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新줌마병법

고추보다 맵네예, 우리네 人生

浮萍草 2014. 11. 23. 12:38
    9월에 시작 어머니 고추타령 '껍질 광택 나는 두물이 최고'
    김장날은 시끌벅적 잔칫날… 아들·며느리 모여 김치 치대네
    오래 묵혀둬 깊은 맛 내려면 김치도 사람처럼 담백해야죠
    김윤덕 문화부 차장
    '지봉유설'의 이수광은'왜겨자''성호사설'의 이익은'번초''산림경제'의 홍만선은'남초'라 불렀지만 조선의 여인들에게 고추는'애초''사랑초' 였다. #
    인순씨의 고추 타령은 가을 문턱을 넘기가 무섭게 시작되었다. "5일장에 겁나게 좋은 고추가 나왔는디 쬐깨 사서 보낼끄나? 햇고추는 그저 두물에 수확한 것이 최고인디, 요때 지나면 시커머니 맛도 맹탕인 끝물고추가 판을 친당께. 고추가 거그서 거기 아니냐고잉? 사내라고 다 거그서 거기더냐 이 맹추야? 껍질이 도탑고 아삭허니 첫맛은 맵고 뒷맛은 달짝지근혀야 고것이 1등급이제. 때깔이 아무리 고와도 껍질이 얇으면 파이랑께. 그라고 똑같은 종자라도 어떻게 말렸능가에 따라 고춧가루 맛이 하늘땅 차이니라.
    물 맑고 공기 좋은 벽촌에서 햇볕 짱짱하게 쪼여설라믄 바짝 말려야 쓰는디 새랑 곤충이 쪼아 먹지 않게 당번을 서야 하고 중간에 소낙비라도 맞으면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헌께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여 그래서 고추는 사랑이고 정성이라 안 허냐. 앞뒤로 잘 마른 고추는 껍질이 말가니 광택이 나고 흔들면 고추씨가 기분좋게 달각거리는디 그런 고추를 만났응께 1년 365일이 다 내 것이 된 양 가슴이 뻐끈하다 이거여. 한 근에 만 원이라 거시기헌디 고추는 제값 주고 정직하게 사야 허는 법. 배추김치,갓김치 맹키로 1년을 두고 먹을 양식에 아무 고추나 썼다간 그해 음식농사는 망해분다. 김치뿐이냐 꼬돌빼기를 담가도 코다리찜을 쪄도 고춧가루가 맵고 칼칼해야 본맛이 나지라. 두고 봐라. 까다로운 느희 시어머니도 좋아라 헐 것잉께. 생각 있으면 싸게싸게 연통혀라잉. 버스 지난 담에 손 들지 말고. 방앗간서 고춧가루 빻는 비용 택배비는 별도인 거 알제? 혈육간일수록 계산은 깔끔해야 한당께." #
    미자씨는 시중에 파는 고춧가루가 영 마뜩지 않아 4형제 출가시킨 뒤 남편과 함께 집 앞 텃밭에 고추며 배추, 무 등속을 심어 키우기 시작했다. "고추나무 키우기가 젤로 어렵지유. 파종하고 첫물 수확할 때꺼정 장마 걱정 병충해 걱정에 두 발 뻗고 잔 적이 없슈. 3년 만에 탱글탱글 잘 빠진 선홍색 고추를 얻고는 마흔 넘어 늦둥이 본 늙은 색시모냥 눈물을 다 흘렸다니께유. 붉은 치마를 두른 텃밭이 을매나 이쁘던지.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이나 다름없슈. 도시 사는 아들 며느리 죄다 불러모아 남편이 한 달 걸려 만든 비닐하우스 안에서 1박2일로 김장을 담그지유. 며늘애들이야 귀찮아 똑 죽겄지만 고기 주는 대신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랬다고 당장은 번잡해도 시에미 죽으면 그때 배워놓길 참으로 잘했다 안그러겄슈? 배추랑 무는 남자덜이 뽑아 손질하구유,여자덜은 배추 절이고 양념 만들어 온몸이 고춧물 범벅이 되도록 치대지유. 가마솥에 펄펄 끓인 선짓국에 흰밥 말아 생김치 찢어 얹어 먹는 맛이 꿀맛 아니면 뭐겄슈. 맛의 비결이유? 우리 집은 양념을 장황하게 안 해유. 젓갈도 새우젓 한 가지로만 하지유. 그래야 익을수록 시원해유. 당장 먹기로는 양념 많고 때깔 좋은 김치가 맛나지만 오래 묵혀두고 깊은 맛 음미할 요량이면 소박하고 담백한 것이 최고지유. 어디 김치뿐이겄슈? 사람도 마음 밭이랑이 단촐하고 가지런해야 볼수록 맛나고 싫증이 안 나지유. 안 그려유?"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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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고개 넘어가도 또 한 고개 남았네. 넘어가도 넘어가도 끝이 없는 고갯길. 세상살이가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 칠십도 안 돼 치매로 드러누운 남편 탓에'지지리 복도 없다'푸념하는 영옥씨 입에선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래가 흘렀다. "고추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 견뎌내며 뒷바라지했더니 정년을 하고도 마누라는 본둥만둥 친구들이랑 사방천지를 싸돌아다님시롱 철이 안 들데예. 내도 석양이혼 해볼라꼬 굳게 맴을 먹었는데 아 느닷없이 이 냥반이 맛이 갔다 아입니꺼. 그래도 아들 손자는 알아보더니 이젠 40년 부대끼고 산 마누라도 멀뚱멀뚱 바라보니 기가 차는기라. 한번은 병원밥을 냅다 걷어차 난리가 났어예. 철딱서니 얼라마냥 어르고 달래도 입을 앙다물고 밥을 안묵는기라. 바닥에 엎질러진 허여멀건한 백김치를 보니 퍼뜩 떠오르는 게 있데예. 얼른 집으로 달려가 애호박 썰어 담북장 끓이고 열무김치에 고추장 듬뿍 넣어 찬밥에 썩썩 비벼설랑 양푼이째 들고 병원으로 뛰었다 아인교. 한 숟갈 입에 떠넣어주었더니 하이고 이 냥반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는 고개를 끄떡이메 눈물을 흘립디다. 한여름 입맛 없을 때 자슥들이랑 오종종 둘러앉아 비벼 묵던 우리집 별미지예. '김치는 전라도가 최고다 캐싸도 내 입엔 니가 멸치젓 듬뿍 넣어 짭쪼롬하게 담근 김치가 젤이다'카더니 저리 허망하게 넋이 나갈 줄 누가 알았능교.백년이고 천년이고 살 줄 알았는데 그 좋은 날들 다 떠나고 지나 내나 모두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고추보다 맵네예 우리네 인생."
    Premium Chosun ☜        김윤덕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차장 sion@chosun.c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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