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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대한 광복투쟁의 단초

浮萍草 2015. 1. 22. 11:39
    16. 대한국의 여명(餘命)
    이그밀사 사건으로 곤경에 처한 광무황제는 이등박문과 부왜역적들로부터 퇴위압력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이등박문은 광무황제를 '음모꾼'으로 몰아 가면서 억지로라도 퇴위시키고자 했다. 그에 대한 세계열강들의 태도는 대체로 지지하는 쪽이었다. 황제는 일본에 망명을 가 있던 박영효에게 밀사를 보내어 귀국하도록 했고 그를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하여 난국을 타개해 보고자 했다. 이등박문은 부왜역적들을 전면에 내세워서 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국의 주권을 마저 거머쥐고자 날뛰었다. 황제는 그러한 퇴위압력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전쟁위협까지 들먹이는 이등박문과 부왜무리들에게 밀려서 결국은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등박문 등은 저들 멋대로 양위가 아닌 퇴위로 확정해 버림으로써 광무황제를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쫓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억지 퇴위의 과정이 알려지자 유림선비들과 시민들은 궁궐 앞에서 반대농성을 벌였고 시위대와 합세한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던 일제의 무장경찰대와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군중은 매국노 이완용의 집을 방화했고 이완용 및 다른 매국노들은 모두 일제병력이 지키는 관저에 숨어 버렸다. 그러자 일제와 매국도당들은 황제의 옥새를 몰래 찍은 거짓 조칙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시위대와 군중을 탄압했다. 전국 각지는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일제의 병력이 삼엄하게 깔렸고 일제의 헌병대도 증강되어 대한국은 완전히 일제에 의한 비상계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또한 그에 대항하여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융희황제는 광무황제가 가능한 한 빨리 다시 황제로 복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정식 즉위를 하지 않고 4개월간이나 버텼으나 결국 새로운 황제 지위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와 이등은 대한국 황족들을 모두 격리시키고 엄중한 감시 하에 두었다. 이등박문은 곧이어서 이완용 내각을 상대로 대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제3차 한일협약을 강행했다. 강폭한 국제사기꾼들이 늑대의 논리로 저들의 야욕을 관철하는 데는 어떠한 이론과 절차도 사실상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이즈볼스키(Izvolsky-본야(本野:모또노) 비밀협약'을 맺은 후, 대한국 병탄의 마지막 수순을 밟아 갔다. 마지막으로 일제는 대한국 병탄의 마무리 작업으로 대한국 군대를 해산하고자 했다. 이 때도 이등은 매국노 이완용을 시켜 미리 융희황제의 이름으로 위조한 칙어를 공식발표했으나 그 발표를 믿는 대한국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처럼 완전한 위조 공문서가 발표되자 모든 대한국인들의 분노가 끓어올랐고 특히 국권수호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자긍심을 지니고 있던 애국심 강한 군인들과 의병들은 그 즉시 치열한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시위대 대대장 박 승환은 대한국의 운명이 군인들의 애국충정에 달렸음을 경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총으로 자결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국운을 건 건곤일척의 끝없는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광무황제는 엄중한 감시하의 유폐상황에서도 밀사들을 파견하여 의병들의 궐기를 독려했다. 이 강년·이 인영·허 위 등의 선비들은 물론 신 돌석 같은 평민의병장들도 합세하는 등 항일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한국에 대한 통치야욕이 난관에 처하게 되자 일제는 마침내 그 잔악한 본성을 드러내어 가히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온갖 만행을 대대적으로 자행했다. 다음의 고발은 당시 참혹한 의병탄압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강원도에서는 의병을 생포하여 열탕에 삶아 죽이고 의병장의 부인을 잡아서 음문에 숯불을 넣어 태워 죽이고,또 도시의 개를 박멸하고 마을의 닭을 잡아 13도 강산에 개와 닭의 소리가 끊기었다." 소위 동양의 최선진국임을 자랑하던 왜구들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악랄한 악마적 수법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조선을 저들 왜구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탐욕에 의하여 완전히 미쳐 버린 것이었다. 그러한 만행 속에서도 전국적 의병항쟁은 3년 이상을 끌어갔으나 일제의 학살과 방화 등으로 인하여 민중세력이 급속히 피폐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는 결국 한계에 부딪쳐서 항일무장투쟁가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국내에서의 의병전쟁 개시와 함께 일찍이 간도관리사였던 이 범윤은 연해주의 교포들과 힘을 모아 신식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두만강을 넘나 들며 일제와 그 주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도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포츠머스 조약으로 만주의 이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국내의 항일투쟁이 예상외로 끈질기게 전개되어 가자 합병할 명분을 얻지 못해 초조해진 일제는 마침내 4242년(1909) 9월1일부터 2개월여에 걸쳐서 의병활동이 극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대한국의 남반부에 대한 전면적인 대침공을 감행했고 이어서 4243년(서1910) 9월말부터 40여일간 황해도에서도 같은 침공을 감행했다. 