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78) 퇴폐로 치닫는 서양사회

浮萍草 2014. 11. 4. 10:42
    15. 서양의 퇴폐상 세계를 식민지화하여 획득한 막대한 부를 쌓은 서양은 그만큼 행복해지기라도 했는가? 산업혁명광란 이후 급속도로 늘어 난 과학지식에 의하여 전기·동력기·교통수단 등이 더욱 풍부해 진 서양에서는 그런 기계들을 다룰 수 있는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므로 서양세계에서는 유사 이래로 최초의'국민교육'이 실시되었다. 동양,특히 한민족의 판도 내에서는 유사이래 모든 국민에게 대체로 교육이 개방되어 있어서 유능한 인재들은 시골 구석에서도 등용이 되어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데 비하여 서양에서의 교육이란 극히 소수의 권력지배층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만 특권적으로 시행되어 왔을 뿐이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국민들이 갑자기 예뻐 보여서 교육을 실시한 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복잡한 공업화과정을 이해시키고 비싼 공장 기계들을 고장 안 내고 다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즉 소수의 자본가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고자 고안해 낸 '노동자 교육'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교육이 진실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고 인간사회의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한 교육이 아닌 물질적 풍요 달성에 교육의 중점이 두어지게 되어서 더욱 더 황금만능적 사회로 치달았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선구적으로 인간의 가치에 대해 설파하였으나, 그것도 곧 개인주의 이기주의 나아가서는 국가이기주의에 연결되어 결국 국가간의 첨예한 대립만을 가중시켰다. 하여튼 서양세계에서는 인간의 이성보다는 욕심이 눈앞을 가려서, 어떠한 올바른 진리도 왜곡되어 변해 가는 경향이 강했다. 서양세계에서 시종 유일하게 교육을 중시해 온 집단은 유태인집단이었다. 전 세계의 유태화를 목표로 서기 2세기에 스스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분산했던 유태인들은 강인한 정신력을 견지하며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유태인 방식의 교과 과정에 의한 교육(토라 및 탈무드 위주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그들 간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명의 암흑시대였던 유럽지방의 중세시대에 있어서도 남다른 문자해득력과 우수한 지적(知的) 능력에 의한 뛰어난 판단력을 밑천으로 유럽 각 지역 에서 지적인 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다. 중세시대가 지나가고 근세에 들어서면서 대두된 절대왕정의 시기에도 그들은 각국 왕실에서 주요한 재정 및 학문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에게 부의 집중이 심해지면서부터 그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는 각 나라에서 추방당하여 혹은 동유럽으로 혹은'신 발견지'로 대거 이주해 가기도 했다. 그러나 각국의 중요한 재정은 거의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정치가들은 유태인을 경멸하면서도 유태인의 재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현상은 산업혁명 광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여왕 시절에 유태인 디즈레일리가 수상의 자리에 오르고 또한 유태인 금융업자인 로스 차일드등이 유럽지방의 금융사업을 대표하게 되는 등, 유태인의 세력이 표면화되어서 나타났다. 그들은 각국에 흩어져 있었으므로 각 나라의 법에 따라 각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가 소속된 국가를 위하여 서로 싸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유럽지방의 자본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한 유태인을 어떠한 정치지도자들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뚜렷한 국가적 소속 개념이 없는 유태인들이었으므로 그들 중에서는 '세계주의'를 외치는 사회운동가들이 특히 많이 배출되었는데 근대에 들어서 민족국가를 지향 하던 유럽지방의 각 국가들의 정책 방향과는 걸맞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배척당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독일 출신 유태인인 칼 마르크스와 프레드리히 엥겔스 등은 산업혁명 광란 이후의 공업위주 사회에서의 비참한 노동자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공산 주의를 제창하고 유물론을 정립하여 프를레타리아 대혁명을 주장했다. 그것은 유럽지방이 전 세계에서 재물을 긁어모았으면서도 일부 자본가들만이 그 재물들을 독차지하고 일반 유럽지방의 민중에 대해서는 극도로 인색하게 대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16. 마르크시즘의 대두 마르크스의 사상은 숱한 변형과 왜곡을 거치면서 현대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므로 다소간 면밀한 관찰을 요한다. 소위'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인 서기 1818년에 독일지방의 라인란트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마르크스는 그 자신이 유태인이었던 점과,계몽사상에 영향받은 부친 및,당시의 사회적 혼란상으로 인한 모순과 갈등 속에서 성장했다. 나폴레옹은 유태인들에게 크게 인기를 얻었었는데,왜냐하면 그가 구호로나마 전통타파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프랑스혁명의 가장 큰 수혜자들 중 하나였고 그 이후로 유럽사회의 전개에 새롭고 중요한 요인으로 급성장하였다.