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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왜, 서구의 조선 침략

浮萍草 2014. 11. 24. 23:06
    10. 압살당한 문명
    1. 왜·서구의 조선침략 4172년(서1839)의 기해사옥(己亥邪獄)때 조선 국내에 불법적으로 잠입했던 프랑스선교사 세 명이 처형당하자 4176년(서1846) 7월에 프랑스 해군제독 세실이 군함 세척을 몰고 와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문책(협박)을 했다. 어째서 사상적 혼란을 목적으로 밀입국한 주제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는 자들(즉, '문화적 간첩'이라고 볼 수 있는 밀입국 선교사들)을,당당한 하나의 주권국가에서 자신의 법에 의해 처벌할 수가 없다는 말인가? 당시'서양오랑캐들에게 악용될 지도 모를'상세한 조선지도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당하고 있던 김 정희는 실학파 박 제가의 문인이기도 했는데, 그도 또한 프랑스 해적들의 협박에 분개하여, "프랑스의 패서(悖書)에 다만 분통할 뿐이다.
    사도(邪道)가 (내·외로) 서로 통하는 것은 이 패서에 대한 비방을 핑계로 공갈·협박하려는 간계가 분명하니 더욱 분하다…"고 하며 세실의 압력에 대한 천주교도들의 내응 (內應)에 분노했다. 철종의 치세 당시에 천주교에 대한 감시가 다소 느슨해지자 다시 프랑스 신부들이 많이 밀입국하여 신도수가 급팽창했다. 이웃 대청국에서 벌어졌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서양오랑캐의 만행을 익히 알게 된 대원군 등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이용해서 러시아 등 다른 외세의 예상 되는 침략에 대응하려고도 했으나 국내외적 사정을 감안한 끝에 최종적으로 그들 밀입국 신부들과 그들에게 현혹된 자들을 일소해 버리기로 했다. 고종 3년인 4199년(서1866 : 병인년) 초에 프랑스의 밀입국신부 아홉 명과 그들의 신자인 천주교도 팔천여 명을 처형하자,조선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리델(Ridel)신부는 당시 대청국 천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Rose)제독에게 일러 바쳤다. '자유제국'을 표방하고 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정부는 조선침략을 결정하고,조선의 자유를 침탈하기 위하여 리델신부와 조선인 서양교도 세 명의 길안내로 세척의 군함(즉,해적선)을 끌고 서울의 입구인 서강(西江)까지 침범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의 수비가 견고한 것을 확인하고는 일단 되돌아갔다가 같은 해 10월에 7척의 군함으로 보강해서 다시 침략해 왔다(병인양요). 그러나 한강의 입구인 강화도 해역에서 완강한 수비에 직면한 프랑스함대는 가는 곳마다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면서 해적다운 행패를 자행하다가 한겨울이 닥쳐 오던 11월 18일에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막지한 프랑스침략자들은 이때 강화도의 사고(史庫)를 약탈하고 방화함으로써 더욱 문명국 조선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대원군은 완고하기는 했지만, 주변 정세와 세계 정세를 나름대로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동도서기(東道西器)적인 입장에서 서양의 과학기술들을 도입하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아편전쟁 후에 대청국의 공양학파(公洋學派) 사상가인 위원(魏源)이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저술하면서, "위사이장기 이제이(爲師夷長技 以制夷 ;양이洋夷의 장점으로써 양이를 제압한다)"를 주장한 이래로 서양의 무기제조술 등을 배워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크게 대두 되었으며,병인양요 당시에도 김 윤식 등은"불무병다이유구포정(不務兵多而惟求砲精 : 병력 많은 것보다 정교한 대포 등을 갖출 것)"을 주장했다. 서양오랑캐에게 배울 것이라고는 사실 그 서양오랑캐들에게 대처할 수 있는 무기제조 이외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 대청국과 일본열도 이외에는 나라가 없는 줄 알았던 무지하기 그지없는 서양오랑캐들은 두 나라보다도 더욱 효율적으로 완강하게 방어하는 문명국 조선 인들에게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같은 병인년에 자기들 멋대로 조선 해안을 측량하며 갖은 행패를 자행하면서 평양까지 침범해 올라 왔던'자유의 나라'미합중국의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군의 화공(火攻) 으로 격침되자,5년 후인 4204년(서1871;신미년)에 미국오랑캐들은 일방적인 통상조약을 강요하기 위하여 북경주재공사 로오(Law)에게 명령하여 아시아함대를 침략 시켰다. 