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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국주의 침략죄악사

浮萍草 2014. 10. 28. 11:47
    14. 제국주의의 침략 죄악사 양지방의 역사는 근대에 들어올수록 인류의 참다운 발전과는 거리가 먼 악마적인 물질숭배 주의로 나아갔으나, 명분만은 그럴듯하게 '과학과 기술발전을 통한 인류문명의 대발전'을 부르짖었다. 마치 서양지방이 없었으면 인류가 들짐승이나 원숭이의 한 종류로 변해 버리기라도 했을 것처럼 설쳐대어 온 것이다. 방직기와 증기기관의 개발로 본 궤도에 들어선 유럽지방의 산업혁명광란은 여러 의미에서 인류역사의 한 구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영국섬에서 시작된 대규모 공장건설과 그에 따른 제품의 대량생산은 필연적으로 생산과잉을 초래하여 자기나라 시장 에서는 더 이상 팔아먹기 힘들게 되자 더욱 많은 판매이익을 거두어 들이기 위한 자본가들의 끝없는 욕심은 더욱 더 많은 판매시장을 요구하게 되었다. 물건이란 원래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 쓰면 되는 것이고 질적인 차이가 나더라도 웬만큼 쓸만 하면 아껴서 씀으로써 소비를 최소화하여,불필요한 지구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손만대 사용할 자원을 계속 보존해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건 생산을 '필요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황금을 보다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게 된 결과,공업제품이 아닌 수공예품이나 가내생산품은 모두 '원시적','야만적','구시대적'인 미련하고도,실용성없는 물건들인 것처럼 왜곡선전되었다. 인간의 쓸 데 없는 허영심이나 재물욕을 부채질하는 방법이 전세계에 만연되어 가면서 인간성의 범세계적인 타락 시대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러한 공장제 대규모 생산방식의 급속한 팽창은 마침내 가내공업자들을 파탄시켰고 생계가 막연해진 그들은 우선 먹고 사는 일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창조적인 전제품(全製品) 생산이 아닌 제품의 일부분만을 기계적으로 만지고 가려내는 단순한 작업에 종사하기 위해 공장에 취업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열악한 작업조건하에서 새벽부터 늦저녁까지 별 의미가 없는 단순작업에 종사해야 했으므로 자연히 노동자들은 많은 산업재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최대의 수익을 올리려고 더욱 싼 임금노동자들을 구했고 나중에는 열살 전후의 어린이들이나 여자노동자들을 더 많이 부려먹게 되는 기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들 아녀자들은 건장한 청년들도 해내기 힘든 중노동이나 위험작업,탄광노동 등에서 혹사당해 쓰러져 가면서도,남성노동자들보다 절반 정도의 임금과 해고위협을 항상 감수하고 감지덕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현상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와 독일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그로 인한 무산자(無産者 ; 프를레타리아트) 계층의 불만은 사회적인 불안요인으로 크게 확대되어 갔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는 큰 격차가 벌어지고 사회적 불평등 요소들이 증폭되어 가는 가운데 그러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몇가지 시도가 나타났다. 유럽사회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히 번져 나갔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이 너나 할 것 없이 실시되어, 시장확대를 위한 유럽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 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이미 더 이상 나눠 가질 수도 없이 거의 다 분할되어 있었으므로, 이윽고 유럽제국주의자들은 마지막으로 문명대국인 조선과 대청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시도하게 되었다. 유럽지방에서 가장 낙후되었던 러시아는 대륙침략 정책을 채택하여 일찌기 우랄산맥을 넘어 황량한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동진했는데 저들은 단기 4000년경(서기 17세기 말엽경)을 전후해서 흑룡강 상류인 몽골지방과 만주의 북부지방까지 도달했다. 이 무지막지한 침략자들은 대청국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흑룡강 중류지역까지 쳐들어 왔으나 조선의 강력한 원정군에 의해 격파당해서 더 이상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넘볼 수 없었다. 러시아는 오호츠크해쪽으로 북상했다가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면서 변방의 땅과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저들의 대포 아래 굴종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흑룡강 북쪽과 연해주 지방의 일부를 강탈한 러시아침략자들은 만주지방과 조선 및 대청국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러한 러시아의 식민지정책에 대하여 유럽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은 공동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인도주의자들이라서가 아니라 저들의 몫이 되어야 할 식민지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까봐 조바심이 난 까닭이었다. 서양의 제국주의 마수는 자기들의 내부적 불안요인을 바깥으로 배출시키고자 기승을 부렸다. 