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으로 전전하면서 헤겔의 철학에 심취했던 마르크스는 곧 관념론으로 흐른 헤겔을 비판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오히려 같은 유태인 출신 급진주의자인 모세스(Moses Hess)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의 성향은 전통적 유태주의와 헤겔류 철학의 혼합으로 그 토대를 삼게 되었다. 그는 경제적 요소를 중시하여 사유재산제도를 악의 원천으로 생각했으며 임금노동자들을 해방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급진적인 라인신문을 발행하는 데 참여했다. 얼마 후 러시아에 대한 프러시아의 동맹정책을 비난했다가 신문이 폐간당하자 그는 귀족출신인 처와 함께 빠리로 이주했다. 그 당시부터 빠리는 전 유럽지방 망명객들의 소굴이 되다시피 했다. 숱한 사상가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하던 빠리에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사회사상에 접하게 된 그는 자신이 유태인인 것도 잊은 듯이 당시의 유명한 유태인 하이네와 디즈레일리 등에 대해 빈정거리기도 했고,"유태인은 종교적이거나 종족적 존재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존재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빠리에서 평생의 친구인 부유한 방직업자 엥겔스를 만나기도 했고 러시아의 혁명가 바쿠닌 등을 만나기도 했으나,바쿠닌은 모든 질서를 파괴하려는 무자비한 성향을 지녔으므로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프루동의 사상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는데 그의 사상의 요점은"상호간 경쟁보다도 협조가 필요하며,교화(敎化)에 의하여 인간성을 개화해야 하고 사유재산은 제한적으로만 허용해야 한다."는 어중간한 것이었으며 일종의 농민중심의 사회주의였다. 그의 주장은 대체로 사람들의 상식에 호소할 수 있는 광범위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중심이 된'공업적 사회주의'를 주장함으로써 프루동을 전면적으로 반대했고 그 비판이론은'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업사회를 인류의 가장 진보된 단계로 파악했던 것인데 그러한 견해가 옳다고 볼만한 증거는 15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여전히 확실치 않다. 당시의 유럽세계를 풍미한 또 하나의 견해는 다윈의 진화론이었는데, 마르크스도 또한 그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단순한 동물적 생존경쟁만을 인간생존의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이 보다 더 인간적임을 주장하고 싶었던 그는, "생산과 분배를 계획적으로 하는 사회의식만이 인간사회를 동물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윈을 비판하기도 했다 생산물의 증가에 의해 그 분배를 둘러 싸고 대립하는 계급이 피차간에 소외를 초래하며,그 소외는 상품이나 가축처럼 취급되고 압박받는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를 파괴할 때 비로소 끝난다는 증명이 불가능한 애매한 이론을 창출해 낸 그는 한 편으로는'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던 폭력도 극력 반대하는 보다 더 모호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인간의 행위는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더욱 애매모호하게 흐려놓기도 했다. 빠리에서 활동할 당시의 그의 나이가 30세도 안되는 미숙한 정신적 상태였음을 감안하더라도,어지간히 뒤죽박죽된 이론들이 생각나는 대로 마구 튀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원시적 공동체 생활에 많은 매력을 느꼈던 듯한 마르크스였지만, 인류 역사는 한쪽 방향으로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변하기 위하여, "역사는 결코 후퇴하는 법이 없고 윤회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그 역시 증거 불충분한 주장을 한 가지 더 첨가하기도 했다. 당시의 미약했던 고고학적·인류학적 연구 성과는 차치하더라도 마치 스스로 신(神)과도 같은 독단을 내리려 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27세 되던 서기 1845년에 빠리에서 추방당하고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주한 그는 3년 후인 서기 1848년에 여러 동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소위 '공산당선언'을 작성 했다. 공산당선언은,"하나의 유령이 오늘날 유럽을 휩쓸고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 유럽의 모든 권력들이 이 악령을 추방하기 위해 연합하였다…"로 시작하는데 마르크스 자신이 공산주의를 '악령'에 비유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기조차 하다. 그 유령때문인지는 몰라도 벨기에에서도 다시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빠리로 되돌아갔는데 그 곳에서는 공화파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고 프랑스왕 루이 필립이 망명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얼마 후에 다시 쾰른으로 이주했고 신(新)라인신문을 창간하여 러시아정책에 반대하고 범(汎)독일주의에 유사한 정책을 지지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고려에 인색했던 그는,소국(小國)들을 사회적·경제적 진보에 방해되는 존재로 간주하고,프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이 덴마크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을 침략한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묘한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도 공격했으므로 그 후에 프러시아에서 다시 추방되어 빠리로 돌아갔다가 스위스에 잠시 이주한 후 다시 빠리로 되돌아갔다. 