그러나 미국오랑캐들도 한강입구인 강화도에서 맹렬한 조선군의 방어에 부딪쳐 퇴각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수차례에 걸친 서양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조선은 저들의 야욕이 오로지 동아시아 전체를 식민지화하려는 것뿐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자유와 독립'을 지켜내는 길은 당시의 취약한 국내 시장을 저들의 요구대로 개방해서'개화'하는 게 아니라,오직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항전하는 수밖에 없다 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대원군은 국내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튼튼해질 때까지 오랑캐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국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도록 하여 결전의 의지를 굳혔다. 이에 앞선 4202년(서1869),서양오랑캐들을 모범으로 삼는 국가발전 계획을 세우고 소위 왕정복고(즉,명치유신)를 단행한 일본열도의 족속들은 오랜 스승의 나라 조선에 그 사실을 통보했다. 저들은 스스로를 황국(皇國)이라고 참칭하면서 조선을 깔보려 들었으므로 조선은 저들의 무례한 통보를 접수하지 않고 돌려 보냈다. 조선 조정은 열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고 열도족들로 하여금 다시끔 인류문명의 대도에 복귀하도록 촉구했으나 이미'서양서방' 에게 마음을 빼앗긴 간부(姦婦)에 다름 아닌 열도족,즉 왜구들은 오히려 스승의 나라를 능멸하는 패륜을 저지를 모든 간계(奸計)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이백여년간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내어 공들여 가르친 보람도 없이 다시 '왜구'로 전락해 버린 섬오랑캐들은, "조선이 5년마다 바쳐야 할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엉뚱한 트집을 잡아서 정한론(征韓論)까지 대놓고 떠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은 이미 문명의 대도를 거부하는 왜구들이 서양오랑캐와 같은 야수의 본능으로 돌아간 사실을 측은함과 두려움이 엇갈린 시선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의 나라 조선에 시비를 걸어온 지 6년 만인 4208년(서1875)에 왜구들은 마침내 저네들 멋대로 조선의 인후(咽喉)나 다름없는 강화도 주위를 측량하면서 도발을 감행 했다. 조선수비군은 저들을 철수시키려 했으나 왜구들은 오히려 함선에서 대 포격을 가하여 수비진지와 수비병들을 파괴해 버린 후에 상륙하여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다. 서양 오랑캐들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약육강식의 싸움질 밖에 없던 왜구들은 새 스승들보다 더욱 야만적인 괴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래에서도 왜구들이 난동을 부리는 등 심상치 않은 행패를 계속하자 그 때까지 본격적인 군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던 조선은 왜구들의 강요에 직면하여 불평등한 국제 조약의 표본격인 강화도조약을 수락하고 말았다. 이미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에 말단으로나마 끼어 들고 있던 왜구들은 조악한 품질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인기가 없던 저들의 싸구려 공장제품들을 조선 천지에 쏟아 놓기 시작했다. 이로써 대원군과 위정척사 염려했던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말하자면 조선 국내의 수공업자들은 얼마 안 가서 전면적인 파탄에 직면하였고,경제적 파탄에 따른 민생의 도탄이 초래되어 민심이 흉해지는 말세적 현상이 닥친 것이었다 오랑캐들은 저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오랜 스승의 나라 조선에 이처럼 엉망친창의 말세를 강요하고 그것을 개화(開化)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수십년간 왜구들은 풍요했던 조선을 송두리째 약탈하고 마침내는 저들의 부국강병 목표를 달성하여 보다 더 야만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끼어들 수 있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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