그리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 서양사회에서 별 볼 일 없는 쓰레기같은 범법자들,온갖 종류의 욕심꾸러기들이 해적선을 타고 활개치고 다니는 한심한 작태가 벌어진 것이다. 유럽지방의 정상배들은 해외에서 약탈무역을 통해 거두어 들인 막대한 부를 가난했던 자들에게도 약간씩 나누어줌으로써 내부의 불만을 다소 누그러 뜨리는 한 편, 그것 으로써 저들의 해적행위를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전세계를 문명화시키기 위한 백인의 부담'이라는 엉뚱하고도 해괴한 논리의 전개로 나타났다. 유럽인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던 '문명화','서구화'를 총·칼로 강요하는 날강도 행위는 매우 점잖은 문명인들의 '인류를 위한 희생적 행위' 정도로 꾸며졌다. 조선인들은 처음부터 그런 물신숭배주의자들을 제대로 된 인간들로 보지 않았으므로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으나 대청국은 지리적인 관계로 서양인들과 상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청국에서는 서양으로부터 공장제품들을 수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반면에 서양의 야만인들은 청나라의 우수한 수공예품이나 홍차·농산물 등을 필요로 했으므로 서양측에서 오히려 적자무역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서양의 여러 야만국들은 그런 현상이'대청국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시장을 개방시켜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트집잡으면서 엉뚱한 내정간섭을 했고,군함외교 라는 깡패적 수법으로 대청국정부를 위협하여 내륙시장을 확보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청국인들은 날강도같은 서양인이나 천박한 서양의 공장제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때문에 기대한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대청국에 대하여 각종 이권을 요구했는데, 광산 채굴권·철도 부설권·어업권·금융행위권 등등 한가지를 수락하면 열가지를 더 요구했다. 한편 영국인들은 대청국에서 생산되는 생사·도자기·차 등을 좋아하여 그 수입량이 급증했다. 처음에는 동인도회사에서 차 수입대금으로 국제통화였던 멕시코은화를 대청국에 지불하는 형식을 취했는데,멕시코가 독립하자 멕시코 정부는 은화의 반출을 억제하여 영국섬의 멕시코은화 보유가 점점 줄어 들게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궁여지책으로 아편 밀무역을 눈감아 주고 거기서 얻는 은을 차구입에 이용했다. 그러나 영국섬의 상인들이 동인도회사에서 독점하고 있던 무역에 참여하게 되자,동인도회사는 아편 밀무역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다른 상인들도 아편 밀무역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공장제품은 잘 안 팔리는 대신 마약인 아편은 태평스런 대청국 국민들 사이에 독버섯처럼 파고들기 시작했다. 주로 인도지방에서 생산된 그 막대한 아편들은 돈벌이에 미친 영국섬의 제국주의 악마들에 의하여 수많은 대청국 국민들을 폐인으로 만들어 갔고 그로 인해 전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는 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이리하여 대청국 천지는 아편쟁이들의 소굴이 되다시피했으며,심지어는 조정대신이나 황실에서까지도 아편이 상용되다시피 하였다. 그에 따라서 인간성을 말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국력을 쇠약하게 만드는 극악한 마약에 대하여 분노한 정의로운 사람들은 아편장사를 반대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라의 앞날을 염려한 대청국 황제도 마침내 영단을 내려 아편 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 도광제(道光帝)의 엄명을 받은 흠차대신(전권대신) 임칙서는 마침내 악마들과의 싸움을 선언하고 홍콩부두에 쌓여 있던 아편들을 도로 싣고 가도록 영국인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영국인들은 이를 거부했으므로, 임칙서는 아편들을 모조리 몰수하여 태우고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청국측의 정당한 조치에 대하여 영국섬 당국은 즉각적으로 엄청난 보상과 아편무역 '자유화'를 주장하고 나왔으므로,문명과 악마적 야만과의 싸움인 아편 전쟁은 그 막을 열었다. 임칙서는 단호한 결의로 아편의 유입을 막는 한편 조금도 야만적인 제국주의자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수비를 튼튼히 했으므로 영국섬해적도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했다. 임칙서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대청국 민중은 야만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스스로의 방위력으로 격파했으므로 영국섬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영국섬 해적들은 홍콩을 공격하는 대신 북쪽 절강지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쳐들어 갔는데, 절강은 청나라 도읍인 북경에 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대청국측은 곧 반격을 시도했으나 절강지방에서는 야만족의 공격에 대한 준비가 없었으므로 대청국측이 패하고 말았다. 