마치 그물을 치듯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닥치는 대로 양민학살과 촌락방화를 자행하면서 의병들이 발붙일 곳이 없게 샅샅이 수색하며 감행한 일제의 총공격에 의하여 의병들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방이후까지도 수년간이나 의병의 독립투쟁은 끈질기게 이어져, 삼일운동 때까지도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이어져 갔다. 4247년(서1914)에는 임 병찬을 위시한 54명의 의병출신자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여 이미 작고한 의병장들의 유족들 및 생존하고 있던 의병장들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전국적 규모의'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하여 다시끔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에 나서려 하였으나 매국적인 밀정들에 의하여 사전에 탐지되어 검거당하는 비운에 처하였고 임 병찬은 거문도에 유배되어 4249년(서1916) 5월에 유배지에서 한많은 의병장으로서의 일생을 마치기도 했다. 대한국을 병탄하려고 온갖 만행을 일삼던 이등은 4242년(서1909) 10월에 만주를 시찰 중 대한국독립군 참모중장인 안 중근의사에 의하여 총살당했다. 일제에 의하여 불법적 재판을 받게 된 안의사는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 나와서도'동양평화론'을 주장하는 등 떳떳하게 일제의 횡포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다. 안 중근 의사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여순감옥에서도 왜구들의 죄악을 성토하는 글들을 많이 썼는데 그의 문명관은 참다운 인류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하늘이 백성을 내셨으니 온 세상 모두가 형제이다. 각각 자유를 지키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문명이란 동·서양의 똑똑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각자 천부의 본성을 지키며 도덕을 숭상하고 경쟁심을 없애며 편안한 땅에서 직업을 즐기며, 태평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이렇지 못하다. 상등사회의 고등 인물들은 논하는 게 경쟁이요 탐구하는 게 살인기계이므로 동·서양 육대주가 포탄의 연기와 빗발치는 탄환으로 어느 날이고 평안한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치 않겠는가!" 그처럼 진정한 문명사회를 염원한 안의사를 일제는 일제대로 적당히 회유해서 저들의 대외적인 선전전략에 이용하려고 했으나 회유에 실패하자 일제는 불법적인 재판을 통하여 안의사를 교수형에 처해 버렸다. 일제는 4243년(서1910) 2월에 외무대신 소촌을 통하여 각국에 가 있는 일제의 공관에 이미 4242년(서1909) 7월에 만들어 놓았던'한국병합방침 및 시설대강'을 일제히 발송했고,각 공관들은 그에 따라서 병합을 정당화하려고 각국에 대한 외교적 접촉을 활발하게 전개한 결과 4243년(서1910) 4월 11일에는 노일양국간에 새로운 노일협약의 추진과 더불어 일제의 대한국합병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러시아이외에 영국측에서도 일제의 대한국병합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4243년(서1910) 5월 19일부터 8월 14일까지 주로 한반도에 있어서의 영국의 기존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교섭을 일제와 계속 벌였다. 일제는 대한국병합을 대한국인들의 청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려 했는데,그러한 음모는 이용구·송병준·내전(內田:우찌다) 등의 협의하에 진행되었다. 즉, 송병준과 내전이 소위 '합방건의서'를 쓰고 일진회의 고문 무전(武田:다께다)이 그것을 완전한 한문체로 개작,수정하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용구 등은 이완용이 습격당한 다음 날인 12월 3일에 소위 '한일합병에 관한 상주문'을 융희황제에게 올리는 한편,청원서를 만들어서 통감 증미(曾彌:소야)와 박제순에게 제출하고 성명서를 만들어 신문지상에 공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대한국의 각 사회단체들이 궐기했으나 일제는 대한국 병탄야욕을 굳히고 매파로 이름난 육군대장 사내(寺內:데라우찌)를 통감으로 임명했다. 그는 대한국에 부임후 곧 경찰권 등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대한국의 통치권까지 송두리째 빼앗는 작업에 착수했고 왜헌병을 대폭 증가시켜서 무단통치의 막을 열면서 대한국 합병의 최후 수순을 밟았다. 그리하여 서울시내에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서 벌여 놓은 어전회의에서 제 멋대로 합방늑약을 공포했다. 그리고 매국노 윤덕영은 끝까지 옥새를 감추고 있던 황비의 치맛폭을 들추어서 옥새를 빼앗아 합병문서에 날인하게 함으로써 만고의 역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처럼 국제적 도의나 국제법상의 정당성 같은 것은 애초부터 찾을 길이 없던 합방늑약이 일제의 삼엄한 경비상태 하에서 어거지로 발표되어 버리자,일부 친일파 매국노들을 제외한 전 대한국인은 분노와 통한에 이를 갈았고 매천 황 현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하여 일제의 폭거에 죽음으로 항변 했다. 심지어는 일제가 친일파로 이용해 먹으려고 작위를 수여한 사람들 중에서도 여러 명이 순국자결하였던 것이니 일반 민중과 애국자들의 절통한 심정은 두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탈당한 조국과 민족을 되찾기 위해서 대한국의 애국자들은 더욱 국권회복투쟁의 의지를 굳건히 다졌으나 일제의 철권통치하에 들어 간 한반도에서는 본격적인 무력항쟁이 점점 곤란해져 갔으므로 뜻있는 애국자들은 할 수 없이 해외에라도 광복투쟁기지를 건설하여 조국을 밖으로부터 해방시켜 들어 올 수밖에 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7. 대한광복투쟁의 선구자들
