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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浮萍草 2014. 12. 26. 10:37
    7. 대한제국의 수립 단 마음의 여유를 되찾으며 당분간 러시아공사관에서 집무하게 된 고종은 그간 왜구의 약탈에 의하여 피폐해져 왔던 백성들의 생계를 위하여 세금을 대폭 탕감하는 한 편 왜식으로 강제되었던 내각의 관제(官制)를 다시 원상복구 해서 명치일본으로부터의 독립자존을 명백히 했다. 또한 고종은 여러 서양인들을 알현하면서 서양열강의 제도나 관습 등에 대해서도 보다 많은 관찰과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약 1년여간에 걸쳐 향후의 모든 계획을 심중에 정리한 고종은 나라의 체통과 국민들의 정서와 안전문제 등을 고려 하여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동안 서양각국의 요구에 응하여 많은 이권사업을 이양한 것도 결국은 당분간 서양의 힘을 빌 어서 왜구의 준동을 억제하며 국력을 점진적으로 배양하려는 고종의 장기적 포석이었으나 친일파 등 반대자들로 부터는 많은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대외적 정책에 대해서 가장 치열한 반대를 전개한 것은 바로 독립협회였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정사를 돌보고 있던 건양 원년(4229년,서1896)의 년초에, 갑신란 이후 미국에 망명가서 서양의사로 생활하고 있던 필립제선(畢立堤仙,Phillip Jaisohn=서재필)이 역시 같은 갑신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와 워싱턴에서 만나서 갑오·을미 2년 사이에 벌어졌던 동아시아의 대격변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난 얼마 후에 미국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는 귀국 즉시 3차 김홍집 내각(친일내각)의 내부대신이었던 친일파 유길준의 권고에 따라서 중추원의 고문이 되는 한 편 친일내각으로부터 오천원(당시)의 국고보조금을 받아서 신문발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4일 후에 일어난 정변으로 인하여 김홍집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그에 따라서 필립제선은 거의 혼자서 4월 7일에 순수 민간지를 표방한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은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했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여 여론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신문은 외견상 민족자주독립의식의 고취와 함께 서구식 민주주의사상을 전파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또한 정부시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탐관오리에 대한 지탄을 전개함과 동시에 미국 등 선진각국(실상은 제국주의 침략 세력들)의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국가운영의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생활양식을 따라간다고 해서 저들과 같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필립제선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열강들은 지구상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자유의 땅' 중 하나인 조선과 청국을 저들의 구미에 맞게 요리해서 먹어 버리려는 야욕만을 더욱 불태워 갔을 뿐이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필립제선의 친일-친미적인 기본성향에 의하여 초창기부터 노골적으로 반청-반로적인 논설들을 많이 다루었다. 특히 청국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평을 가하는 한 편, 청국의 적수였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와 같은 친일·반청적 역사인식의 바탕 위에 선 독립신문은 그런 기본적인 바탕이야 여하간에 제33호의 지면을 통하여 서대문 바깥에 헐린 채 방치되어 있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할 것을 제창했고,수일 후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는 등,독립문 건축과 독립협회 수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독립문의 건립은 실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청국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 강했고 그 반면에 일제의 세력이 한반도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대다수 민중에게는 독립문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민족독립국가 확립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독립협회는 여러 자주적 노선의 선비들 및 국민들의 여론에 동조하여 독립국으로서의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고종이 칭제건원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한 조정대신들과 유림선비들과 독립협회의 움직임도 물론 고종이 칭제건원을 하고 이어서 자주적 개혁을 시도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고종임금 자신의 자주독립국 건설의지야말로 가장 큰 추진력이 되었다. 고종의 확고한 방침에 따라서 정부에서는 4230년(서1897) 8월 16일부터 년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개정하여 시행했고, 10월 12일에 소공동에 세운 환구단에서 대한국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칭제건원을 개시했다. 대한국을 수립한 광무황제가 최우선적으로 추진한 일은 무엇보다도 안정된 통치권의 확립이었다. 열강의 대한국 지배야망을 극복하고 떳떳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면 뚜렷한 정책목표를 세우고 일사불란하게 추진해 나아가야만 했다. 따라서 우선 황제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궁내부를 강화했다. 그리고 개혁정책을 펼쳐감에 있어서 옛 것과 새로운 것들을 절충하여 현실적으로 유용한 방법을 이끌어 내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았다. 황제는 동도서기적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실생활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시책은 과감하게 밀고 나아가는 한편 형식적이고 실속이 없다고 판단된 관행 또한 과감하게 고쳐 나갔다. 그러기 위해서 궁내부에는 주로 실무에 능숙한 전문적 기술관료들을 대거 기용했다. 8.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명암
