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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大韓帝國 과 光武改革

浮萍草 2014. 12. 31. 10:10
    조선 멸망전후의 한반도 인구유입 상황을 그린 서양 풍자화. 이주민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한반도 토착민이 놀라 도망가고 있다. © 편집부
    9. 광무개혁과 대한국헌장 무황제가 대한국을'자주독립제국'으로 선포한 뜻은 단순히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려는 게 아니라, 열강의 세력균형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진정코 자주적인 개혁을 이루어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광무황제가 전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서 실시코자 한 개혁은 친일파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바와 같은 급진적 개화노선이 아니라 온건·점진적 개화노선을 선호한 광무황제 및 그 측근관료들과 민중의 뜻에 부합하는 자발적 개혁운동이었다. 따라서 광무개혁은 우선 일제에 의하여 비자주적으로 강요되었던 갑오-을미 개혁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광무개혁은 식민지화의 위기속에서 유생들의 지지에 크게 힘입은 황제가 황제중심적 체제를 이룩하여,황제가 염원해 오던 근대화 사업을 소수의 친위관료들로 이루어진 궁내부를 중심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관료,지주,특권적 상인들은 물론 보부상도 황제의 뜻에 적극 호응하여 보다 자주적인 자본주의화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광무개혁은 정치·외교·경제·사회·공익시설(통신·교통·전기 등)을 위시한 나라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이었다. 부국강병의 큰 포부와 함께 광범위하게 추진된 광무개혁은 총체적으로 볼 때 세계대세에 맞추어 상업입국론을 실천함은 물론,개화당측에서 강행했던 시책들의 문젯 점으로 지적되었던'자주성의 결여'를 탈피하여 자주자립 노선을 강화한 것이었다. 대개혁은 일부의 반정부 분자들과 부왜인맥을 제외하고는 가히 범민족적인 전폭적 지지 속에 진행되어 갔으나,개혁에 필요한 재정의 확보에 곤란을 겪는 등 몇가지 약점을 처음부터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시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자주적 개혁만은 최단시일 내에 이룩해가야만 했고,광무황제를 위시한 전 국민들은 여러가지 시행착오와 현실적인 악조 건들을 극복해가면서 기필코 자주독립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과 의욕에 차 있었다. 광무황제는 웅대한 부국강병의 청사진으로서의 개혁방안을 마련한 데 이어서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했다. 그 시책의 일환으로 국가재정을 관장하는 탁지부와는 별개의 재정관리 기구인 내장원(內藏院)을 설립해서 황실재정을 관리하도록 하고 그 총책임자인 내장원경 (內藏院卿)에는 경제문제에 밝은 충직한 이 용익을 임명해서 모든 업무를 총괄토록 했다. 황실 주도의 자주적 광무개혁이 정열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대한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자주독립의지를 밝히는 아홉 개 조문으로 된 대한국헌장도 반포했다. 그에 따라서 대한국인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절감하고 백척간두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자 황제를 위시하여 모두가 합심해서 크게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광무황제는 그처럼 열강의 강폭한 경제적 침탈에 대하여 강력히 대응하며 한시바삐 자주독립제국의 건설을 서둘렀으나 서기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를 둘러 싼 열강간의 협잡과 함께 대한국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서둘러간 왜족들의 방해공작은 점점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황제를 구심점으로 대한국이 부국강병책을 추진해 가는 것을 우려한 명치정부는 더이상 대한국이 발전해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입만 벙긋하면 한국의 독립을 내세웠지만 이미 한반도 점령을 목적으로 모든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던 왜족으로서는 결코 대한국의 자주독립을 좌시할 수 없었고,따라서 대한국을 강점할 기회를 만들고자 온갖 국제적 협잡을 진행해 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와 대한국인들의 피눈물나는 부국강병 달성노력은 계속 이루어졌다.
    10. 대한국에 불어 온 광풍
    태극기 © 편집부
    광무황제를 중심으로 대한국인들이 정력적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동안에도 대한국과 동아시아를 둘러 싼 열강의 힘겨루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에 의하여 대한국에서 가장 유리한 외교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정부내의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의견차이로 인한 동아시아 정책에 있어서의 난맥상으로 인하여 그 좋은 기회를 계속 유지하는데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신흥강국인 명치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여, 대한국보다는 만주에서의 패권확립에 주력하는 데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대한국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들이 경주되었다. 서1896년 5월 14일의 '서울의정서'에서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우월한 위상이 반영되었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된 6월 3일에 청국과 러시아간에 맺어진 '노청 비밀동맹'에서는 조선의 영토적 통합을 보장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와 같은 무렵인 6월 9일에 다시 러시아와 일본사이에 이루어진 소위 '모스크바 의정서'에서는 일본측이 3 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누어 각자의 세력권으로 하자는 안건을 제출한 데 대해서 러시아가 거절했다.
