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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조선의 황혼

浮萍草 2014. 12. 11. 10:42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新志)의 기록을 보면,조선의 옛날 관청(官廳)의 명칭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명칭들이 하나같이 대다수가 현재의 중공 대륙에 있는 지명들으로 이루어져 있어 참으로 놀랍습니다. 특히 임하필기에서 기록한 전라도 지역의 계림부(桂林府)는 확증적으로 조선이 대륙에 있었음을 밝히는 기록 입니다. 물론 임하필기의 전라도 계림부(桂林府) 그 외의 기록도 훌륭한 기록 이지만,현재의 지나 대륙의 계림부(桂林府) 관련 자료를 보면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한반도에 있는 금산사 라는 사찰이 지나 대륙에도 있는데 현재 지나 대륙의 금산사는 계림시(桂林市) 전주현(全州縣)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유원의 "임하필기"의 기록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계림부(桂林府)는 전주(全州)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임하필기(林下筆記)의 저자인 이유원(李裕元)은 구한말을 대표하는 당대의 대학자요 문신(文臣)이었습니다. 이유원이 남긴 저서인 임하필기(林下筆記)의 기록은 이익의 성호사설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학자의 문집입니다. 대륙조선의 그 실체를 규명하고 밝히는 근거로서 훌륭한 자료가 될것이라 생각됩니다. = 편집자 주

    4. 갑오농민봉기와 청일전쟁 화늑약 이후 탐욕스런 왜구들의 본격적인 불공정 무역수탈로 조선의 경제적 혼란은 계속되었고 탐관오리들마저 크게 발호하여 민중수탈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그에 반발한 민중사이에 최제우 선생이 창도한 동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동학은 동양의 전통적 문명사상을 요약한 이론이 정연한 우수한 사상이었으며 서양 오랑캐들에 대항하는 정신적 무장을 필요로 하고 있던 뜻있는 선비들과 민중사이에 많은 호응을 얻었다. 모든 민중이 고루 잘사는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려 했던 대경세가 정도전의 이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바른 선비들과 의기에 불타는 민중은 민중피폐의 원인인 탐관 오리들과 매국노 등을 처단하고 오랑캐 세력을 몰아내려는 염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4227년(서1894)에 전라북도 고부지방에서 탐관오리 조병갑의 실정에 반발한 민중은 마침내 지방선비로서 동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던 전 봉준을 선봉장으로 삼아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궐기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민군에 대항할 관군이 부족한 것을 우려하여 청국의 태평천국난 때처럼 외국군대라도 끌어 들여서 민중봉기를 진압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서의 세력확대를 꾀하고 있던 청국이 파병요청을 받아 들여서 수천 명의 청국군이 남양만으로 향하자,조정과 민군은 전주에서 전격적으로 화해하여 외국군대의 출동명분을 없애고자 했으나 청국군이 남양만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왜구들은 천진조약을 빌미삼아서 요청하지도 않은 대규모 병력의 출동을 감행했다. 불법적으로 제물포를 통해 서울로 침범한 왜군은 궁성을 포위하고 저들의 입맛에 맞게 내정간섭을 자행했으며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하여 정권자체를 마음대로 농단하려고 했다. 저들은 또한 궁궐을 포위한 채 수백년 전해져 내려오던 궁궐의 보배로운 소장품들을 대거 약탈하는 날강도떼들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세계 각국의 사절단이 모여 있는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서 제멋대로 폭거를 자행한 왜구들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가운데 왜구들은 선전포고도 없이 청국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름하는 청일전쟁의 막을 열었다. 남양만과 성환과 평양 등 주요 전장에서 청국군과 왜구들이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이는 동안 전 봉준을 위시한 농민군은 위기에 처한 조국과 왕실을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재차 궐기했다. 그러자 왜구들은 이미 허수아비로 전락한 친일정권을 앞세워 최신무기로 중무장한 왜구와 관군의 연합군을 파견하여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그리하여 수개월간에 걸친 치열한 항쟁끝에 거의 호남지방 전역을 휩쓸었던 (갑오)농민봉기군은 무려 30여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끝에 진압당하고 말았으며 항일무력 투쟁의 지도자인 전 봉준 선생도 끝내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과 신문을 받은 후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탐관오리와 외세에 대항하여 총궐기했던 갑오농민군은 그 후에 이어지는 광범위한 의병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큰 자취를 남겼다. 5. 을미왜란과 아관파천