국가적인 존망의 기로에 처한 대청국 조정은 하는 수 없이 영국섬 해적들이 제시한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일단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전쟁배상금과 막대한 이권 및 아편판매 자유화 등의 조건들을 들어 준 결과 대청국의 국력과 위신은 급격히 저하되었고, 유럽지방의 여러 강도국들은 노골적으로 대청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반면에 대청국 민중의 부담은 이중,삼중으로 가중되어 가고 아편이 더욱 만연되었으며,허약한 중앙정부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비적들이 준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청국은 급속히 지옥같은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되어 갔다. 그런 가증스런 유럽지방의 야만인들이 소위 선교사들을 곳곳에 보내어'문화적 식민지'라는 식민지 지배 최후단계의 작업까지 마무리지으려 했으므로, 대청국과 조선의 문명인들은 선교사들을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 더우기 백인 우월의식에 젖은 새파랗게 젊은 선교사들이 동양인이라면 노인에 대해서까지 거만하게 대하기 일쑤였으므로 유구한 문명사회인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미풍 양속에도 철저히 위배되었다. 또한 실제로 선교사들 중에는 자기 나라에 필요하다면 정보수집이나 간첩활동을 은연중에 하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서양오랑캐들에 대한 불만은 그러한 선교사들의 작태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때로는 그런 자들과 직접적으로 싸움이 벌어지는 수도 있었는데 서양오랑캐들은 그런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많은 이권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도대체가 인간사회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도 모르는 야만인들이 문명인들에게 무엇을 '선교'하겠다는 건지,적어도 대청국과 조선의 문명인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선교사나 서양오랑캐들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반감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도 신약(新約)에 기록된 크리스트의 훌륭한 가르침만은 대청국의 남쪽지방을 중심으로 광범위 하게 퍼져 갔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이라는 것도 동양사회에서는 이미 상식화되어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으나,그 중에서도 '지상천국'을 세운다는 생각만큼은 많은 호감을 얻게 되었다. 동아시아 사회에는 대동사회(大同社會)라고 하는 실제적인 지상천국의 관념이 수천년간 존재해 왔는데,말세적인 야만족들의 침략을 당하여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지상천국을 세우려는 욕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의 선비와 비슷한 성격인 대청국의 향신(鄕神)계급 중에서 홍수전(洪秀全)이라는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그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수십일간 열병을 앓는 동안에 천국의 환상을 경험한 그는 자신이'상제의 아들이요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선언하고,흡사 마호멧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주위에서부터 교세를 펴 나가기 시작했다, 피폐해진 대청국의 민중은 차츰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마침내 광동지방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청국 조정에서는 광신적인 종교적 세력의 팽창을 억누르려고 하였으므로 홍수전 일당은 조정에 대항하여 군사조직화 되었다. 거기에다가 대청국의 남쪽지방에 많은 한족(漢族) 민중은 그 기회에 대청국을 무너뜨리고자 했고 만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족들 중심의 세상을 만들려는 목적도 가미 되어 적극적인 반정부투쟁을 전개했다.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는 점차 폭발하여 대대적인 반외세·반정부운동으로 급격히 확대되어 갔다. 홍수전의 목적은 '신약'의 진실한 내용에 근거하여 기독교적인'지상천국'인 태평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청국의 남부지방에서 시작하여 중부지방까지 석권해 간 태평천국의 세력이 드디어 북경까지 위협하기에 이르자,자체적으로 진압하기가 불가능해진 대청국 조정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제국주의 오랑캐들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분히 반외세적인 태평천국 운동이 자기들에게 불리하였으므로 본격적인 침략의 구실만 찾고 있던 서양야만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병력을 투입하여 학살로 일관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참다운 기독교적 천국'을 만들겠다는 동양인들의 태평천국을 탄압하여 멸망시킨 사실은 기독교가 서양 오랑캐들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하는 것이었다. 태평천국은 외국군대의 개입과 더불어 자체 내부의 권력투쟁까지 생기면서 그 본래의 순수한 종교적 목적의식마저 잃게 된 끝에 멸망해 갔으며 대청국의 절반을 휩쓸었던 그 엄청난 동란으로 인하여 학살당하거나 전사한 민중의 숫자는 셀 수도 없었다. 더우기 전쟁이 끝나자 전쟁에 개입했던 나라들마다 더욱 더 많은 이권을 대청국측에 요구하게 되어 대청국은 껍데기만 남은 유명무실한 반식민지로 전락해 갔다. 이러한 서양 오랑캐들의 침략에 대하여 동해 바깥의 섬나라 일본은 어떻게 대응하였던가. 일본섬에는 이미 일찍부터 서양인들이 드나들었는데 이미 임진왜란때에도 서양선교사가 왜구침략자들을 따라서 조선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다. 