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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노일전쟁의 파란

浮萍草 2015. 1. 3. 11:40
    일본 군함이 유럽 다국적 국기를 달고 있는 걸 봐서
    연합군으로 참전한 전쟁으로 판단해도 됮 않을까?
    © 편집부
    11. 노일전쟁 일전쟁은 일본군이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무모한 육탄공격전을 벌인 일본군은 7,8개월간 총병력 13만 4천여 명 중 과반수에 달하는 6만여 명 사상자를 내는 악전고투끝에 서기 1905년 1월 1일에 마침내 여순을 함락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군의 군수보급이 제대로 안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다. 러시아의 작전은 보급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일본군을 하얼빈까지 유인하여 북만주의 엄동설한 하에서 본격 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함으로써 몰살시키려는 러시아특유의 '동장군'작전이었다. 초기 전투에서 국력이 이미 고갈된 일제로서는 속전속결을 치루어야만 했으나 러시아군은 바로 그러한 일제의 약점을 간파하고 겨울을 이용한 장기전략을 구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만주에서의 패배소식에 격노한 니콜라이 2세가 일본군을 즉시 격퇴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러시아 군은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쟁의 양상은 끝날 기약없는 소모전으로 접어들었다. 북만주지방 공략에 사활을 건 일본군의 저돌적인 공격에 직면한 러시아군은 원래의 복안대로 북만주로의 유인작전을 다시 진행하고자 작전상 총퇴각을 실시했다. 전황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러시아는 세계 제2위의 막강한 해군력을 투입하기로 하고 우선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함대로 일본군의 해상보급선을 끊으려 하였으나 일본해군에 의하여 주력함이 파괴 당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러시아는 서기 1904년 4월 30일에 러시아의 최우수 정예함대인 발틱함대를 극동에 파견하기로 하여 10월 15일에는 북해를 떠나 지구를 반바퀴 도는 긴 여로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바있는 영국은 그 긴 항로에 널려진 영국관할의 항구들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함은 물론 다른 나라(프랑스·청국)들에게도 압력을 넣어서 발틱함대에 대한 보급이나 정비 등에 지대한 장애를 일으키게 하는 등 철저히 방해함으로써 러시아사병들이 극도로 피로에 시달리는 등 발틱함대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서기 1905년 5월 26일에야 간신히 극동에 도달한 발틱함대는 수개월간 현지에서 맹렬한 해상연습을 실시하여 온 동향(東鄕:도오고 헤이하찌로)의 기민한 전술에 걸려들어서 대패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은 일단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에 한계를 느꼈고 러시아측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봉기로 내정에 혼란이 오는등 후방이 불안해져서 전쟁에 전력투구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으므로 둘 다 전쟁의 종료를 바라게 되었다.
