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달력, 원근법, 그리고 심리학

浮萍草 2014. 10. 10. 09:15
    인간 존재 본질 '不安'을 시공간서 이겨내려
    달력으로 시간 쪼개고 遠近法으로 규칙 부여
    心理學도 안 통할 땐 반복 행위로 해소함이…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나가다가 자빠지면,독일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알레스 인 오르트눙(Alles in Ordnung)?'괜찮으냐고 묻는 거다.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게 다 잘 정리되어 있나요?'가 된다. 기막히게 독일적인 표현이다. 독일 사람들은 주변이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너무나 불안해한다. 독일 사람들이 유난스럽기는 하지만 정리 정돈이 안 되어 있는 혼돈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은 인류 공통이다. 가장 정리하기 힘든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문화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정돈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우선 시간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불안'으로 정의한다. 도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 속에 그저'던져졌다'는 의미로'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이라는 표현을 쓴다. 시간으로 인한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그야말로'피투성이'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피투성'이라는 형편없는 일본식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면 이렇게 그럴듯해진다). 시간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달력을 만들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고 일주일은 7일로 나누고 한 달은 4주로 분리하고 일 년은 열두 달로 분해했다. 그렇게 시간을 각 단위로 나누면 하루,일주일,한 달,한 해는 매번 반복된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그래서 한 해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는 담배도 끊고 살도 빼기로 결심하는 거다. 지난해를 아무리 망쳤다고 해도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즐겁다. 한국의 중년 사내들이 골프에 그렇게 환장하는 이유는 반나절 동안 무려 18번이나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좁은 구멍에 집어넣는 놀이를 매번 새롭게 시작하면 그렇게 고마운데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 80, 90번 가까이 반복되니 얼마나 즐거울까. 그래서 한 해를 시작할 때, 매번 그렇게 요란하게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시간을 '반복'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도무지 정리할 수 없이 무한히 펼쳐진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를 인류는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무한한 공간에 소실점을 중심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아주 혁명적 발명이다. 원근법을 통해 인간은 신이 창조한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재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는 원근법이 발명된 후 인류는 무한한 공간에 대한 근원적 공포로부터 드디어 풀려났다. 2차원에 구현된 공간은 통제 가능하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공간의 공포를 극복한 인류는 아주 겁이 없어졌다.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처럼 만들기로 결심한 거다(오늘날의 환경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마음에 빗살 무늬를 그려야 할 때가 있다. /김정운 그림

    공간을 원근법적으로 재구성한 게 프랑스식 정원이다. 특히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원근법적 공간 구성의 절정을 보여준다. 지평선 끝의 소실점과 왕의 창문을 잇는 직선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정원을 꾸며 공간에 규칙을 부여했다. 공간에 질서를 세워, 자기 소유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사실 자기 물건에 질서를 세우는 것은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이다. 문양이다. 인류는 토기나 직물에 문양을 넣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했다. 빗살무늬와 같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문양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 규칙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권력의 크기만큼이나 불안했던 루이 14세는 자기 눈길이 미치는 곳까지 정원을 꾸미고 그 정원에 원시 문양과 같은 규칙을 부여하여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했다. 절대군주제가 무너진 후 새롭게 들어선 근대 권력은 더 무모한 짓을 한다. 정원 안에만 구현했던 원근법적 원리를 도시 전체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남작이 앞장선 파리 개조 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로 이어지는 직선을 기준으로 도시 전체에 원근법적 질서를 부여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내가 지난 10년간 해낸 생각 중 가장 그럴듯한 것 같다).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는 죄다 유사한 규칙과 질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집요한 노력은 여전히 뭔가 비어 있다. 자기 소유 물건과 공간에 규칙과 질서를 제아무리 집어넣고 시간은 반복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여도 마지막 남아있는 영역에 질서가 세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불안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까닭이다. 마음이다. 20세기 들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두 번이나 겪으며 인류는 심리학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심리학은 달력, 원근법에 이어 인류가 불안에 저항하고자 개발한 마지막 수단이다. 물론 현대 심리학이 그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혼자 지내면 수시로 불안하다. 외국에서 지내니 더 그렇다. 심리학을 30년 넘도록 공부하고 있지만 내 특별한 중년의 불안을 해결하는 신통한 심리학적 해결책은 없는 듯하다. 그래서 다시 원시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마음에 빗살무늬를 긋는 방법이다. 일본 아줌마들은 참 열심히 이불을 넌다. 햇볕이 참 좋다 생각하고 창문을 열면 집마다 이불이 창문에 걸려 있다. 나도 이불을 널었다. 공기가 참으로 깨끗한 시골이라 먼지가 전혀 없다. 햇볕이 잘 드는 창틀에 이불을 그냥 얹어 놓기만 하면 된다. 오후 내내 그림을 그리다 저녁 무렵 학교에서 돌아올 때 우리 집 창틀에 이불이 걸려 있으면 참 기분 좋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다. 밤에 그 '뽀드득'하는 느낌의 이불을 덮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혼자 자도 견딜 만하다. 이 찬란한 가을 이불 너는 것은 내 마음에 빗살무늬 하나를 더하는 일이다.
    Premium Chosun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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