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幸福은 철저하게 음악적이다

浮萍草 2014. 10. 31. 10:48
    <音樂은 몸이 느끼는 소통의 출발점이고
    상호작용은 정서 표현을 調律하는 과정
    잔잔한 '설렘'에서 삶의 재미를 찾아야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래방에서 '마이웨이'따위는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부하 직원들 앞에서 눈 꼭 감고 '마이웨이'같이 처지는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자기감정에 취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의 부장님 뒤에서 백코러스 해야 하는 것처럼 고단한 일은 없다. 자꾸 느려지는 박자에 맞춰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나이 들면 빠른 노래는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된다. 박자 맞추기가 어려워서다. 그러나 노래방 점수는 결코 멜로디로 결정되지 않는다. 박자로 결정된다. 그만큼 음악에서는 박자가 중요하다. 음치는 교정 가능하다. 그러나 박자가 흔들리는 '박치'는 답이 없다. 물론 음치와 박치는 대부분 함께 나타난다. 원인을 잘 진단해보면 박치이기 때문에 음치가 된 경우가 많다. 박자가 틀리면 좌우간 구제불능이다. 음악의 박자가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몸의 동작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원시 음악의 기능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데 있었다.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원시공동체는 유지되었다. 적의 공격을 물리치거나 병마와 싸울 때도 노래하며 춤을 췄다. 음악을 들으면 몸은 저절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은 따라 움직인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의 위기는 음악과 몸동작이 분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클래식 음악 연주회장에 들어가면 오직 지휘자만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관객은 꼼짝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음악이 신나도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지휘자는 음악에 맞춰 온몸을 흔들며 인상 쓰고 머리카락까지 휘날리지만 관객은 그런 그를 그저 우아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구 클래식 음악이 망해가는 것이다. 몸으로 느낄 수 없는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 음악이 본능적이고 공동체적이라면 미술은 인지적이며 개별적이다. 미술은 외부의 대상을 눈을 통해 받아들이고, 머릿속에 그 대상이 다시 한 번 '재현(representation)'된 후에야 가능해진다. 상징을 통해 매개되는 모방의 절차가 포함된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미술에 비해 몸으로 직접 경험되는 음악은 훨씬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미술가들은 외부 대상을 모방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음악을 몹시 부러워했다. 인상파 이후 미술가들은 아예 내놓고 음악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대상을 모방하지 않고 음악을 작곡하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세잔이었다. 그는 자연을 원통·원추와 같은 기본 형태만 가지고 그리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피카소를 거쳐 추상회화에 이르면 미술가들의 시도는 더욱 과감해진다.
    설레는 배— 밤에 몰래 혼자 타는 배. /김정운 그림

    추상회화를 개척한 칸딘스키는 오선지에 악상기호로 음악을 작곡하듯 점(點)·선(線)·면(面)으로 그림을 작곡(?)했다. 그림의 제목도 '작곡(Composition)'이나 '변주(Improvisation)'라는 음악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칸딘스키 이후 오늘날까지의 추상미술이 보여주듯 미술은 결코 음악처럼 될 수 없다. 시각적 기호(記號)로 매개되는 미술은 몸으로 직접 경험되는 음악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미술의 질투는 정당하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음악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와 엄마의 의사소통은 서로의 동작·말·표정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아기는 타인의 감정 표현을 흉내 내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기는 엄마의 정서 표현을 흉내 내고 엄마는 아기의 움직임을 흉내 낸다. 그러나 아기가 좀 더 자라면 흉내의 양상이 달라진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흉내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기의 표정이나 몸짓이 바뀌면 엄마는 목소리의 높낮이로 반응한다. 아기가 소리를 내면 엄마는 몸동작으로 흉내 낸다. 엄마와 아기가 서로 흉내 내는 정서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의 박자, 혹은 리듬이다. 그 리듬이 조금만 어긋나도 상호작용은 흐트러지고 아기는 불안해한다. 초보 엄마의 품에서는 그렇게 울어대던 아기가 할머니의 품에 안기면 바로 조용해지며 편안해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호작용의 리듬 때문이다. 아기의 몸에서 나타나는 아주 작은 리듬의 변화를 노련한 할머니는 몸으로 느끼며 반응한다. 대니얼 스턴(Daniel Stern)이라는 발달심리학자는 이 같은 정서적 상호작용을 '정서조율(Affect Attunement)'이라고 개념화했다. 기타를 조율할 때 다른 줄이 내는 소리의 높낮이에 맞춰 음을 조율하듯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은 서로의 정서 표현을 조율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기는 자신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존재가 자신과 동일한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과 타인의 구별은 이렇게 시작된다. 음악적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상호작용의 리듬이 흐트러지면 인간은 불안해진다. 엄마 품의 아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 큰 어른도 마찬가지다. 불안은 아주 쉽게 전염된다. 옆에 앉은 사람이 발만 계속 떨어도 불안해진다. 흐트러진 상호작용의 리듬으로 인해 자아의 확인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할 때는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좋다. 규칙적인 상호작용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거나 천천히 걸으며 몸으로 느끼는 편안한 리듬을 되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행복이란 강가의 부드러운 물결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배와 같다. 내면 깊은 곳의 가볍고 즐거운 리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세상이 뒤집히는 엄청난 재미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재미는 오히려 삶의 리듬을 망가뜨릴 뿐이다. 다가올 내일의 작은 변화에 대한 기대로 오늘의 삶에 잔잔한 리듬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기분 좋은 마음의 리듬을 '설렘'이라고 한다. 설렘으로 경험되는 행복은 철저하게 음악적이다.
    Premium Chosun Biz☜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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