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우주 이야기

28 "과학 강의에 감동했소" 8억원 쾌척받았던 김정흠 교수

浮萍草 2014. 11. 13. 06:00
    김정흠 교수
    직도 많은 사람들이 김정흠 교수 성함 석 자를 기억하고 있을 줄 믿는다. 김 교수는 대표적 우리나라 원자핵 물리학자로서 2005년 만78세로 작고했다. 김 교수는 6·25 동란이 한참이던 1953년 피난지에 설립된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 전임교수로 부임해 평생을 대한민국 물리학 발전과 제자양성에 바쳤다. 특히 김정흠 교수는 국민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온화한 성품과 깊은 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강의와 저술 및 기고를 했다. 당시 김 교수와 같이 활동을 했다고 꼽을 수 있는 과학문화‘0세대’는 저서‘구름에 달 가듯이 간다’로 유명한 박동현 교수,새 박사’ 윤무부,‘아폴로박사’조경철 등이다. 바로 그 다음 1990년대 과학문화 ‘1세대’가 이인식,최재천,황우석,그리고 나 정도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는 황 교수가 낯설겠지만 처음에는 과학문화 강의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2천 년대 들어 중앙공무원교육원에 과학강의가 처음 개설됐을 때 생명 분야는 황우석 교수가, 우주 분야는 내가 맡았었다. 내가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를 창립한 것도 1991년이었다. 과학문화 분야는 새로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이 된 김승환,과학문화진흥회 김제완,과학 칼럼니스트 이덕환, ‘과학콘서트’의 정재승,로켓 박사’채연석,‘이동과학차’의 최정훈 등이 합류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중 김승환,이덕환,최재천은 나와 함께 현재 ‘프리미엄 조선’에 기고하고 있다. 김정흠 교수는 한마디로 우리나라 과학문화의 ‘원조’다. 1980년대 출연하신 TV 프로그램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김 교수의 강연에 감동해 1990년 고려대 물리학과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8억 원을 쾌척한 사람도 있었다. 전 국민은행장 서정국이었다. 국민의 과학화에 기여한 공로로 5공화국 때 장관직 제의가 있었지만 김 교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내가 김정흠 교수를 처음 뵌 것은 1980년에 서울대 천문학과 대학원생이 돼 한국천문학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천문학자도 아닌 분이 항상 카메라를 메고 학회에 참가해서 누군지 궁금했다. 나는 그 때만 해도 물리학자인 김 교수가 얼마나 천문학도 사랑하는지 전혀 몰랐었다. 그냥 천문학자들과 친해서 학회에 놀러온 줄 알았다. 내가 1994년 한국천문학회 총무간사가 되고 나서야 김정흠 교수가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깨닫게 됐다. 한국천문학회의 자료사진 중 상당수가 김 교수가 남겨준 것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촬영해서 현상까지 해 남에게 주기란 정말 번거로운 일이었다. 김 교수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봉사 했던 것이다. 특히 덩치가 훨씬 큰 한국물리학회보다 상대적으로 불쌍하게(?) 보였을 우리 한국천문학회를 사랑한 이면에는 김정흠 교수의 온화한 성품이 있었다. 내가 총무간사였을 때 마침 김 교수가 감사를 맡고 있었다. 학회를 앞두고 감사를 받으러 가면 옛날 얘기를 끝이 없도록 했다. 감사는 제쳐두고 그 얘기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래 사진은 우리 한국천문학회에서 전설이 됐다. 때는 바야흐로 1971년 11월 13일,정확히 43년 전이다. 천문대를 건립하기 위해 소백산 제2연화봉을 답사한 천문학자,물리학자,공무원 등의 모습이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김정흠 교수다. 천문대 건립을 도와주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김 교수 바로 옆 여섯 번째는 서울대 천문학과를 만든 현정준 교수다. 현 교수는 호킹(Hawking)의 ‘시간의 역사’를 번역해 이름이 알려졌다.
    1971년 11월 13일 천문대 건립위원들 소백산 답사.



    Premium Chosun ☜       박석재 한국 천문연구원 연구위원 dr_blackhole@naver.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