    대한국에서 대관식 축하사절로 참석한 궁내부특진관 민 영환은 로바노프에게 재정과 군사 방면의 원조를 요청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대한국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있던 프랑스의 씨에드 피브스 리유(Ciede Fives Lilles) 상사(商社)는, 비밀리에 조선에 대한 차관제공을 제의하며 '홍콩 및 상해은행' 회사가 서울에 지점을 설립하려 했는데 이에 놀란 러시아측은 노청은행(Russo-Chinese Bank) 간부인 포코티로프를 서울에 보내어 차관교섭을 맡도록 하기도 했으나 실행이 지연되었다. 광무황제는 러시아로부터의 차관교섭이 지연되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던 중 경운궁으로 환궁했는데 광무황제와 러시아측과의 미묘한 갈등을 눈치 챈 명치일본측은 환궁직후 광무황제에게 모스크바의정서를 보내어 광무황제를 더욱 실망시켰다. 광무황제가 일본에서 들여온 국가채무를 갚아 버리려고 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의 차관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명치정부는 친일적인 총세무사 브라운을 움 직여서 조선의 국고금으로 일본채무를 갚도록 하여 일본을 극도로 경계하는 광무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대한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막후 각축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가면서 러시아측은 점차 일본측에 외교적 양보를 하면서 일본과의 전면전쟁 가능성을 피해가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한국에 대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커 가는 것을 의미했다. 노불동맹(露佛同盟)으로 압박을 받고 있던 독일측은 그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급변에 주목하여 러시아의 주력을 동아시아에 돌리도록 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외교적 활동에 여유를 얻고자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긴장관계를 조장하려 했다. 러시아로서는 만주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을 노리고 있던 중,서1900년 여름에 청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자 16만 대군을 만주에 파병했다. 그에 따라서 서1901년 초에 열린 노청협상(露淸協商)이 결렬되는 등 청국과 러시아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갔다. 독일측은 러시아 세력의 확산을 우려하는 열강의 분위기를 이용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고자 서1901년 3월 18일에 영일독 삼국동맹을 제의했다. 독일측은 주영 일본공사에게 대한국점령을 부추김으로써 왜족의 야욕을 북돋았으나 협상이 본 궤도로 들어가려 하자 러시아를 적으로 만들고 싶은 의향은 없었던 독일측 자신은 슬그머니 협상에서 빠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당대 세계 최강국인 영국이 일본을 도울 용의가 있음을 알게 된 이등박문은 서1901년 11월 말에 러시아를 방문하여,'대한국이 일본에게는 사활문제' 라고 전제하고 '일본이 대한국에 군사적으로 개입할(즉, 침략할) 권한'을 러시아 외상에게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등박문은 러시아와의 협상을 계속 추진하고자 했으나, 가쓰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은 러시아를 만주에서 철수시키기 위한 영일동맹을 추진하여 서1902년 1월 30일에 마침내 영일동맹을 성립시켰다. 러시아는 청국과 만주철병협약을 맺어서 만주주둔 러시아군을 일단 철수시키기로 했는데 1차 철병을 단행한 러시아측에서는 강경론이 다시 크게 대두되어 서1903년 4월에 실시해야 할 2차 철병을 미루고 압록강변의 용암포에서 벌목을 하며 진지구축을 기도했다. 이에 대하여 광무황제는 왜족에게도 같은 지역에서의 벌목을 허가해 주는 등 두 나라로부터 불필요한 의혹을 사서 양국간 분쟁에 대한국이 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는 한 편, 양국간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시국외중립(戰時局外中立)'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러시아측은 길림과 봉천 방면에 있던 러시아군을 남하시켜 요양과 해성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량과 군마를 징발하고 본국에서도 병력을 수송해 오는 등 만주확보 의지를 더욱 구체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8월에는 여순에 극동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청국의 주권을 침해했으므로 청국측에서는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그에 응하지 않고 버텨 나갔다. 그처럼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 싸고 노일 두 나라간에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서1903년 8월 12일에는 러시아주재 일본공사가 러시아측에 '대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러시아측은'위도 39도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자'고 제안했고 명치일본측은 '대한국 국경 남북 50키로미터를 중립지대로 하자'고 맞제안하는 등 서기 1904년 초까지 양국간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양국은 전쟁을 향해 치달아 갔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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