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미국의 침략(La Invasion Estadounidense) 1847년 멕시코는 미국의 침략을 당하여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뉴멕시코,캘리포니아 지방을 빼앗겼다.이 그림은 미국이 침략할 당시의 모습을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아스텍 하늘을 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18. 미합중국의 해외침탈
미합중국(미국)이 뒤늦게 산업혁명광란의 대열에 끼어들 무렵부터 미합중국에서는 많은 유태인 출신 실업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남북 전쟁을 전후한 시기까지 주로 은행업과 소매업등에 종사하던 유태인들은 서기 1880년대에 동유럽지방에서만 200여만명의 유태인이 몰려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새로 이주해 온 유태인들은 주로 소매상·직공·학자·전문직 등에 종사하며 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뉴욕주변의 빈민굴 신세를 면할 수 없었으나 강인한 생활력과 높은 교육열로 차츰 기반을 굳혀갔다.
뛰어난 상업적 재능을 유럽지방에서부터 몸에 익혀 온 유태인들은 서유럽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곧 모든 분야에 걸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들 중에서 록펠러·뒤퐁·모르간
등 세계 굴지의 재벌들이 속속 출현했다.
당연한 결과로 그들의 정치적 발언권도 함께 급성장했고 미국의 정책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뉴욕시에 대부분 몰려 살기 시작한 유태인들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뉴욕을 쥬욕(Jew York)이라고 부를 만큼까지
되었다.
문제는 산업의 주도자가 유태인이건 비유태인이건 간에 공룡처럼 비대해져 간 미국의 산업이 그 자체의 자본주의적 발전(?) 원칙에 의하여 원료생산지와 상품수출시장을
대규모로 요구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서기 1880년대의 10여년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생산과잉으로 인한 불황이 닥쳤다.
그리하여 영국섬을 비롯한 유럽지방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신흥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섬,미합중국·러시아 등의 후진 자본주의 국가들까지도
한꺼번에 상품시장 확보를 위한 추악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소위 '제국주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그 불길한 막을 올린 것이다.
제국주의라는 용어의 기원이나 그 적합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마치 암세포가 탐욕스럽게 주위로 뻗어 나가듯이 소위 공업'선진국'들은 단지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초과
생산해 낸 제품들을 어딘가에 팔아 먹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자기들을 위한 불행한 희생자가 되어 줄 후보지역들을 찾아 내느라고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눈이 벌개져서 날뛰었다.
미합중국은 일찌기 국제법상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운 '먼로주의'를 선포하여 미주대륙에 대한 유럽지방 해적국가들의 영향력을 배제시켜 버린 적이 있지만,먼로주의는
제국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그 진가를 크게 발휘하기 시작했다.
미합중국의 사업가들과 선교사들과 해군병력은 앞을 다투어 라틴아메리카 지방으로 파고 들었고 서기 19세기 초엽 무렵부터 갓 독립하기 시작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미합중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한 온갖 음모와 권모술수와 유럽해적들을 뺨치는 폭력과 상술 등이 총동원되었다.
서기 1880년대에 유럽의 제국주의자들(해적)은 저네들 멋대로 광대한 아프리카 지방을 나눠 먹는 폭거를 저질렀고 아시아 지역으로도 재빨리 무차별 침략을 감행했다.
그에 따라서 지구상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지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프랑스 세력간의 완충지대로 선정된 타이왕국을 제외하고는 단지 조선과 대청국뿐
이었다.
따라서 전 세계 해적 '선진국'들의 '명백한 운명'은 최후까지 남아 있던 역사유구한 두 문명대국에 대한 침략을 보다 빨리 단행하는 것 뿐이었다.
