몰두할 수 있었다. 레닌의 그러한 반국가 행위는 매우 무모한 일이었으니 만일 독일이 서부전선을 집중공략하여 프랑스만이라도 함락시키게 되는 날이면 곧바로 독일의 주력을 동부 전선인 러시아로 휩쓸어 가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의 그런 위험한 도박을 성공으로 이끌어 준 것은 엉뚱하게도 미합중국의 참전이었다. 미합중국은 전 유럽지방의 모든 물자가 바닥이 나는 수년간의 소모전을 이용하여 국내의 모든 공장들이 총가동되어도 전쟁물자를 미처 다 공급하기 힘들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하고 있던 미합중국은 비밀리에 영국과 프랑스편을 들어 무수한 물자와 무기 등을 팔아먹고 있었는데,독일의 잠수함이 영국기선 루시타니아 호를 격침시켜서 그 배에 타고 있던 미국인 1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독일로서는 최대의 실수였다. 미합중국은 자기들이 상선과 여객선 등에 군수품을 적재함으로써 중립을 지키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는 국제여론을 잠재우고 독일이 '민간여객선'을 격침시켰다 는 사실만 크게 떠들어대면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해 버렸다. 이로써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들은 미합중국의 무진장한 물자와 병력을 계속 공급받게 된 데 반하여 독일제국은 모든 물자와 병력이 고갈되어가고 사회불안이 가중 되면서 반전분위기가 팽배하게 되어, 마침내 6년간에 걸친 일차대전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연합국측은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수천만명의 인명피해와 파괴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강요했으므로 독일은 완전히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년동안 굶고 모아도 갚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국제적 부채를 짊어지게 되어서,식민지 획득의 야망이나 ' 초인국가' 건설의 야망과 함께 '게르만민족의 영광'에 대한 모든 희망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일본은 일차대전 말기에 재빨리 연합국측에 가담함으로써 아시아에 남아 있던 유일한 독일의 세력권인 중화민국의 산동지방을 점거했는데, 일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그대로 눌러 앉아 버렸다. 일본제국주의의 야망을 눈치챈 중화민국의 대학생,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시위를 벌인 5·4운동은 이로 인하여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5·4운동은 같은 해에 먼저 일어난 조선의 3·1독립만세운동에 크나 큰 감명을 받아 일어난 운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압박민족들의 모든 항거를 총·포로 짓눌러 버리며 전 세계의 제국주의 야만국들은 새로운 식민지 분할을 둘러싸고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3. 공산주의혁명 전야의 러시아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사회에서 무산자들에 의한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던 것은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 서양에서 가장 뒤떨어진 후진 자본주의 사회 중 하나였던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자본주의적 구조로 파악할 때는 서양세계 자체가 식민지가 되었던 다른 사회보다는 분명히 전세계적으로 '가장 자본주의가 발전한 사회'였으니, 그러한 사회 중에서도 자본주의 모순이 가장 많았던 후진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의 예언과도 크게 다를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어차피 식민지사회는'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어느 구석에도 끼일 수조차 없었으니까). 러시아의 공산주의화는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었다. 러시아는 전통적인 농촌사회로서 '유럽의 시골'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통치자인 짜르의 위세는 나폴레옹의 침략군을 격퇴한 후에 더욱 당당해졌으므로, 짜르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충성심은 다른 어떤 유럽지방 국가들보다도 확고했다. 러시아는 서기 1830년대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공업화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주로 면공업을 중심으로 전개된 러시아의 산업혁명은 거대한 방적기업들을 탄생시켰으며 공장에서 쏟아낸 면제품들은 주로 주변 이슬람국가들(투르크·이라크·중앙 아시아 등)에 수출되었다. 발칸반도와 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크리미아전쟁(서1853-1856)에서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군에 패배한 러시아는 남부 유럽 지방으로의 진출을 잠시 미루고 더욱 동쪽으로 침략의 발길을 재촉했다. 사마르칸드(서1863 점령)·히바 보하라(서1873 점령)·서투르키스탄(서1881 점령) 등을 장악한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은 곧이어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영국과 대치 하였고 동아시아에서는 대청국과 패권을 겨루게 되었다. 크리미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자, 러시아 당국은 국내·외적인 위기에 대처하고자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러시아 당국은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로부터 노동력을 이끌어 내려고 농노해방령을 공포했고(서1861), 그에 따라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또한 취약한 자본을 확보하려고 주식에 대한 배당을 정부에서 보장해 주는 파행적인 방식을 채택했으므로, 많은 국민들이 주식투자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시베리아 지방을 경유하여 태평양연안에 이르는 침략정책을 원활히 수행하고자 터무니없이 대규모적인 철도사업이 그 관련산업들과 함께 크게 번창해갔다. 링컨이 미합중국에서 생색을 내며 흑인노예 해방을 선언하기 수년 전에 이미 농노해방령을 내린 알렉산드르 2세의 심정은, "아래로부터 타도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위로부터 해방하는 편이 낫다." 