마치 떠돌이 집시를 연상케하는 그와 같은 숱한 방랑생활을 거친 그가 31세되던 서기 1849년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기묘하게도 그 자신이 타도해야만 할 악의 원천으로 비난해 마지않던 자본주의자들의 본향인 영국섬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그가 그동안 살아 왔던 햇수보다 더 오랜 34년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무런 생계수단이 없던 그가 온통 '자본주의 악마들'로 둘러싸인 런던에서 34년간이나 굶어 죽지도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자본가이자 방직공장 경영자 였던 친구 엥겔스의 덕분이었다. 영국해적들의 인도지방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가자 그는, "인도는 어쨌든 강대국에 지배당할 운명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함으로써 영국은 무의식적으로 인도에서의 사회혁명 발생을 위한 도구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당시 인도지방 민중사이에서 고양되고 있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 세력의 성장을 과소 평가하는 단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유럽지방을 휩쓸고 있던 자본주의적 체제로서의'국가주의(Nationalism)'와, 아시아에서 발전해 온 문명대국들의 '민족주의(Racialism)'를 그 당시의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혼동하고 있었음이 명백했던 것으로 보인다. 런던에 정착한지 15년 후인 서기 1864년에 그는 유럽지방의 제1차'인터내셔날'을 결성함으로써 비로소 일다운 일에 착수하였으나 그의 독재적인 운영방식은 동업자 들과도 대립하게 되는 등 계속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서도 보·불전쟁으로 빠리가 포위되고 서기 1871년에 빠리꼼뮨이 성립되어 빠리민중이 프랑스정부군에 대하여 가망성없는 극한 투쟁을 벌리자 크게 감명 받은 그는"빠리꼼뮨 사건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통을 세운 업적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인식은 훗날 그의 추종자인 레닌에게도 이어져 갔다. 수십년의 뒤죽박죽 인생을 폐종양 등 각종 난치병을 앓는 가운데 마감하게 된 그는, "내가 다시 태어나면 결코 마르크스주의자만은 되지 않겠다."는 순진스러운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가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자본론' 원고들을 총정리하여 출판해 낸 엥겔스는, "마르크스주의는 독일시대의 이상주의에 뿌리박고 프랑스시대의 정치이론을 거쳐서 영국시대의 경제학으로 성장해 온‥" 이라고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그의 사후 마르크스의 예상과는 반대로 자본론이 가장 많이 읽힌 러시아 지방에서는 마르크스 자신도 되기를 원치 않았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려는 자들이, 마르크스가 살아갔던 그 어느 곳보다도 드세게 설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 후진국인 러시아에 '공산주의라는 악령'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식민지확보에 그 관건이 달려있는 대량생산방식의 자본주의 확립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면서도 식민지 피지배국가의 노동자·농민 그리고 지구의 한정된 자원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족했다. 자본주의적 생산품들을 팔아서 국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상품시장이 되어 줄 식민지나 반식민지의 존재가 필요하고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다 잘 살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공장마다에서 쏟아져 나올 상품들에 대한 판매대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모두가 자본주의적으로 다른 나라들로부터 잉여가치를 획득하면서 국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란 사실상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딘가에 무한정 착취 당하면서 상품시장이 되어 줄 수 있는 식민지가 필요한 그러한 자본주의를 거쳐서야 달성된다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사회라는 것은 처음부터 유럽의 노동자들만을 '만국의 노동자'로 정하고 출발한 또 하나의 오만불손한 제국주의의 일종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속적인 고도생산력을 위해서는 지구의 자원이 끝없이 파헤쳐져서 낭비됨으로써 인류문명의 존속자체가 어려워질 것이 뻔한 일이었고 이미 그 당시에도 공장의 매연과 폐수 등에 의해서 인간 생존환경에 대한 오염과 파괴가 성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많은 생산이 노동자들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는 서양인 다운 물질적 가치만을 높이 숭상했던 것은 그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 참된 문명'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 간에 유물사상에 기본을 두고 오로지 물질적 가치만을 지상(至上)으로 숭배하는 물질만능주의자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가? 마치 그리이스신화 속의 마이다스왕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모조리 황금을 만들기 위하여 지구의 자원을 실컷 낭비하고 다 털어 먹고 난 다음에는,공해로 찌들은 황폐한 지구위에서 그 황금이라도 먹고 살아 가겠다는 말인가? 