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왜 그래, 아빠같이!'

浮萍草 2014. 9. 19. 09:19
    불완전한 정보 해석하는 데서 相互작용 탄생
    짜증나게 하는 한국 정치·남자에게 告하노니
    解釋할 여지 주는 정보의 빈틈을 적당히 두라
    난 추석 연휴 기간 참으로 오랜만에 네 식구가 뒹굴며 한 주 가까이 보냈다. 
    큰놈이 군대 갔다 오고 내가 일본으로 유학 간 후 처음으로 다 모여 추석을 보냈다. 
    꼭 3년 만이다. 이제 아들 녀석들의 키가 나보다 훨씬 더 크다. 
    두 녀석 모두 생긴 것이 아비를 똑 닮아 그렇게 훤할 수가 없다. 
    참 흐뭇하고 즐거웠다. 흠, 처음에는 그랬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들놈들 하는 짓이 도무지 맘에 안 들었다. 
    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제멋대로 쓰고는 아무 데나 내팽개치는 데는 아주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 그놈의 휴대폰 충전기는 또 어떻고. 매번 쓰고는 도대체 어디 처박아 두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참다 참다 나름 조심스럽게 한마디 하면 이내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아이들은 아주 조용히 밥을 먹었다. 내가 안방에 혼자 들어가 TV를 켜면 그때야 식탁 쪽이 시끄러워졌다. 
    자기들끼리 키득대며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자꾸 '왜 그래 아빠같이!' 그런다. 
    아내까지 가세하여 아주 신났다. 
    여기서'아빠'란'아주 사소한 것에 삐치고, 한번 삐치면 회복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뒤끝도 한없이 긴 배 나오고 머리가 듬성듬성한 오십 넘은 쓸쓸한 
    인간'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추석 내내 마음이 참 많이 허(虛)했다.
    내 군대 일주일'쫄따구'선규는 나와 정반대다. 
    항상 사람 좋게 웃기만 한다. 
    도무지 싫다는 법이 없다. 충청도 예산 촌놈이라 '네, 이~병 김. 선. 규!' 하는 대답이 너무 느려 신찬수 일병하고 조영남 상병에게 정말 숱하게 당했다. 
    말주변이 그렇게 없는데도 엄청 큰 은행의 홍보부장을 5년 넘게 하고, 영어 발음이 진짜 후진데 외국인 투자 담당을 몇 년째 맡고 있다. 
    참 희한한 은행이다.
    무지하게 똑똑한 선규 아내는 그 착하고 느려터진 남편이 미워 죽겠다고 매번 불만이다. 
    아무리 화를 내도 그저 '허허' 그런단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속만 터진단다. '
    아주 자주 삐치는 나'와 '항상 허허 그러는 선규' 중 누가 더 좋은 남편일까? 
    단연코 내가 더 훌륭하다. 심리학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독일 게슈탈트 심리학 이론에 '폐쇄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것이 있다. 
    '완결성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불완전한 정보를 완전한 형태로 해석하려는 심리적 경향을 인간은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선(線)의 중간 중간이 떨어져 있는 점선으로 이뤄진 원을 빈틈이 전혀 없는 선으로 이뤄진 원으로 기억하는 경우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불완전하면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게 된다. 
    정보의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지?' 하는 질문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만 잠이 들 수 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설명이 안 되면 잠이 안 온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던 문제가 아침이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노란빤쓰’와‘미국식 욕설’사이. /김정운 그림

    선규의 행동이 주는 정보의 빈틈은 너무나 크다. 선규 아내가 나름 해석해서 메우려 해도 도무지 메워지지 않는다. 반면 내 행동이 주는 정보의 빈틈은 거의 없다. 아무리 기분 나쁘고 불쾌해도 원인과 결과가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내 스타일의 문제는 함께 있는 사람이 금방 지루해하며 귀찮아한다는 데 있다. 해석의 여지가 너무 큰 선규의 경우는 옆 사람이 답답해하며 짜증 내기 쉽다. 정보의 빈틈은 아주 적당해야 한다. 폐쇄성의 법칙이라는 게슈탈트 원리를 아주 잘 이용한 이들이 있다. 인상파 화가들이다. 인상파 그림이 대단한 이유는 그림과 대상 사이의 빈틈이 아주 적당하기 때문이다. 인상파 이전의 회화에서는 화가가 어떤 대상을 무슨 의도로 그렸는지 아주 분명했다. 당시 화가의 목표는 가능한 한 대상을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었다. 정보의 빈틈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관람객이 그림을 보며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겨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다. 재미가 전혀 없다. 유럽의 미술관 벽에 가득히 걸려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앞에 머무는 이들이 별로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인상파 화가들은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 관람객들의 적극적 해석을 가능케 했다.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서양의 근대는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인상파 그림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상호작용이 인상파 그림으로부터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인상파 이후 인류의 인식 능력은 엄청난 규모로 확장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너무 나갔다. 피카소까지만 해도 회화에 담긴 정보의 빈틈이 견딜 만했다. 그러나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관람객이 스스로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너무 커졌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옆의 그림을 '노란 빤쓰'라고 하면 르네상스 그림이 되고, '미국식 욕설'이라 제목을 붙이면 현대미술이 된다.) 상호작용이 가능해야 오래간다. 한동안 꽤 인기를 끌었던 미국식 자기 계발서가 요즘 시들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수십 가지 습관을 가져야 한다며 계몽하는 방식으로 독자의 시선을 계속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계몽과 상호작용은 개념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논쟁 이후 문학이 푹 사그라진 것도 독자들과의 상호작용을 담보할 장치들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모든 형태의 행위는 지루하거나 짜증 난다. 요즘 한국 정치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그런 식의 정치 행위가 가능한 세상은 여기까지다. 나나 내 친구 선규처럼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한국 남자들이 버틸 수 있는 세상도 딱 여기까지다. 아내는 그렇다 쳐도 자녀로부터 외면당하기 전에 정말 잘해야 한다.
    Premium Chosun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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