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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광무황제의 밀사들

浮萍草 2015. 1. 15. 10:10
    헤이그 밀사 3인,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14. 광무황제와 밀사 국의 협조를 간절히 기대하던 광무황제는 늑약이 기어코 강제되자 즉각 그것이 무효임을 세계각국에 밝히기 위해서 11월 26일에 측근의 미국인 헐버트에게 무효를 선언하는 긴급전문을 발송시켰다. 헐버트는 그 전문을 12월 11일에 국무성차관에게 전달했지만 이미 '국제정의를 포기한' 미국 측에서는 이것마저 묵살해버렸다. 황제는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한 이외에 주불공사 민 영찬에게도 '미국으로 급히 건너가서 외교교섭을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밀 훈령을 내린 바 있었다. 황명을 받들고 그 즉시 미국으로 건너 간 민공사는 12월 7일에 자신에게는 '특명전권'자격이 없음을 솔직히 통고하면서'황제의 뜻을 전달하고자' 미국무장관과의 회담을 신청했다. 그에 대하여 루트는 주미대한공사관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지 3일 만인 12월 19일자로 답신을 보내어 '어떠한 협조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통보하였으며, 친절하게도 같은 통보를 일본공사에게도 따로 보내었다. 이리하여 헐버트와 민 영찬을 통하여 전개되었던 대미교섭은 미국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며 그래도'정의로운 미국'이기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광무황제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황제는 곧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에게도 밀지를 전달하여 새로운 외교교섭을 시도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밀지는 미국회사(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의 서울지점 소속 변호사인 엘리오트에게 전달되었다. 밀지를 받은 엘리오트는 11월 30일에 서울을 떠나서 상해로 가서 거기에 체류하고 있던 사주(社主)인 콜브란에게 밀지를 하명받은 사실을 보고했다. 밀명을 받은 엘리오트와 콜브란은 곧 일본 고베로 건너가서'미국인'에게 문서들을 모두 전달하였으며 문서를 전달받은'미국인'은 다음 해 1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보스트윅에게 그 문서들을 직접 전달했다. 그리하여 보스트윅으로부터 서한을 전달받은 알렌은 황제의 밀지대로 곧 유능한 국제법 변호사를 물색했으나, 어떤 미국변호사도 루즈벨트의 외교정책과 정면 충돌 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4개월동안 밀명을 추진하던 알렌은 마침내 4239년(서1906) 2월 19일자로 황제에게'밀명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리고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광무황제가 미국인들을 믿고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비밀 외교교섭도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미국정부로부터 배신당한 황제는 곧 다른 방법을 모색했는데 을사늑약 당시 런던트리뷴지의 기자로 북경에 와 있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가 황제와 선이 닿게 되었다. 그는 대한국에 오기 전에 상해에서 광무황제의 밀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들을 통해서 대한국의 황궁과 직접 교신까지 할 수 있었다. 황제를 알현한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국권회복을 위해서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며 고뇌하는 광무황제의 애국심에 크게 감동하여 황제와 대한국을 돕고자 했다. 밀서를 받은 그는 미행하고 있던 일제의 밀정으로부터 총격을 받으면서 제물포항으로 도주하여 노르웨이의 기선으로 산동반도에 도착한 후 영국총영사에게 국서를 전달했고, 총영사는 그 국서를 북경주재 영국공사에게 전송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과 동맹을 맺기까지 한 영국정부측은 냉담하기만 했다. 광무황제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세계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서양열강과 왜구의 무관심과 방해공작 또한 집요하기만 했다. 15. 헤이그의 밀사들
    밀사들을 통한 국권회복 노력을 추진하던 광무황제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 것은 헤이그에서 개최될 예정인 만국평화회의였다. 황제는 전 참판 이 상설,평리원 검사 이 준, 러시아공사 이 범진의 아들 이 위종을 적임자로 판단하고 비밀리에 그들을 헤이그로 파견했다. 이 상설은 북간도로 망명가 있었고, 이 위종은 러시아 수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밀명을 직접 받은 이 준 또한 곧 비밀리에 러시아로 향했다. 용정에서 만난 이 상설과 이 준은 지체없이 페테르부르크로 갔는데 그 곳에서 이 위종과 합류한 그들은 이 범진과 함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났다. 광무황제의 친서를 본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가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고, 며칠 후에는 러시아황제의 친서를 전달받은 밀사들은 헤이그로 떠났다. 헤이그에서 밀사들은 을사조약이 협박과 강제에 의한 엉터리조약이며 황제와 국민 모두 그에 불응하고 있음을 알리고 다녔다. 또한 그들과는 다른 경로로 시베리아를 거쳐서 헤이그에 온 헐버트도 밀사들과 합류하여 국제협회와 국제신문을 통해서 대한국의 실정과 밀사들의 문제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45개국 247명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고 밀사들의 참석이 알려지자,일제는 크게 경악하여 밀사들의 임무를 방해 하려고 온갖 모략적인 방법을 총동원했다. 회의에 참석한 일제는 밀사들의 참석이 위법이라고 항의문을 제출했고 이등은 부왜(附倭)매국노들과 함께 '전쟁가능성'을 들먹이면서 광무황제에게 협박을 가했다. 황제가 끝까지 저들의 요구에 불응하자 저들은 제멋대로 '대한국 황제는 특파위원을 밀파한 사실이 없다. 그리고 서기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한일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이다'라는 내용의 엉터리 칙명을 전보로 보냈는데 회의장에서는 그 전보를 사실로 인정하고 밀사들을 인정하지 않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잠시 발언권을 요구한 이 준은 단상에 올라서 일제의 횡포에 대하여 낱낱이 폭로하고 세계각국이 대한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한 후 그 자리에서 비수를 꺼내어 자결하고 말았다. 남은 두 밀사 또한 이 준 열사의 위령제를 마친 후 다시 헤이그의 국제협회를 찾아가서 각국 대표들을 다시 만나며 대한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제국주의적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던 열강정부의 눈먼 외교정책에 의하여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밀사는 만국평화회의에 기대하는 것보다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각국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양심적인 지지를 호소하는 외교전략을 펴기로 했다. 이 상설과 이 위종은 영국방문을 시초로 구미각국에 대한 순방외교에 나섰고 곧 이어서 뉴욕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착 즉시 루즈벨트대통령을 만나고자 워싱턴으로 향하여 비공식적인 면담만을 가졌다. 그러나 돌아 온 것은 다만 애매모호하고도 지극히 외교적인 답변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서 프랑스·독일·이태리·러시아 등을 방문하면서 지도급 정치가들과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약 1년여간 머물며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서 교포들을 결속시키는 등 잠시도 쉴 사이 없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이 상설은 미국에서 해외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통합하는 총사령탑으로서의 국민회(國民會) 결성에 큰 몫을 담당한 후 그 자신은 극동에서의 독립운동사업 추진 임무를 띄고 국민회 총회장인 정 재관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 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 상설은 노령에 망명하고 있던 민족운동자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Greatc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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