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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명예박사 학위 수여사에 담긴 정 회장의 일생 (上)

浮萍草 2014. 12. 1. 11:46
    "조국 근대화 기반시설은 대부분 정주영 주도로 건설"<
    
    1995년 3월 18일 고려대학교는 정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사에서 대학원의 위원회는 정 회장의 일생의 위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그 추천의 이유를 밝혔다. 
    정 회장 일생의 위업과 그 가치,그의 정신과 인품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담겨져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 소개한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정 회장과의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아산 정주영 선생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워 세상의 이치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우쳤고 소학교를 졸업하면서 점차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동시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꿈을 키워 갔다. 
    그러나 선생은 집안의 장손이라는 전통적 멍에에 묶여 자신의 꿈을 속으로만 간직한 채 펼치지 못하다가 결연히 초지를 관철하고자 혈혈단신 맨손으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후 선생은 낮에는 공사판의 막노동,쌀가게 점원 등 온갖 힘든 생활을 잘 견디어 냈고 밤에는 배움의 의지를 불살라 통신강의록을 읽곤 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청소년기에 근로와 고학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착실하게 다졌다.
    선생은 천성이 강하고 씩씩하며 생각이 뛰어나게 지혜로웠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근검함과 성실함을 본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타고난 천성과 교양을 바탕으로 신의와 실력만이 당당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이라는 처세훈을 자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에 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위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자진해서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새로운 것에 대한 습득과 도전으로 기업을 선도하는 아이디어 개발에 앞장섰다. 이러한 결과로 아도서비스 공장,현대토건 등을 시작으로 건설,조선,자동차 등 제반의 산업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을 갖춘 오늘의 현대그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무릇 큰 일은 큰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이다. 1960년부터 전개된 역사적인 조국근대화의 대역사의 근간시설은 거의 현대그룹에 의해 주도되었다. 소양강 다목적댐,경부고속도로,울산조선소,원자력발전소 등 국내 굴지의 대공사들은 지난 날 우리 민족이 새로 개척하고 창조해야 하는 미증유의 사업들이었다. 만약 선생과 같이 개척자 정신과 겁없이 뛰어드는 패기,강인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그리고 투철한 신의와 신심을 가진 분이 없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큰 시행착오 없이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은 이렇게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중동으로 진출하여 20세기 최대의 공사인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리에 마침으로써 국제 경쟁 무대 에서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인의 슬기와 능력을 세계에 과시함은 물론 당시 궁핍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렇게 현대그룹이 이루어 놓은 대역사 그 모두가 개척적이고 창조적인 것들로 가히 역사적인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그룹의 성장과 확장은 바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척도가 되었고, 기업이 커짐에 따라 증대된 고용능력,생산력의 증강,수출의 증대는 국민의 생활 향상과 국가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직접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선생은 단순히 기업의 경영인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길을 모색하여 교육,학술,언론,문화,체육 등 광범위한 ‘국민복리’의 실천을 위해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낙후된 지역에 병원을 지어 의료혜택을 베풀었고,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1만 5천여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대학의 학술연구를 지원하여 산·학·연 협동체제를 구축하는데도 앞장섰다. 또한 언론의 창달에도 관심을 기울여 관훈클럽을 지원하고 신영연구기금을 조성하는 등 언론인의 자질향상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선생은 문화예술과 국민체육 진흥에도 적극 참여하여 여러 분야의 스포츠단의 창단을 통해 국민의 체력 및 국제 경쟁력 향상에 이바지했다. 특히 한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선양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여년 전 선생은 넓은 농토를 원하셨던 선친의 유업을 받들어 천수만 개척사업에 투신하여 가장 어려웠던 최종 물막이 공사를 이른바,‘유조선 공법’ 이라는 묘안으로 성공시킴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수많은 시련과 경험 속에서 터득된 선생 특유의 예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94년에는 아시아위크지가 선정하는 5대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영광을 누렸다. 선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빈 손으로 일어나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대이자 세계굴지의 기업을 구축했다. 이것은 입지전적인 인간승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선생은 대성한 뒤에도 어렸을 때의 가난을 되새겨 검소함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 기업을 일으킬 때의 어려움을 기업관리의 신조로 삼아 조금도 사치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그저 타고난 천성대로 부지런하고 건실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이제 선생의‘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생의 여정에도 연륜이 쌓여 80세라는‘대년(大年)’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큰 허물이 없이 80세를 산 노인에게는 수직(壽職)을 내리고 ‘선생’이라는 호칭도 붙여졌다. 하물며 선생과 같이 입지전적인 인간승리의 본보기를 보여 준 사람에게 있어서랴! 이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위원회는 선생이 간직한 인간 본연의 질박함과 일생동안 인류의 생존에 유익한 사업을 해 온 공덕을 기리어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할 것을 의결하고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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