도꾸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기독교를 추방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서양세력이 침투하는 것을 막고 있었으나 나가사끼 등 몇몇 항구에서는 서양해적들과 소량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미 마르코폴로가 원나라 시대에 쓴 동방견문록에'황금의 지팡그'로 묘사했던 일본섬은 오래 전부터 서양의 욕심장이들이 탐내던 곳이었으나,유럽지방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본섬에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본섬의 통치자들은 임진왜란이후 동아시아에서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과 대청국에 대하여 겉으로나마 화해하는 정책을 썼다. 특히 조선으로부터는 당대 세계의 최선진적인 문물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으므로 조선에서는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어 일본섬을 교화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라서 점차 문명한 조선으로부터 교화를 받아 들인 일본섬 주민들은 자연히 조선을 '스승의 나라'로 부르게 되었다. 미주 원주민 인디언들을 태평양까지 밀어붙이고,마침내 하와이를 거쳐 일본열도에 도달한 미합중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상품시장을 확보하려고 일본섬의 항구 들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문명국의 하나로 자부하며 문명세계로 발전해 가고 있던 막부치하의 일본이 그에 응하지 않았으므로,미합중국 함대의 사령관 페리는 큰 군함들을 도읍지인 에도(江戶)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함포사격으로 위협을 가하였다. 막부에서는 두 가지 의견으로 갈려서, 한 쪽에서는 일전불사를 외치고 한 쪽에서는 서양오랑캐(양이)들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으니 우선 개방하자는 의견을 내 세웠다. 그리고 결국은 서양인들의 무력에 대항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되어 항구들을 개방하기로 했다. 그 결과 왜열도에는 미합중국의 상품들뿐만 아니라 영국의 값싼 공산품들도 쏟아져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단시일 내에 일본심의 경제는 곧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중경제생활을 극도로 억제해 온 막부치하의 일본섬은 이로 인하여 가내수공업자들이 순식간에 몰락했고 국가의 금이 무절제하게 서양으로 유출되어 나갔으므로 민중의 부담은 가속도로 늘어나는 반면에 불만에 가득 찬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서는 더욱 더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대청국의 식민지화 과정이 일본섬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아편을 일본섬에 대한 주요 수출품목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았던 사실이 대청국보다는 약간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는 있다. 서양상품의 침투에 대하여 일본섬의 관리들은 자기들도 서양식 공장생산방식을 도입하여 서양상품에 못지 않은 공장제품을 만들어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심각한 기술력의 차이로 인하여 도저히 상품의 질이 비교가 되지 않았으므로 국부(國富)의 유출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서양인들에 의해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음을 실감하게 된 일본섬의 관료 및 지식층들은,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일본섬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식민지를 스스로 만드는 데 있다고 판단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과 대청국에 대하여 우호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막부를 대신해 줄 강력한 국가권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들은 마침내 명치유신을 일으켜 막부를 해체하고 형식적으로 존재해 온 왕의 권력을 대폭 강화하여 강력한 국가적 구심체를 만듦으로써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조선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진정한 문명을 약간 알기 시작할 무렵에 들이 닥친 야만적인 서양의 위협에 의하여 일본은 잠시 잠들어 있던 '야성을 되찾고' 퇴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민중에 대한 수탈을 용이하게 하려고 수세기동안 우민화정책을 써 왔던 막부에 대신하여 들어선 군국주의 일본섬의 정책은 곧바로 '황민화(皇民化)'교육으로 이어졌다. 아무 것도 변변히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교육이랍시고 민중의 텅 빈 머릿속으로 들어간 게 소위 황민화 일변도의 교육이었으니,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황민화하는 방법 뿐으로 되어 버린 무지한 일본섬의 민중은, 어떠한 불합리한 명령이나 정책이라도 '왕과 국가를 위하여'즐거이 따르는 대규모 꼭둑각시 집단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전 세계는 서양의 여러 제국주의 야만국들이 다 나누어 먹은 뒤였으므로,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유문명 국가인 조선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야욕을 채우기에 둘도 없는 좋은 목표물로 보였다. 