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커플링 법칙

한국에는 왜 창조적 인물이 없나

浮萍草 2014. 11. 20. 12:53
    <몸속의 생태학을 모르고서는 스스로의 몸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여기 당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뇌가 연동되어 빚어내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인간 행동학의 세세한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 보라. 
    그러면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본성은 어디서 오는가? - 마음의 기원
    ㆍ우월감의 거리를 재는 한국인들 국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2005년 구매력 기준 23200달러라고 한다. fast follower(빠른 추격자)의 전략으로 선진국 문턱에까지 온 한국은 이제 창조성이란 큰 문앞에 서서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은 국가별 종합 창의성 지수에서 21위이고 국가별 다양성 순위에서 59위를 마크하고 있다. 창의성 지수 1,2,3위는 스웨덴, 스위스 미국이고 다양성은 캐나다, 아일랜드, 네덜란드가 그 순서이다. 그런데 한국이 창의성이란 장애물의 큰 벽 앞에 막혀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다양성을 크게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다양성의 결여는 곧 한국사회의 경직성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경직성의 원인은 따지고 보면 한국식 권위주의가 그 원천이 되고 있다. 예컨대 카이스트의 이광형교수(바이오 및 뇌 공학)도“무엇보다‘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인간관계를 주어진 상하관계로 파악하는 한국식 인륜 관계에서 모난 돌은 언제나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존재다. 주어진 틀 속에서 타협하고 순종하고 조직의 룰에 습복 해야 하는데 그 틀을 깨고 나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난 돌의 운명을 맞게 된다. 쉽게 생각하면 누구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것이 일어나는 과정은 쉽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모든 인간관계에 하나의 심리적 거리가 정해져 있다. 이 심리적 거리는 두 사람 사이의 위계를 암시하는 거리요 두 사람이 가진 힘의 무게를 상징하는 거리요 또 두 사람이 가진 조직적 위상을 나타내는 거리이기도 하다. 이 거리가 얼마나 기냐 혹은 짧으냐 하는 것을 아무도 말하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은연중에 작용을 하는 이 심리적 거리는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이 거리를 유지하는 균형이나 평형이 깨질 때 거기에 영향을 받을 위치에 있는 조직원들은 언제나 여기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을 하고 저항을 한다. 예컨대 조직 내에서 X라는 상사가 있고 그 밑에 a, b, c, d, e라는 조직원들이 포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조직원 b가 윗사람 X에게 이미 정해져 있는 일정한 경계를 뛰어넘어 접근하려 할 때 이런 b의 행동을 우선 윗사람 X가 용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X와 b의 거리를 규정하는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둘 사이의 직분, 즉 계급의 상하관계일 수도 있고 연령의 차이일 수도 있고 혹은 인격의 무게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b가 이런 X와의 거리를 월경하여 비상식적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할 때 우선 X가 b의 이런 파격적 행동을 용인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b의 이런 행동을 더욱 막아서려고 하는 사람들은 상사인 X보다 동료인 a, c, d, e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왜 이들이 b의 행동에 제동을 걸려는 것일까? 그것은 b의 파격적인 행동이 가져올 결과가 조직원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던 위상적,심리적 등등 기타의 평형관계를 유지해준 거리를 깨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은 현상유지를 바라는데 한 사람이 중뿔나게 이 균형을 깨트리려고 할 때 그 조직원들은 피해의 당사자일 수 있는 X보다 한국적 조직에서는 더 먼저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조직사회에서 흔한 회식문화는 바로 조직원들 사이의 거리균형이 안정되어 있거나 또는 깨질 염려가 있을 때 동시에 이루어지는 심리적 반응의 상징이다. 한국 사람들의 평등의식을 잘 암시해주는 말로“배고픈 건 참을 수 있어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말도 있다. 누구든지 현재 자기의 위치변경이 가지고 올 또 자기의 위상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어떤 현상의 변경도 한국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현상변경이란 곧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타인과의 거리요, 자기가 가진 조직과의 거리요 자기가 가지는 윗사람과의 거리다. 바로 이 거리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이 거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종적인 또는 횡적인 상 하 지배관계의 거리다. 그리고 이 상, 하 지배관계의 개념적 틀은 이미 얘기한 바 있듯이 그 원형이 음양의 개념에서 짜인 틀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왜 창조적인 인물이 안 나오느냐 왜 창의성이 풍부한 인물이 뜨지 못하느냐 할 때 가장 문제 되는 것이 한국의 조직문화다. 창조적 인물이 못 나온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창의적 인물은 어딘가 있는데 그가 처한 환경이 그것을 막는 경우다. 둘째는 한국적 조직문화 때문에 아예 창의적 인물이 만들어질 여유가 없는 경우다. 한국은 아마 이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할 것이다. 