    명치일본은 서기1904년 5월에 이미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강화교섭을 알선해주기를 간청했다. 이에 사태를 관망하던 루즈벨트가 양국간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루즈벨트는 두 나라에 대한 화의(和議)권고를 공표하였고 서기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려서 일단 양국간 전쟁은 종결을 보게 되었다. 12. 대한국의 밀사외교와 열강의 협잡
    광무황제는 노일전쟁의 와중에서 심각한 국권침탈을 전제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요받고 대한국의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완전히 유린될 것을 우려하여 같은 해 10월 중에 당시 동경에 머물고 있던 조 민희 공사에게 미국정부의 우호적 문제해결을 바라는 밀서를 미국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이에 심히 불안감을 느낀 광무황제는 마침내 미국인들과의 친분이 두텁고 영어에 능숙한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하여 미국측이 양국간의 수호조약에 의하여 공정하게 처신해 주기를 의뢰하도록 했다. 노일전쟁이후 일제의 내정간섭이 노골화된 가운데 광무황제 주변에 남아 있던 몇 명 안되는 충신들 중 최고위급 관료였던 한 규설과 민 영환이 그를 적임자로 추천한 것이었다. 밀명을 받은 이 승만은 유학여권과 워싱턴주재 대한국공사관에 보내는 편지를 트렁크 밑에 감추고 서울을 출발하여 중간기착지인 호놀룰루를 거쳐서 미국인 레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혼자 워싱턴으로 가서 외교적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대한국공사관을 찾아가서 공사관자문역인 김윤정(나중에 일제 밀정으로 판명됨)과 대화를 나눈 후,곧이어 상원의원이자 대한국주재 미국공사를 역임한 딘스모어를 방문하여 민 영환과 한 규설로부터 받은 밀서를 전달하고 협조를 구했으나 그로부터는 헤이국무장관과의 인터뷰를 주선해주기로 한 외에 별다른 협조를 얻어낼 수 없었다. 이 승만은 워싱턴포스트지를 찾아가서 일제의 대한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글을 투고했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얼마 후에 그는 딘스모어와 함께 국무장관 헤이를 방문하여 한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했으나 거기에서도 별다른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4238년(서1905) 6월이 되자 1개월 내에 포츠머스에서 노일평화조약이 체결되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는 가운데 미육군장관 태프트는 루즈벨트의 딸인 앨리스 및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동양여행을 떠났다. 태프트의 목적은 일본과 비밀협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는데 하와이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군중집회를 연 대한국인들은 교포 8,000명의 이름으로 대한국의 독립을 위한 거중조정을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윤 병구와 이 승만을 루즈벨트에게 특사로 보내기로 했다. 이 승만과 윤 병구는 곧 워싱턴으로 떠났으나 태프트는 그 길로 동경으로 가서 7월 29일에 저 영원히 저주받을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끈질긴 노력끝에 4238년(서1905) 7월 6일에 루즈벨트를 만나서 청원문을 전달하였으나 이미 미국의 정책이 확고히 정해진 상태에서 아무런 진전도 바랄 수는 없었다. 이 승만에게 루즈벨트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준 태프트는 그 길로 일본에 건너가서 7월 29일에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국에 대한 지배권 을 서로 제멋대로 승인한다는 내용의 소위'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다. 거기에다가 대한국을 통째로 집어 삼키려는 일제의 야욕은 포츠머스 회담중인 8월 12일에 체결된 '제2차 영일동맹' 이후에 본격적으로 그 실행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야 말았으니 제1차 영일동맹때 기약했던 '대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유지할 것'이라는 초보적인 국제도의조차 말끔히 내동댕이쳐 버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2대 강국인 미국과 영국의 묵인 하에 일제는 안하무인격으로 대한국에 대한 지배정책을 벌여 갔다. 광무황제 또한 황제 나름대로 러시아가 일제를 견제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친서를 상해에 주둔한 러시아군지휘관 데시노를 통하여 러시아황제에게 전달토록 했다. 그 때만 해도 러시아가 북만주에서 설욕전을 벌이기만 하면 국력이 취약한 일제가 패망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서를 접수한 러시아황제는 파블로프 공사에 훈령을 보내어 답신을 보내도록 하는 등 대단히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일제와 밀통한 음흉한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의 노골적인 노일전쟁개입과 미국의 강화회담 추진으로 간악한 일제로서는 막강한 후원군을 얻은 셈이 된 반면에, 대한국의 입지는 더욱 곤경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13. 연발되는 국제사기극