    청국군에게 크게 이기고 항일봉기마저 일단 진압해 버리는 데 성공한 왜구들은 친일적인 김 홍집 등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저들 멋대로 조선을 요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마무리짓는 마관(馬關 ; 시모노세끼)조약을 통하여 요동반도와 대만과 산동반도 일대에 세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명치일본의 계략이 러시아·독일·프랑스 등 세 나라의 강력한 항의로 무산되자 고종과 민중전 등 반일세력은 새삼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 급히 선회했다. 이미 청나라가 명치일본의 무력에 굴복한 상태에서 명치일본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실제적인 세력은 러시아이외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친로파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왜구들은 4228년(서1895)10월 7일 새벽에 광화문 바깥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수비대와 친일적인 훈련대가 긴밀한 협조작전을 펼치는 가운데 흉악한 자객인 낭인(浪人:료닌)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서 친로파의 핵심으로 알려진 민중전을 암살하는 역천(逆天)의 망동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친일파 김 홍집의 제3차 내각은 전 국민의 분노를 외면하고 왜구들을 감싸주는 어처구니없는 망동을 저질렀으므로 전국적으로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의병들이 봉기 하여 친일파와 왜구들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친일파내각은 의병을 진압하려고 친위대의 대부분을 지방에 파견했는데 친로파였던 이완용이 인천에 있던 러시아수병 백여명을 불러 들여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자 곧 부왜(附倭)무리들에 대한 일제 검거령과 처형지시를 내려서 외세에 빌붙어서 나라를 파탄에 빠뜨리고 국모를 시해하는데 일조했던 반역의 무리들을 일시에 제거해 버리고자 했다. 그에 따라서 김홍집과 어윤중 등은 거리에서 군중에게 격살당했고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도주해 버렸다. 이처럼 부왜적인 갑오개혁의 주역이던 개량파들은 갑오년의 항일농민봉기를 왜구들과 연합하여 탄압하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도모했으나, 결국 왜구들의 꼭둑각시 노릇만 하다가 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국모암살과 아관파천 등으로 왜구들에게 좌우되는 조정의 실상을 확실히 알게 된 조선의 민중(선비들을 포함해서)은 스스로의 힘으로 간신들과 외적들을 몰아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국모가 왜구들에게 시해된 지 한달여 후인 11월 15일에 단발령이 공표되자 전국은 가마솥처럼 끓어 올랐다. 더구나 왜구들의 강요에 의하여 황제의 상투부터 잘려 나가자 모든 뜻있는 선비들과 민중은 격노했다. 학부대신 이 도재는,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그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단군·기자로부터 내려 오는 편발(編髮)의 풍속이 변하여 상투가 되었는데 이제 만일 하루 아침에 머리를 깎아 버린다면 사천년 지켜온 풍습이 무너지는 것이며 만백성이 흉흉해져서 난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탄식했고, 외국인이 볼 때도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상투부터 잘라버림으로써,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긍지를 일시에 잘라 버리려는 흉계가 왜구와 부왜무리들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었다. 왜족들에 의한 어떠한 수모와 수탈에도 참고 견디는 문명인다운 관용을 보여 왔던 한민족도 단발령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참아야 할 아무런 명분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문명한 한민족의 기본적 존재가치인 효(孝)와 유구한 문화적·역사적 자부심을 말살하여 개·돼지같은 야만인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에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던 양·왜의 무리들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자존심 강한 한민족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무엇 보다도 충분했다. 아무리 나라가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어째서 인류문명의 최고봉인 한민족이 양·왜와 같은 짐승의 무리로 같이 전락해야 한단 말인가? 스스로가 '아직은 문명인'임을 증명 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고종의 밀명을 받든 의병들이 봉기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발을 기꺼이 시작한 자들이 다름 아닌 부왜무리들이었던 까닭에 의병투쟁은 곧바로 친일파 타도와 왜구 격멸을 위한 인류문명 회복의 항쟁으로 발전해 갔다. 이로부터 이십여 년에 걸쳐서 열악한 조건과 빈약한 장비밖에 갖추지 못한 수십만 의병이 조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며,인류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항쟁을 벌이는 단초가 열리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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