일본섬의 스승이었던 조선은 그 때까지도 유구한 문명대국답게 대청국이나 일본섬보다도 더욱 강력한 자세로 서양제국주의 세력을 단호히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성급한 왜족들은 어제까지 자신들에게 참된 문명을 전해준 스승의 나라인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정한론(征韓論)'을 부르짖어 대며 스스로가 아직 인간이 덜된 야수의 일종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조선측은 이에 놀라서 왜족들의 마음을 인간의 도리에 맞게 잘 가르쳐서 문명으로 되돌리려 하였으나,한 번 심뽀가 빗나간 왜족들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서양 오랑캐와 자신들의 본성이 다름없음을 선언하는'탈아론(脫亞論)'을 내 세우고 본격적인 조선침략책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인들은 왜족들을 문명인류로 취급하기를 포기하고,서양오랑캐들과 같은 야만적 동물들로 취급하기로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지구상에서 식민지화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던 문명국 조선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자신을 지켜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도 근세에 들어 문명을 크게 꽃피웠던 정조임금 무렵부터 시작된 빗나간 세도(勢道)정치 때문에 옛날의 아름답던 문명이 많이 피폐해졌고,홍경래의 난·진주 민란 등 나름대로 지상천국을 회복하려는 민중의 저항이 드세어졌으나 세도가들은 이를 무작정 탄압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민심의 동요가 심해졌다. 그러한 혼란 속에 철종이 승하하고 흥선대원군의 어린 아들이 새로운 임금으로 정해지자,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섭정 역할을 맡아서 안동 김씨 집권 이래의 고질병인 세도 정치를 일시에 뿌리뽑아 버렸다. 대원군은 출중한 인걸이었으나 그도 역시 천주교를 서양오랑캐들의 침략도구로 생각하여 대탄압을 실시하면서 서양선교사들 중 몇 명도 참형에 처하였다. 거기에다가 천주교 신자 중 일부가 북경의 프랑스영사관에 구원을 요청하는 망국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서양의 침략자들은 조선침략의 명분을 얻은 셈이 되어 군함을 파견했다. 국가와 민족의 진정한 안전을 저버리고 외국오랑캐들을 앞장서서 불러 들인 이러한 종류의 종교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대원군의 서양종교 배척은 분명히 이유가 뚜렷했고 이미 대청국 및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에서 얻은 그 나름대로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대원군 이하 당시의 조선조정이 무능해서 적절히 국제정세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전 유럽지방의 야만적 강도나라들과 동쪽 섬나라 강도들이 지구상에 단 하나 남은 자유의 문명대국을 향하여 총출동을 하고 있는 판에 무슨 재주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그나마 인류문명의 불씨나마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방법은 잠시 문을 더욱 걸어 잠그는 방법이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진정한 문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던 무식한 서양 야만족과 왜열도의 강도들이, 상대방이 잘났건 못났건 간에 자기들보다 힘이 약하기만 하면 무조건 자기 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살벌한 동물적 '적자생존'의 세계가 펼쳐져 가고 있었다. 조선은 서양제국주의 강도들이 조선에 대하여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예 조선을 찾아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국의 해안지대를 황폐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마지막 수단까지 강구했다. 이른바 허허실실 전략이었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문명을 보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족을 위시하여 제국주의강도 세력들은 혹은 외교관,혹은 탐험가,혹은 선교사,혹은 의사등 의 형태로 조선땅에 밀려 들어왔다. 그들 어느 누구도 조선을 위하여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는데,왜냐하면 그들은 다름아닌 제국주의자들 정책에 따라서 충실히 움직이는 같은 야만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는 것이었지,어떻게 해야 강대국으로 발전하여 올바른 문명을 다시 인류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사치스런 문제가 아니었다. 전세계의 제국주의 야만국가들 모두가 조선을 뜯어먹으려 온 승냥이 같은 자들이었지,조선의 발전이라든가 독립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청국과 같은 운명이 조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골족의 세계제국에 대항하여 외로이 독립을 지켜냈던 한민족은 이번에는 보다 야만적인 서양과 왜열도의 제국주의자 모두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곤경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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