    대한국 병탄의 첫 순서로 한일의정서를 강요한 일제는 곧 이어 심각한 국권침탈의 소지가 농후한 소위 한일협약을 강제하면서 대한국의 재정적 기반을 장악하려 했다. 그리고 '재정고문'의 명목으로 억지 임명한 목하(目賀:메가다)는 엉터리 화폐개혁과 제멋대로의 경제정책으로 대한국의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한 조치에 반대한 재무담당자 이 용익은 일본땅으로 당분간 강제연행 당했고 귀국 후에도 일제의 첩자들에 의하여 완전히 감시당하게 되었다. 일제의 모략에 의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떠났던 이 용익은 광무황제로부터 육군부장의 직책과 밀명을 받은 후 비밀리에 프랑스를 향하여 출국하였으나,승선했던 배가 풍파를 만나서 산동성 연대항에 임시 정박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일제관헌에게 적발되어 체포당하기도 했다. 또다시 일제의 모략에 의해서 공직을 박탈당한 채 풀려난 이 용익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고 그 후 프랑스와 러시아등 비교적 대한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조국의 현실을 알리고 일제를 규탄하는 데 마지막 정열을 기울였다. 일제는 한일의정서 조인과 동시에 대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로 작정하고 러시아주재 공사관 폐쇄를 강요했다. 그에 따라서 러시아와의 모든 조약은 폐기되었고, 대한국에서의 러시아 이권은 모두 일제에 넘어갔다. 일제의 음모를 잘 알고 있던 러시아주재 공사 이 범진은 철수하지 않고 버티면서 일제의 횡포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광무황제도 4237년(서1904) 9월에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친서를 비밀리에 워싱턴주재 한국공사관 고문 니드햄을 통해 미국무장관 헤이에게 보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러시아주재 공사관에 이어서 영국주재공사관, 미국주재공사관이, 주일공사관등이 차례로 폐쇄되었는데 영국주재공사 이 한응은 일제에 의한 공사관 폐쇄와 외교권 박탈음모에 항의하여 자결했으나 열강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다. 국제 열강의 지지를 얻은 일제는 대한국에 대한'보호권'을 확립하고 행사하기로 결정했고 이등박문이 그 집행자로서의 악역을 맡기로 했다. 이등박문은 광무황제에게 외교권 이양을 강요하는 등 위세를 부렸으나,황제는 이등에게 일제의 횡포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등의 안하무인격 태도를 목격한 이완용 등 기회주의자들은 재빨리 친일파로 변신해 갔다. 그리고 11월 17일에 이등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임권조(하야시겐조)·장곡천(하세가와) 등과 함께 다시 대궐에 나타나서'보호조약'을 강제하려 했다. 그러나 황제의 태도가 예상외로 강경하자 이등은 친일매국노 간신들을 동원해서 어전회의를 억지로라도 개최할 것을 강요했고 마침내 대신들에게 노골적인 협박을 가하여 어거지로 조약을 체결시켰다. 그 어전회의의 실무담당자로서 회의참석차 가던 이 상설은 왜병들에게 저지당하여 정작 회의에는 참석도 못했고 민 영환은 매국적 담판이 될 것이 뻔한 회의이기에 아예 참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참정대신 한 규설과 탁지부대신 민 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 단호하게 거절하였으나,이등에게 기가 질린 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박제순은 매국노의 대명사인 오적(五賊)이 되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늑약이 알려지자 황성신문의 주필이던 장 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제와 오적을 규탄하였으며,서울을 위시한 전국은 바야흐로 분노에 찬 대한국인들의 함성으로 덮여갔다. 이완용의 집은 성난 군중에 의하여 불타버렸고, 군중은 오적을 잡아 죽이려고 몰려 다녔으며, 이에 놀란 오적은 일제헌병대에 '보호'를 요청하는 등 구차한 목숨을 지탱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문무백관과 유림들은 조약파기를 위한 연명상소를 올렸는데,상소대표자인 조 병세는 곧 울분에 북받쳐서 자결하였고,다음 대표자로 뽑힌 민 영환은 이 상설과 함께 매일같이 상소를 올리다시피 하였으나 일제와 친일매국노들의 농간에 의하여 상소가 효과가 없게 되자 스스로 목을 찔러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 상설 또한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쳐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성공못하고, 유혈이 낭자한 채로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 황제는 민 영환에게 곧 충정공(忠正公) 시호를 내려 그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여 뜻있는 대신들과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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