더구나 제국주의적 식민지 수탈이라는 악의 논리에 바탕을 둔 비정상적인 질서위에서만 존재 가능한 탐욕스러운 자본주의를 모든 나라가 기본정책으로 한다면 도대체 어느 나라가 즐거이 경제적 식민지가 되어 수탈당하려 할 것이며 이미 식민지가 되려는 국가가 없다면 도대체 어느 나라가 식민지를 뜯어 먹고 살찌는 제국주의국가가 될 것인가? 하여튼 그 어떤 서양식 유물론에 근거를 둔 논리도 참된 인류 문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무식의 절정에서 나온 소치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더우기 그러한 기계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은 필연적으로 '인류 문명'이 아닌 '기계류 문명'이 될 수밖에 없으니 기형적인 서양식 발전이론에 의하여 전개되는 모든 사상(事象)은 그 기초가 잘못되었음으로 인하여 더욱 더 기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만 되는 것이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프랑스·영국·프러시아·오스트리아의 네 나라가 중심이 되어 계속 패권다툼에 몰두했다. 특히 프랑스와 프러시아는 나폴레옹전쟁 이후에 앙숙이 되어 약간의 불화만 생겨도 곧 전쟁으로 치달았다. 영국은 바다건너 있었고 해상에서는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므로,유럽반도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는 대신 자국생산품을 전쟁에 바쁜 유럽지방 각 나라에 적절하게 팔아 먹었으므로 점점 더 국력이 막강해졌다. 뒤늦게 식민지 쟁탈에 뛰어든 프러시아에게 남아 있던 식민지 획득방법은,지구 곳곳마다 널린 많은 식민지들의 본국인 프랑스나 영국섬 등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식민지를 빼앗는 방법뿐이었다. 러시아는 그 나름대로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수법을 뺨치는 악랄한 동침정책(東侵政策)을 추진하여 황량한 아시아대륙 북반부를 거의 다 점령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북극에 가까운 한랭한 기후로 인하여 모든 생산력이 시원치 않았으므로 보다 더 남쪽의 따뜻하고 풍요로운 식민지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한 러시아의 식민지정책은 영국섬과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게 되었고, 미합중국·영국섬과 조선에서 충돌하게 되었으며, 대청국에서는 모든 식민제국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유럽지방의 야만국가들은 그들의 도박판에 전 세계를 걸고서 새로운 전국시대로 돌입해 들어갔다. 유럽지방의 과학기술 진전은 참인류문명의 일대 퇴보를 초래했으나 무기만은 보다 정교해졌다. 잘만 사용하면 진실로 인류 문명과 인류복지에 기여할 수도 있을 그러한 기술적 발달도 야만인들의 수중에서는 인류파멸·인간성 말살·문명파괴의 흉기로 변해 버리고만 것이다. 그러한 비뚤어진 '문명발달'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그와 같은 세계적인 기현상은 우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범세계적인 음모조직에 의하여 꾸준히 추진되고 있다는 의견이 심심치않게 제기되어 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 세계적인 경제적 지배를 성취함으로써 모든 국가들의 정치적 지배까지도 가능하게 한다는 구상으로서 알려졌으며,그것은 곧 특정한 민족집단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국가를 만든다는 '세계정복계획'이 있는 것으로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본 궤도에 오른 이래 부국강병을 추진한 이들 서구사회의 돈줄을 누가 쥐고 흔들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 보는 것이 그러한 소문의 진상을 밝히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진위여부야 어떻든 유럽지방에서는 유태인이 가장 유력한 '음모자후보'쯤으로 여겨졌다. 유태인들이 유럽세계에서 금융업이나 기타 많은 사업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유태인 음모설'은 별 저항감없이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한 경향은 나중에 극단적인 반유태주의자인 히틀러와 나치스에 의하여 유태인 대학살과 유태인 대숙청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세계지배의 음모를 꾸민 것이 유태인이든 게르만이든 앵글로색슨이든 간에,유럽세계의 정신적 파탄은 어차피 어느 집단이든 간에 그러한 속셈을 꿈 꿀 정도로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유태인이라고 세계정복이나 세계지배를 꿈꾸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인류의 공존·공영이 아닌 정복이니 지배니 하는 야만적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부터가 반문명적이고 악마적인 발상이므로 인류의 참문명세계를 원하는 사람 들은 그러한 더러운 퇴행적 음모를 꾸미는 자가 그 누구이든 인류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구태여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유럽지방의 각 야만국은 전 세계에 자기들의 지배력을 확대하려고 눈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보다 정교하고 보다 살상력이 우수한 신무기들을 '개발'해 내는 데 앞장선 것은 다름아닌 '권위있는 과학자'들이었다. 인류의 참다운 발전이 아니라 야만화의 마지막 단계인 자멸(自滅)의 구렁텅이로 달려가는 데'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그와 같이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자'들의 존재는, 인류사회의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일 수밖에 없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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