    독립협회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외세(특히 청국과 러시아)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특히 아관파천 기간동안 러시아 및 서양 열강들에게 크게 잠식당한 각종 이권을 회복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4231년(서1898) 2월 9일에는 종로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협회의 젊은 행동대원인 이승만 등이 단상에 나서서 정부의 부패와 외국인의 이권침탈 등을 규탄하고, 자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것 등을 강력히 주장했고, 또한 그와 같은 내용의 결의문을 정부당국에 제출했다. 이처럼 대중을 동원한 만민공동회 운동은 민주주의에 익숙해지고 있던 서양인들에게 특히 감명을 주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러시아측에서 추진하고 있던 여러가지 이권개입 들을 스스로 철회하게 만드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처럼 외견상 여러가지로 독립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는 듯이 보이던 독립협회의 진정한 문젯점은 그 선두주자인 필립제선의 인간적 한계였던 친미·친일적(따라서 친영적) 경향에 따라서 국내외적 정세를 보는 시각이 심히 편중되었다는 데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구제국주의의 위험성과 일제의 침략성에 대해서는 대단히 인식이 부족했다. 대체로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견지한 독립협회는 조선백성들을 문명되지 못한 위험한 존재로 보고,의회설립도 오로지 독립협회 중심으로만 추진해야 한다는 극히 독선적인 면이 강했다. 그들은 의병이나 동학군을 난적(亂賊)으로 보고 그들을 토벌하려 하는 일본군의 주둔을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변명하는 해괴한 발상까지 할 정도로 주체적 국민의식이 미흡했다. 그러나 다분히 친일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독립협회를 이끌고 있던 필립제선에 의하여 크게 손해를 보게 된 러시아는 물론,심지어는 일제까지도,문자 그대로의'독립'이라는 개념이 대한국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권획득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딸서 속셈은 어쨌든 두 나라 모두 그의 활동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었으므로,필립제선은 활동력의 한계를 느끼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가장 선두에 섰던 지도자를 잃은 독립협회는 그 후로도 당분간 윤치호·이 상재 등에 의하여 유지되어 갔으며 독립신문의 발행도 계속되었다. 또한 독립협회는 4231년(서1898) 10월 29일에 종로네거리에서 관민합작(官民合作)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각계각층 인사 3,000여명과 정부고관 7,8명이 참석한 가운데 6개조에 이르는 대정부 건의문을 만장일치 박수갈채로 채택했다. 만민공동회에 참석했던 정부의 대신들도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황제에게 대회의 모습을 알리고 6개의 결의사항을 상주하니,황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칙들을 내리는 등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할 뜻을 비쳤다. 이에 힘을 얻은 독립협회는 황제즉위일인 10월 31일의 계천절(繼天節)을 맞아 독립관에서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하고, 건의사항 및 조칙을 10만매 가량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는 한 편 각급 학교들의 교재로 삼도록 했다. 이리하여 만민공동회와 황제사이의 상호이해 및 호응에 의하여 대한국은 바야흐로 올바른 방향으로 기틀을 잡아나가는 형세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4일 밤에 독립문에 황제에게 반대하고 공화제를 찬양하는 괴벽보가 붙여진 사건이 발생하여,황제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대신들을 해임하고 독립 협회 간부들을 가두고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흥분한 독립협회 회원들은 종로에서 날마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를 규탄하며,당시에 오흉으로 일컬어지던 대신들을 엄벌할 것과 독립협회를 부활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정부는 간부들을 일단 석방해 주었다. 일단의 의병활동 출신자들과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황국협회 회원들은 그러한 독립협회의 활동에 의구심을 품고,11월 21일 오전에는 인화문에 모여 있던 만민 공동회를 습격했고 시내 곳곳에서 두 협회간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광무황제는 크게 상심하여 다음날인 11월 22일에 외국간첩들과의 내통을 경계하는 법률을 공포하고 보부상단체의 해산을 명한 후 독립협회를 다시 설립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황국협회는 다음날 다시 만민공동회를 습격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등 계속적으로 독립협회와 크게 대립했다. 광무황제는 더 이상의 동족상잔을 막기 위하여 마침내 11월 26일에 돈화문 앞에서 정부대신들 및 외국사신들과 두 협회의 주요간부 200명씩을 소집하도록 해서 서로 화해 하도록 했다. 광무황제는 독립협회에도 국가의 동량재가 될만한 인재가 많음을 알고 남궁억·이승만·양홍묵 등 10여명의 협회간부들을 중추원의관에 임명하고, 부회장인 이 상재를 내각 총무국장에 기용하고, 회장인 윤치호를 한성판윤(시장)에 유임시키는 등으로 크게 중용했다. 그러나 4231년(서1898) 12월 6일에 열린 중추원 회의석상에서 독립협회 출신 의관인 최정덕이 긴급동의를 내어 의관 중 결손인원 11명에 대한 후보를 중추원 자체에서 선출하여 정부에 알리자고 하여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덧붙여서 박영효와 서재필 등을 기용하자고 주장하여 투표로 통과시켰다. 광무황제는 그러한 제안에 심히 의문을 품고 드디어 독립협회를 해산해 버리고 간부들을 투옥 내지는 유배형에 처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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