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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피터 드러커 "정주영은 내가 주창한 기업가 정신의 극적인 사례"

浮萍草 2014. 11. 5. 09:58
     회장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었지만 넓은 분야에 걸쳐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나는 데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시간을 냈다. 
    그중에서도 세계 석학으로 손꼽히는 피터 드러커 교수와 정 회장의 만남은 그의 놀라운 혜안과 통찰력,그리고 정 회장과의 진솔한 대화 때문에 특히 기억에 생생하다.
    ‘단절의 시대’,‘경제인의 종말’,‘산업인의 미래’,‘새로운 사회’,‘경영의 실제’등 수많은 저서로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졌고 특히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분석
    함으로써 경영학의 태두라는 세계적 찬사와 함께 경제 사회 분야의 미래학자로서 명망이 드높았던 피터 드러커 교수가 한국을 찾았던 것은 1977년 10월 이었다.
    피터 드러커 교수의 한국에서의 일정은 명성에 걸맞게 한치의 빈틈도 없이 꽉 짜여져 있었다. 
    그만큼 그를 만나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연일 이어지는 강연회와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 그에게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하는 국내 기업인들의 면담 요청도 줄을 이었다. 
    그 중 몇 사람이나 실제 드러커 교수를 만날 수 있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정주영 회장은 오히려 드러커 교수 스스로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한국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현대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 교수.

    그해 10월 12일, 짧은 방한기간 중 짬을 내어 드러커 교수는 정주영 회장을 찾아왔다. 1915년생인 정주영 회장은 당시 62세 환갑을 갓 넘긴 나이였고 드러커 교수는 1909년생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환갑을 넘긴 한국 재계의 거목과 세계 경영학계의 거목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시간은 오후 2시를 갓 넘겼을 때였다.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이 창밖에 드리워진 가운데 세계적인 석학과 보통학교 출신의 걸출한 기업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계 경영학의 태두이신 교수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정 회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모두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통역을 하는 필자에게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정 회장도 달변이었지만, 드러커 교수 역시 그에 못지 않는 달변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정 회장의 말이 매우 빠른 반면 드러커 교수는 그에 비해 조금 느린 편이었다. “지금 정 회장께서 저를 경영학의 태두라고 불러주셨는데 참으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오히려 정 회장님을 뵈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선 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 성장 모델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전망했지만 한국처럼 오랜 식민지 피지배와 2차 대전과 6·25라는 두 개의 큰 전쟁을 치르고 극도의 빈곤과 열악한 성장 여건 하에서도 급성장한 독특한 모델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또 이런 전후의 황무지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를 선두에서 이끈 정주영 회장님과 같은 아주 독특하고 위대한 기업경영 사례에 대해서도 역시 연구를 못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정 회장님께서 발휘하신 기업가 정신이 제가 주창하고 가르쳐 온 핵심인데 이를 실천한 가장 극적인 정 회장님 사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저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앞 뒤 안 가리고 열심히 기업을 이끈 것 뿐이지요. 그게 한국 경제발전에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봐주시니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드러커 교수께서는 이미 경영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널리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경영학의 태두 아니십니까? 비단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경영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세계적으로 누구나 교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교수님의 그 놀라운 통찰력과 미래 예측에 놀랄 뿐입니다.” 당시에 이미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중동 진출,현대조선 설립,한국 최초의 독자적 자동차 모델 개발 등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정주영 회장과 세계 경제의 현안과 흐름에 탁견을 가지고 있는 드러커 교수와의 만남은 그 의미가 각별한 것이었다. 다시 드러커 교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제가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제가 정 회장님만큼 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면 아마 저도 경영학 교수 안 하고 바로 사업을 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제가 경영학 교수에 머물고 있는 것은 막상 그럴 배포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일개 이론가일 뿐입니다. 제가 한국경제와 정주영 회장님을 뵙고 깨닫게 된 것은 경영은 학식과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론과 머리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가의 정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기질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죠. 정 회장님은 그런 점에서 천성을 타고 난 분입니다.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 요소,난관이라는 안개로 가리워진 먼 앞의 사업 기회를 날카로운 예지력을 가지고 간파해 내고 이를 강력히 실천해 내는 리더십과 결행력을 정 회장님은 이론 이전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분입니다. 저는 한낱 이론가일 뿐이죠.” 이날 드러커 교수가 말한 경영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훗날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지식근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흔히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대학교수,학자 등의 이론적인 지식인과 실천적 지식인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칭찬인지 분석인지 모를 드러커 교수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정 회장은 바로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렇다면 드러커 교수님, 저처럼 기업을 하시고 싶다고 하셨는데,아예 우리 둘을 합치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머리와 저의 기질이 만난다면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배석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던 정 회장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교수님께서 우리 한국경제에 대해서 아직 잘 분석을 하지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곳곳을 잘 둘러보시고 좋은 충고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희들은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잔뜩 움츠린 개구리가 더 멀리 뛴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이제 교수님 같은 세계적 석학을 만나고 보니 지금이라도 우리 경제와 기업 현실을 새롭게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 안 그래도 한국 경제와 정 회장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볼 생각으로 한국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금껏 제가 접할 수 없었던 매우 독특한 경제성장 사례이기 때문에 제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드러커 교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더 할 얘기는 있지만 말을 아끼는 듯 망설이던 끝에 드러커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한국의 경제 성장은 정말 눈부실 정도입니다. 그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의 발전을 이룬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첫째는 바로 한국 경제가 너무 눈앞의 현실에 치중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당장의 현실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 드리자면 그것은 바로 한국의 노사관계입니다.” 앞서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한국에도 노동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한국의 기업가들에게 노동문제는 많은 경우 물건을 만들고 파는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드러커 교수는 일단 말을 꺼내자 자신의 견해를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고 솔직하게 피력했다.
    전태일의 일기장 내용을 특종 보도한 11월 22일자 주간조선

    “짧은 기간이나마 제가 한국 경제계를 둘러보니 한국의 노사관계는 거의 종속적인 정서와 이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자를 경영의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도 기업가도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까지 한국경제를 잘 이끌어왔지만 동반자로서의 노사관계를 새로 정립하지 않으면 어느 시점에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 하게 될지 모릅니다. 한국도 이제는 보다 성숙된 자본주의와 산업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앞서서 이 과정의 시련을 거친 선진국들의 사례를 참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무언가 정 회장으로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다 정 회장과 드러커 교수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정 회장과 드러커 교수가 만난 2년 뒤,한국은 노사문제가 단초가 된 소위‘YH사건’을 기폭제로 부마사태,10·26 궁정동의 총소리로 이어지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사문제의 진통은 그 후 신군부 통치하 5~6년 간의 억압기를 거쳐 1986년과 1987년에 이르러 다시 폭발적인 분출 사태로 이어졌다. 드러커 교수도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예지력을 새삼 되돌아 보게 한다.
    Premium Chosun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ltjw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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