라는 스스로의 넋두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타도당하지 않으려던 그의 의지와는 달리 그는 단지 타도당할 시간을 반세기 가량 늦추는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농노해방령 자체도 그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단지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소작농을 양산해 낸 데 지나지 않았고 해방된 농노들은 여전히 인두세(주민세와 비슷함) 를 물어야 하는 불평등한 반농노적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서기 1880년대 후반에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된 후 다른 제국주의 강도국들과 보조를 맞추어 본격적인 제국주의로 변신한 러시아는 그러나 다른 강도국들과는 달리 수출시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데다가 국내시장마저 협소했으므로,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기하기 힘들었다. 농노해방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뜻있는 지식인들이 이처럼 불안정한 국내·외적 여건 하에서 토지의 공평한 재분배를 주장하는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로서 등장 했고,이들은 브나로드( ; '인민에게로')운동을 통하여 파탄에 직면한 농촌의 현실을 타개해 보려 노력했다. 그 중의 일부는 극렬혁명가 집단화하여 비교적 관용성이 풍부했던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서1881.3.1)했으나, 암살 후에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던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비밀조직은 정부의 전면적인 대탄압을 받아 궤멸되고 말았다. 그들 중 일부는 서유럽지방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망명자중의 한 요원인 플레하노프는 당시 서유럽지방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던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을 접하고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농민들에게 걸었던 혁명적 봉기의 기대를 노동자들에게 걸게 되었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통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해 가려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 탄생후 보여 주었던 모든 변형 및 전개과정이 헛된 몽상으로 끝나버렸듯이 플레하노프의 구상도 처음부터 정상적인 실현가능성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왕좌왕하는 혼돈에 빠진 러시아의 지성인들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람들은 '합법적 나로드니키'였다. 합법적 나로드니키의 대표격인 보론초프는 서기 1882년에 작성한 '러시아자본주의의 운명'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외국시장이 필요한데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내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농민이나 소생산자는 대자본가(대공업가)에 의하여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대중적인 구매력이 감소하고 국내시장은 더욱 축소되어 대공업 자체도 몰락할 수밖에 없다!" 라는 정확한 세계사적 인식에 바탕을 둔 탁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인민적 생산을 보호·육성해야 하며 그러한 민중적인 경제적 기반이 튼튼해지면 농민공동체를 발판으로 사회주의로의 궤도 수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매우 발전적인 탁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것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처음부터 한 번쯤은 고려해 봤어야 할 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세계의 역사는 이미 진정한 인류문명이 아닌 야만화의 길로 깊이 기울어져 버렸으므로 합법적 나로드니키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공상으로 여겨지고 말았다. 서기 1880년대 말기에 닥친 자본주의 세계의 대불황은 그렇지 않아도 야만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패전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러시아는 불황의 여파로 주요 수출품이던 농산물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농촌경제가 완전히 파탄지경에 빠졌고,그에 반하여 공업화 정책은 더욱 강화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러한 모순이 첨예화되어 가자 합법적 나로드니키들은 더욱 더 '자급자족경제'에 입각한 농촌사회주의를 주장했으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농촌경제의 몰락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오히려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기초를 필요로 한다는 그 괴상한 논리 때문이었다. '남이 강도질하면 자기도 강도질을 해야 한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생존논리에 대하여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법석을 떨면서 비판했으나,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무슨 방법으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제국주의화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신통한 해결책을 내어 놓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자본주의적 전개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합법적 나로드니키들의 주장이야말로 유럽세계의 진정한 구원을 위하 나아가서는 인류세계에서 더 이상의혼란을 막기 위하여, 그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양세계에는 이상주의자보다 욕심 사나운 동물들이 훨씬 더 많았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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