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커플링 법칙

악플러는 일종의 지적 스토커

浮萍草 2014. 12. 1. 12:06
    <몸속의 생태학을 모르고서는 스스로의 몸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여기 당신의 몸과 마음,그리고 뇌가 연동되어 빚어내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인간 행동학의 세세한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 보라 그러면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본성은 어디서 오는가? - 마음의 기원
    존감은 일종의 권위의식이다. 이런 권위의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에는 서로간에 기대하는 일정한 권위의 배분비율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의 배분비율은 때로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왜곡되거나 편향될 가능성도 많다. 이것은 때로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 효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 인터넷에 뜨는 악플의 그 빈도와 심도를 한번 통계 내보면 우리 사회가 가지는 비뚤어진 자존 의식이 잘 나타날 것으로 본다. 이 자존의식은 남과의 거리에서 자기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일종의 존재감이다. 권위 배분비율의 왜곡현상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상의 악플러들의 존재감은 바로 그런 심리적 우월성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다. 한국적 악플러들은 스스로의 존재감과 잠재적 우월성을 보이지 않는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서 과시해보려는 자기의식 과잉 환자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겸손하게 또 때로는 호기롭게 그리고 또 때로는 야비하거나 수줍음으로 자기를 위장하곤 한다. 자기하고 이해관계가 없으면서도 뭔가 자기 마음속의 거리를 빗나가는 또는 엇나가는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그것을 못 참아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그 기사를 쓴 사람이나 그 기사의 주인공과 악플러와의 거리가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그 악플러의 심기를 거슬러서 악플을 쓰게 만든 동기를 제공한 것은 그 악플러가 느끼는 심리적 우월감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 악플러는 그 기사의 필자나 기사 속의 주인공에 대해서 심리적 우월감,즉 거리를 예민하게 재는 것이다. 그 재고 있는 거리가 자기의 계산과 어긋날 때는 어김없이 악플러의 악역 아닌 악역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든 상대가 되는 것과 자기와의 우월관계를 따지는 그 태도가 바로 음양적 개념에 기초한 사고다. 여기서 동중서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또 다른 하나의 사물이 그것과 짝을 이룬다. 그 사물이 주(主;주도적인 것)이고 그것과 짝을 이룬 사물은 종(從;종속적인 것)이다. 양은 주이고 음은 종이며,…. 이 주종관계는 영원히 변경될 수 없다.” (중국철학사(하) p.39) 한국인들은 모든 사물에 대해서 주종관계,상하관계,우열관계로 판단하려는 음양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자기는 주에 있고, 상에 있고,우에 있고 남은 종과,하와,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어떤 대상이 자기가 심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침범할 때 거기에 대해서 거칠게 반응하게 되는 임계점이 어느 순간 나타난다. 이것이 한국적 악플러들이 갖는 반응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누구든 그 심리적 경계의 역치(閾値)를 넘어설 때는 가차없는 철퇴를 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적 악플러들의 심리학이다. 악플러들은 일종의 지적 엽기심을 또 때로는 호기심을 쫓는 지적 스토커들이다. 악플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부정적일 경우 대부분 한국적 권위주의의 병리적 단면을 반영한다. 그런데 창의적인 발상이나 아이디어는 이런 사람들의 심기를 대개는 어긋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악플러는 인터넷상의 모든 사안에 매시 매초 늘어나고 또 늘어나기 마련이다. 권위비율의 문제는 한국에서는 일상화되어 있다. 특히 조직 속에서 그러하다. 위아래를 일로 구분하고 역할과 기능으로 따진다기보다 심리적 거리의 권위적 비율로 따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적 조직 원리는 조직의 종류에 상관없이 한국에서는 모든 조직에 침윤되어 있는 보편적 원칙으로 작용한다. 그 조직이 회사든 병원이든 학교든 보육원이든 언론기관이든 모든 조직 속의 알파와 오메가다. 한국식 조직 속의 위상의 거리,직분의 거리,역할의 거리,기능의 거리,또 이 모든 것을 합친 심리적인 거리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의 원칙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상하관계다. 상하관계가 모든 관계를 결정짓는 지배원리다. 그리고 이 지배원리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음양적 개념에서 시작된 바로 그 지배원리다. 누가 조직의 고삐를 쥐고 있느냐 누가 두 사람 사이에서 벼리의,즉 멍에의 줄을 쥐고 있느냐 또 누가 멍에를 쓰고 있느냐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그는 미국을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미국 사회의 영웅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학 중퇴자들이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창조적 인물들이 안 나올까?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2년 사장단 회의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했고“창의적인 인물들이야말로 몇 백만의 한국인들을 먹여 살릴 사람들이니 이들을 키워내자”고 했었다. 그런데 한번 상기해 볼 것은 삼성의 문화가 과연 창조적 인물을 배출해 낼만한 그런 조직 문화일까? 어림없는 소리라고 본다. 아마 상·하의식이 삼성처럼 강한 곳도 없을 것으로 본다. 어떻게 보면 삼성이야말로 가장 보수적인 가치가 강한 회사가 아닐까? 위계질서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상하의 벼리 의식,즉 음양적 사고방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직장이다. 우리나라 회사들은 하나같이 삼성을 모델로 꼽고 있다. 삼성적 조직질서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결국 위계질서와 상하의식에 대한 음양적 개념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옥죄는 지배원리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은 누가 뭐래도 유교적 가치가 가장 강한 곳이고 그 가치를 성공적으로 전승하여 온 곳이고 그 가치의 실천으로 세계사에서 일정부분 성공한 모범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삼성의 성공은 유교 모범국인 한국의 가치를 극대화해서 실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교적 가치가 권위주의적 가치고 그 권위주의적 가치는 지금까지 얘기해 온 데로 음양적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음양적 사고는 그 부정적 측면에도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분별력과 감식력을 갈고 닦게 하는 두뇌훈련에 큰 공헌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주어진 과제에 대한 엄격한 수행능력과 몰입도가 어느 민족집단보다도 강한 한민족을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권위적 상하관계에서 생기는 반강제적 훈련과 사물에 대한 숙련도는 역시 유교적 전통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이 부존자원이 빈약한 국가면서도 언제나 인적자원에서는 세계적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역시 유교적 두뇌훈련을 오랫동안 실천해 온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주입식 교육이니 뭐니 해도 한국인들의 교육 맹렬성은 역시 유교적 두뇌훈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보다 창의적이고 보다 혁신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창출의 궤도에 올라서 있다. 그러나 그 궤도의 성공적 발진을 위해서는 과거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냉철하게 정리하는 작업도 아울러 병행되어야 한다.
    Premium Chosun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aronge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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