중국의 등소평이 1962년 중국 공산당 정치공작회의에서 모택동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토해낸 말이“쥐를 잡기만 한다면 그것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냐?” 는 것이었다. 등은 그 후 문화혁명을 치르면서 몇 차례에 걸쳐 그 말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사실 등의 말대로 중국의 개혁개방이 1978년이 아니라 그보다 16년이 앞선 1962년이었다면 지금 중국은 미국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커져 있을 것이고 아마 경제력 세계 1위의 위상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등도 그 당시 중국공산당 안에서는 ‘모난 돌’신세였다. 창의적 인물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역사에 묻혀버리고만 경우라고나 할까. 다른 얘기지만 그런 등소평이 이탈리아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팔라치가 민감한 사항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끈질기게 질문하면서 붙들고 늘어지자 회견이 끝난 후 등이 팔라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의 대화도 그런 식으로 하냐?”고 물었다. 이에 팔라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등은 “그럼 아버지가 가만히 있느냐? 따귀를 때리지는 않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회견장의 좌중이 한바탕 웃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등소평같은 정치인도 한국적 정치상황에서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팔라치 같은 여기자는 한국적 상황에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아예 그런 류의 여자는 나오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문제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정해주는 지배 관계의 그물이 촘촘하게 짜여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이러한 관계가 느슨하면 느슨할수록 그런 사회는 다양성이 존재하고 경직성이 덜하고 그리고 조직원들의 자유스러운 활동이 보장되는 사회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사람들은 백인에게는 친절하고 흑인들은 무시하고 동남아인들은 깔보기 일쑤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왜 그럴까? 그건 바로 한국사람들이 가진 거리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백인에게는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고 흑인들에게는 우월감을 느끼고 동남아인들에게는 비교우위를 느끼는 한국인들의 그 관계 사이의 거리의식이 여기서도 예민하게 작용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의식의 원천은 이미 여러 차례 얘기했듯이 음양의 개념설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국에서도 다른 인종에 대한 호불호에는 차이가 있다. 영국인들도 인도인 폴란드인, 쿠르드인, 코소보인 순서로 차등을 두어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처럼 우월의식이 타인종에 대한 배타성과 인종적 폐쇄성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런 배타성은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원천이 되고 있다. 중국만 해도 한창 그 문명이 융성해질 때에는 언제나 남북 간의 인종적인 교류가 왕성했었다. 중국인과 만주인, 흉노 그리고 몽골인과의 교류를 넘어선 인종적 배합은 중국의 문명을 다양하게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문화에 대한 최고의 해설가요 품평가인 임어당(林語堂)의 주장이다. 미국의 국력의 원천은 바로 이민자들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스티브 잡스도 대통령인 오바마도 바로 1세대 이민자들의 아들이다. 프랑스 축구팀이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하였을 때도 그 승인의 요인을 이민자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장이었던 지단, 일급공격수 앙리 트리제게 그리고 수비수 마루다와 박지성의 절친이라는 에브라가 다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선수들로만 구성된 한국 팀이 오히려 촌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화려한 국제적 색깔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인들의 동남아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대우가 과연 어떠한지 한번 되새겨볼 만하지 않은가? 한국인들의 상하의식은 한국인들의 우월성을 나타내기보다 오히려 열등감의 반영일 경우가 많을지 모른다. 한국인들은 남과의 위상적 거리를 재는 계기판을 몸에 부착하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든 만나면 이 계기판은 자동으로 작동된다. 위상적 거리는 남과 나 사이에 누가 더 우월하고 우세하느냐를 알려주는 거리다. 이 계기판의 거리 재기에서 이를테면 사촌이 자기보다 아랜데 어느 날 갑자기 논을 샀다 하면 이 계기판에는 강렬한 부정신호음이 울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애초부터 상하관계에 대한 의식이 없어야 하는데 그 상하관계 때문에 언제나 자기보다 앞서나가는 사람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한 개인과 한 개인, 한 개인과 한 집단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개인과 전 국민의 관계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의 천재는 권위주의의 사상아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Premium Chosun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aronge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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