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84 대청국의 몰락

浮萍草 2014. 12. 17. 12:00
    아편전쟁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6. 대청국의 몰락 편전쟁과 태평천국전쟁이 지나간 후 거듭되는 흉년과 전염병의 창궐,비적떼의 준동 등으로 청나라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에 빠져들어 갔다. 각지에 출몰하는 비적들은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일종의 지방정부 노릇을 하는 군벌로 성장해 갔는데 가뜩이나 서양오랑캐들의 침탈에 살기 힘겨워진 민중들은 정부에서 거두어 가는 세금 외에도 비적들이나 군벌들에게까지 세금 명목으로 강탈당했다. 심지어는 한 지역에서도 몇 개의 군벌들이 서로 자기들 관할지역이라고 우기면서 같이 털어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여 혈기가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살기 어려운 농부 노릇을 집어치우고 출세를 위해 자진해서 비적의 무리에 가담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서도 청나라를 구하려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제시되었는데 주로 소장 관료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양무운동(洋務運動)과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이 대표적 이었다. 양무운동은 실학운동의 일종으로 서양의'과학기술'을 익혀서 서양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자는 것이며 그 원래 의미는 훌륭했으나 주로 대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 공장건설, 항만운수업 등에만 정신을 팔고 그들 자신이 하나의 이권집단화 되어 감으로써 큰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양무운동의 제창자인 증국번은 태평천국 진압에 가장 큰 공로를 인정받은 비교적 정직한 관리로서 직예총독 시절에 서태후와 함깨 정부차원에서 양무운동을 시행하기로 하여 처음에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이어 받은 이홍장은 일본에 의한 대만상실,프랑스에 의한 베트남상실 등으로 점차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었으며,뒤를 이어 강유위가 중심이 된 변법운동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변법운동은 대동사회를 궁극적인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광서황제의 신임을 얻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강유위의 애매한 대동사회 논리를 의심한 서태후의 반발에 부딪쳐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강유위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러한 마지막 자구책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은 길은 멸망해 가는 길밖에 없었는데 이를 부채질한 것이 의화단(義和團) 사건이었다. 의화단은 산동성에서 부패한 지방관리의 수탈에 맞서는 민중자위조직으로 시작하였으며 여러번 정부측과 충돌하면서 점점 세력이 커져 갔다. 하북지방까지 뻗치게 된 의화단 세력은 서양인들을 적대시하였고 서양상품 불매운동과 서양종교 배척운동 등 반외세적인 민중운동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히 서양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고 따라서 어떻게든지 의화단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 특히 서태후는 은근히 이들에게 기대를 걸어서 자기의 지지세력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므로 서양인들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명맥을 지탱해 주고 있던 것은 실로 그러한 의화단의 민중세력이었던 것이다. 의화단은 대체로 형제적인 평등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일종의 종교적 이상사회였다. 그들은 마침내 크게 궐기하여 서양세력을 상대로 대항쟁을 벌인 끝에 드디어 북경을 점령하여 침략자들을 추방하거나 가두었는데 그 중에는 선교사나 기타 민간상인들과 그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격려하여 서양세력을 몰아내는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나 왜구 및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은 곧 기다렸다는 듯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북경으로 쳐들어갔다. 대포와 기관총을 앞세운 서양침략자들 앞에서 의화단은 칼·창·권법만으로 싸울 뿐이었으니 그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마치 조선에서 갑오농민군이 적수공권으로 왜구들을 상대한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청나라 민중은 모든 혼란의 원인이었던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승패에 관계없이 영웅적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침략군들의 학살과 방화 등 만행은 소위'문명국'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잘 보여 준 훌륭한 예가 되었다. 의화단 운동의 실패로 인하여 청나라는 완전히 군벌시대로 접어들었다. 중앙의 권력이 될 만한 것은 이미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침략자들이 강요한 4억 5천만냥이라는 천문학적인 '전쟁피해배상'을 다시 한번 부담해야만 했던 청나라의 국고는 팅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얼빠진 각 지방의 군벌들은 침략자들과 적당히 협조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워나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는 청나라를 구하겠다는 어떠한 외침도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속 좁은 남쪽지방의 한족들은 그러한 난국이야말로 '만주족지배자'인 청나라 황실을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자기 자신의 나라이기도 했던 청나라를 돕기는 커녕 왜구 등 침략세력을 등에 업고서라도 우선 청나라를 타도하려는 반역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한 소위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를 내건 자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손중산(孫中山=孫文)이었다. 그는 한족출신으로서,'지나지방'이 외세로부터 해방되는 것보다도 청나라의 국권을 한족들이 탈취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하와이와 홍콩에서 서양의학을 배운 후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개업을 하다가 점차로 '서양식 민주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한족의 국가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반제국주의 혁명이 아닌 '반청혁명'을 시도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자신의 국가 청나라를 한층 더 위태롭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기 1912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 우연한 화약 폭발 사고로 인하여 시작된 혁명에 의해 손문은 일약 혁명의 지도자로 부각되었으나 그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혁명 세력의 최고지위인 대총통의 자리만은 산동의 군벌 원세개에게 양보하였다. 이로써 청나라는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지고 '민국(民國)'이 첫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민국을 선포했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사라진 황제의 권위를 대신하는 대총통이 되려는 군벌들이 더욱 치열하게 다투게 되었던 것이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차례로 사망한 후 어린 황태자 부의(푸이)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원세개는 자금성의 황궁에 부의를 유폐시키고 모든 청나라의 권력을 박탈하여 장악해 버렸다. 원세개의 본심은 자신이 새로운 황제가 되는 것이었으나 손문의 국민당 군부를 위시한 여러 군벌 세력이 모두 이에 반대하여 도저히 가망이 없게 되자 야망을 포기하고 실의에 빠진 끝에 얼마 후 병사하였다. 이런 대혼란의 와중에 장강 남쪽 호남성에서는 한 이상주의자가 성장하고 있었다. 얼마 후 지나지방 현대사에서 가장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될 모택동(毛澤東;마오쩌뚱)이었다.
    Pluskorea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