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30〉 티베트 ⑥

浮萍草 2014. 8. 27. 07:00
    한국과 티베트
    
    “천축(天竺)은 하늘 끝이라 만산은 첩첩이 이어졌는데 애달픈 순례자들이여 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르네.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떠나보냈는지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이 보지 못했구나.” 
    7세기 무렵 부처님의 자취를 따라 인도순례 길에 오른 신라 스님들에 대해 기록한 중국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한 구절이다.
    당시 여건을 생각해보면 이역만리 순례 길은 떠나기도 힘들지만 타국생활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무사히 돌아오기란 더욱 힘들었을 터이다. 
    이러한 역경을 알면서도 구도의 일념으로 떠나서 걷고 또 걸었던 그들의 순례는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다. 
    우리와 티베트의 인연 또한 이들 구법승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라에서 당나라로 그리고 당을 떠나 사막을 건너고 설산을 넘으며 티베트 땅을 거쳐 북인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이들보다 한 세기 뒤에 혜초스님은 서역을 순례하고 당시 토번(吐藩)이란 이름을 지녔던 티베트에 대해서도 <왕오천축국전>에 기록을 남겼다. 
    “동토번국 사람들은 얼음산 눈 덮인 산 눈 덮인 강가와 계곡에서 천막을 치고 산다. 
    왕과 백성이 불법을 알지 못하고 절도 없다”는 내용처럼 이 무렵은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던 초기였다.
    두 나라 사람들의 본격적인 대면은 당나라에서 이루어졌다. 
    당나라에 신라승려와 토번사람들이 왕래하며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초기인연에서 신라 무상(無相)스님은 깊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당시 사천성 정중사(淨衆寺)에서 지내던 스님은 754년 장안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티베트 사신들을 만난다. 
    귀로가 험하여 1개월 남짓 그곳에 머물게 된 사신들은 무상스님께 불교의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들은 특히 자국의 앞날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이에 스님은 장차 인도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것이며, 위대한 왕이 나타나 불교를 널리 펼치게 될 것이라 예언하고 경전을 건네주었다. 
    스님의 예언대로 곧 티베트에 티송데첸 왕이 취임하여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삼예사를 건립했으며 즉위식에서 스님이 전해준 경전을 독송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삼예사의 <바세>에 적혀 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양국의 관계는 미미했으나 고려가 원나라와 강화를 맺으면서 조금씩 교류의 물꼬를 트게 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티베트불교의 여러 요소들도 주로 이 시기에 원을 거쳐 유입된 것이다. 
    1320년에는 원에 머물던 충선왕이 티베트로 2년간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이때 티베트에서 충선왕을 위해 기도법회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티베트와 우리는 별다른 이해관계 없이 좋은 관계로 인연이 이어졌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구운몽>ㆍ<곽해룡전>ㆍ<육미당기> 등 고소설에 나오는 티베트는 늘 중국을 침략한 오랑캐요 
    호전적이고 포악한 성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중국을 중심에 놓고 인접국을 오랑캐로 여기는 화이론(華夷論)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연암 박지원은 주변정세에 밝은 실학자였지만 열하에서 티베트 겔룩파 2인자와 나눈 대화를 보면 티베트불교나 라마제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그만큼 양국 간에 직접교류가 드물었던 것이다. 
    오늘날 달라이라마가 한국 땅을 밟지 못하는 사실에서 이 시대에 여전히 화이론적 인식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 불교신문 Vol 3035 ☜       구미래 동방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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