    일제는 강제적 합방 후에 대한국인들을 무단적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데라우찌는 명석(明石 : 아카이시)을 경무총감에 임명하여 애국지사들을 탄압하기 위한 모든 악랄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에 따라서 모든 항일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조국을 팔아 먹는 밀정들과 부왜매국노들의 날카로운 감시망도 더욱 심해져 갔다. 간도지방을 넘나들며 비밀리에 독립운동 조직을 다지고 있던 안 명근은 데라우찌가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천역 부근에서 사내를 처단하기로 하고 극비리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뜻밖의 밀고로 안 명근은 물론 관서지방의 저명한 애국지사들과 그가 관계하고 있던 신민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총검거되고 말았다. 4244년(서1911) 1월 1일을 기하여 경무총감부에서 전국의 왜경을 총동원하여 일제 검거한 애국지사들은 거의 모든 저명한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검거된 애국지사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했던 악랄한 고문이 가해졌다. 한 필호 지사와 김 근형 지사는 결국 살인적인 고문을 당해내지 못하고 순국했으며 600여명의 총검거자중에서 105명은 기소되었다. 한 번 악형에 시달렸던 애국지사들은 출감후에도 대부분이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얼마 못 가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한 일제의 악랄한 고문정치(拷問政治)가 의도하는 바는 명백했으니 즉 일제의 무단통치에 반항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모조리 때려 죽여버리거나 회복불능한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거의 불가능함을 알게 된 애국지사들은 항일투쟁을 계속하고자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떠나갔다. 특히 명문거족이던 이 회영 일가는 전 가산을 바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회영은 4243년(서1910) 4월에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에 민단(民團)적 성격을 띈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부속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망명해 온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켰다. 망명자들은 부민단(扶民團), 한족회 등을 결성하며 세력을 키워 갔다. 대한국 본토이외(해외)에서 가장 실질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했던 곳은 해삼위의 서북쪽에 있던 신한촌(新韓村)이었다. 신한촌에는 을사늑약과 국치를 전후해서 의병들 및 국내외의 저명한 애국지사들이 집결해서 '독립전쟁론'의 구현을 위한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해주에서는 유 인석·이 범윤·홍 범도·이 범석·엄 인석·안 중근 등의 의병장들과 의병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장 지연·정 순만 등 항일언론인들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 하던 민족운동가들도 활발한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했다. 그 중에서 일찌기 헤이그 밀사로 활동한 후 구미 각국을 순방하다가 미국에서 국민회를 발족시킨 후 연해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임무를 띄고 신한촌에 파견 되어 온 이 상설은 본격적인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는 데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특히 이 범윤은 광무황제로부터 광복운동을 총지휘하라는 밀명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 상설,·유 인석·이 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4243년(서1910) 5월에 '13도 의군'이 결성되었다. 13도 의군은 도총재의 명의로 국내에'13도 대소(大小)동포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보내고 의병규칙도 만들었으며 4243년(서1910) 7월 28일에는 연금상태에 있던 광무황제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망명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제의 물샐틈없는 감시망이 집중되고 있는 광무황제가 망명할 수 있는 가망성은 거의 없었으나 광복운동의 사령탑인 13도 의군의 지도자들은 광무황제의 복위와 국권의 회복을 함께 이루고자 힘차게 광복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4247년(서1914)에는 해외광복운동의 총사령탑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했다. 열강의 무관심 및 일본과의 분쟁을 우려한 러시아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대한광복군정부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만주와 노령의 모든 광복운동가들을 일치단결시킬 중요한 조직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일차대전 이후 광복운동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국주의적 실리에 밝은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을 맺음으로써 광복운동은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자국 내에서의 모든 정치활동 등을 금지해 버리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처럼 결성된 광복군도 전혀 표면적으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 이다.
    Greatc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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