상품원료 및 시장확보 문제때문에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끝에 이겨서 쿠바와 필리핀으로 세력을 확장한 미제국주의자들은 수차례 조선침공을 단행하기도 했으나 문명
대국 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서 야욕을 달성할 수 없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처럼 서양해적들의 함포사격에 겁을 먹지도 않았고 서양의 기계류 문명에 무조건 굴복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대국 조선은 자신을 향해 조여 들여오는 전세계 제국주의 강도국들의 동향에 대해서 예리한 촉각을 세우고 보잘것 없는 서양의 기계류 문명이나마 힘닿을 수 있는 데
까지 흡수하고 소화시켜서 스스로를 강화하고, 참다운 인류문명의 마지막 불씨를 지켜내기 위하여 모든 지혜를 다 짜내어 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은 인류사회의 어른답게, 인류의 대도를 모르고 제욕심을 못 이겨 날뛰는 백인종 철부지들을 근심어린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미합중국의 제국주의적 해외팽창에 선두주자의 하나로서 활약한 바 있는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서기 1897년에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솔직히 말하면‥나는 우리나라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종류의 전쟁에 대해서도 환영한다."는 우려할만한 인격파괴적 공격성향을 보인 바 있다.
제국주의 강도질을 옹호하기 위한 온갖 곡학아세적인 어용학설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위 학자라는 탈을 쓴 콜럼비아 대학의 정치학자 존 버게스는,
"튜튼족과 앵글로색슨족은 민족국가의 건립을 위한 능력을 특별히 부여받았으며...현대 세계의 정치적 문명화(?)를 주도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등의 신들린 듯한
비합리적 주장을 하는 등 제국주의 강도짓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온갖 괴설들이 학문적 권위를 빙자하여 난무했다.
루즈벨트는 이처럼 팽창주의적으로 고양된 분위기에 힘입어서,
"하와이 합병을 주저하는 것은'백인문명화에 대하여 역행하는 범죄'이며‥모든 위대한 민족은 전투적 종족이었으며‥평화적 승리는 어떤 경우라도 전쟁을 통한 승리만큼
위대하지는 못하다."라고 당당하게 부르 '짖어'댈 수 있었다.
그처럼 순전히 야만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소아병적(小兒病的) 욕심에 가득찬 자들이 필리핀 열도를 점령하면서 보여준 잔인성은 왜구들보다도 나을 것이 없었다.
필리핀을 불법점거했던 스페인 침략자들은 필리핀 애국자들에 의해서 이미 거의 타도되었는데 미제국주의자들은 스페인 세력을 자기들이 쫓아냈다고 열병에 들뜬 듯한
어거지를 쓰면서 필리핀을 강제 점거해 버렸다.
어처구니없이 독립투쟁의 성과를 빼앗겨 버리고 다시금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필리핀의 애국자들은 지체없이 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했는데 이들에 대한
미제국주의자들의 잔인한 탄압은 대한국을 강점하려던 왜구들이 대한국의 의병에게 자행한 탄압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서기 1901년 11월에 필라델피아 레저(Ledger)지의 마닐라 특파원은,
"우리의 병사들은 잔인하였고, 남자?여자·어린이·죄수·포로·폭도 가릴 것 없이 모두 전멸시켰다.
10세 이상의 필리핀인들을 개처럼 다루었다‥폭도였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도 다리 위에 세워 놓고 한 사람씩 총살시켜 물에 떠내려 보냈다"라고 고백했고 숱한 필리핀
인의 시체를 숫제 방벽으로 사용하는 현장을 본 한 영국섬의 목격자는,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단순한 학살이며 도살행위이다."라고까지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미제국주의 군대의 흑인병사들은 한 어린 필리핀 소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고 당혹해 하기도
했다.
"우리는 흑인병사들을 친구로서 대하는데 왜 우리와 싸워야 합니까?
당신은 미국에서 흑인들을 태워 죽이고 당신을 야수처럼 다루는 사람들과는 왜 싸우지 않습니까?"
태평양 전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야만의 길로 치달아간 미제국주의자들은 같은 목적으로 심한 발광증을 보이고 있던 왜열도의 제국주의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노일전쟁에서 터무니없이 막강한 전투력을 드러낸 왜열도와 다투어 봤자 이로울 게 없다는 판단을 내린 미제국주의자들은 서기 1905년에 두 제국주의자간의
비밀협정(태프트·가쓰라밀약)을 맺어서 저들 멋대로 대한국과 필리핀을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기로 합의함으로써 정면충돌을 면할 수 있었다.
수십만명의 정의로운 의병들이 왜구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던 문명한 대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미합중국'이 대한국을 도와줄
지도 모른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막연한 기대감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기도 했다.
☞ Pluskorea ☜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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