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대만 민주화 女주인공 뤼슈롄 前 부총통

浮萍草 2014. 6. 27. 06:00
    뤼슈롄 “30代때부터 癌·투옥…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난 유리천장을 깼다”
    ▲ 뤼슈롄 전 대만 부총통은 지난 5월 24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어렸을 때엔 여성 롤모델이 없어 여성이라는 점을 잊은 채 남성
    리더를 바라보며 노력했었다”면서“이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여성들이 많아진 만큼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롤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 전문직여성세계연맹(BPW) 총회에 참석 중인 뤼슈롄 전 대만 부총통, 프레다 미리클리스 BPW 회장, 파이 자한아라 BPW 친선대사,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오른쪽부터) 등이 지난 5월 23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주에서 열린 전문직여성세계연맹(BPW) 총회 취재를 갔다가 뤼슈롄(呂秀蓮·70) 전 대만 부총통을 만났다. 지난 5월 23∼27일까지 제주 국제컨벤션센터를 가득 채운 전 세계의 파워여성 속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그가 1970∼80년대 대만의 민주화를 위해 거리에서 감옥에서 싸웠던 얘기를 할 때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모인 800명의 전문직 여성들은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회의장 밖에서는 그의 영문판 회고록‘새로운 대만을 위한 나의 투쟁’(My Fight for a New Taiwan)이 판매됐는데 대만 민주화를 이끈 여성 지도자라는 점 때문 인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회고록‘새로운 대만을 위한 나의 투쟁’의 부제를‘감옥에서 최고권력에 오르기까지 한 여성의 여정’이라고 붙인 게 흥미롭다.
    “이 책은 최근 미국 워싱턴주립대에서 나온 것이다. 서울에서도 지난 2006년 내 자전스토리가 나온 적이 있다.” 그의 자전 스토리는 ‘뤼슈롄-운명을 거슬러 삶을 지배하라’는 제목으로 2006년 출간됐는데 소설 ‘대장금’의 작가 유민주 씨가 썼다. 요즘 대만의 청년들이 의회를 점령해 중국과의 무역협정을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는데 어떻게 보나.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중국과 서비스무역협정을 추진하면서 입법원의 승인을 얻지 않고 했다. 그래서 이것을 막으려는 게 청년들의 최근 시위였다. 중·대만서비스무역협정은 중국인이 일정액만 투자하면 가족을 데려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럴 경우 대만은 몇년 내 중국 사람들에 의해 점령될 수 있다. 이것은 대만인들에게 공포스러운 상황이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이것을 아주 위협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서비스무역협정이 시행되면 대만인들은 앞으로 기업을 하거나 비즈니스의 주체로 활동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니 이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마 총통 하에서 이것이 시행되면 대만의 미래에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다.” 중·대만 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하는가.
    “물론이다. 나는 2000년 민진당(民進黨)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의 러닝메이트로서 대선에 출마 당선됐고 우리는 8년간 대만의 민주화를 위해 힘써왔다. 그러나 2008년 마잉주 체제가 들어서면서 중국과의 투자협정이 본격 추진됐고 대만인들이 미래를 위협받게 됐다. 마 총통은 대만 출신이 아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의 아버지는 마 총통에게 대만이 중국과 통일돼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왔다. 그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대만의 젊은 세대는 마 총통의 리더십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마잉주 체제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다음 대선은 2016년인데, 민진당엔 새 여성 후보 차이잉원(蔡英文)이 있다. 그는 민진당의 주석으로 선출될 것이다(실제 인터뷰 다음날인 5월 25일 차이잉원은 주석 선거에서 93.7%의 압도적인 당원 지지로 당선됐다). 그는 2년 후 대선에 출마하게 될 것이다. 대만도 이제 여성총통시대가 열릴 때가 됐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리더를 대망하고 있다.” 14년 전 첫 직선 여성부총통이 되면서 여성총통시대의 길을 연 셈인데.
    “내가 유리천장을 깼고 차이잉원은 그런 길을 따라 정치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나보다 12세 어린데 똑똑하고 개방적이다.”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 과정은 많은 부분에서 닮은 꼴이 있는데 대만에서도 여성 대통령 시대가 곧 열릴 수 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즐겁다.
    “물론이다.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시대가 열린 것은 대만의 유권자들에게도 아주 많은 영감을 줬다.” 영문판 회고록의 부제처럼 정치범으로 수감됐던 여성운동가가 부총통에까지 올랐는데 정치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나는 대만이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을 했다. 나는 평범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법학 공부를 했고 대만 여성을 위한 운동을 하다 정계에 입문해 정치를 했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도 아웅산 장군의 딸이지만 나는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부총통의 지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간 중국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는데.
    “중국의 크기나 경제규모로 볼 때 중국은 거인이다. 군사적으로도 거대 국가다. 그렇지만 중국은 공산당 일당지배 국가인 반면 대만은 자유민주국가로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만이 중국과 합쳐지는 것에 반대한다.” 뤼슈롄은 그러면서 대만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과 얽혀들면서 겪었던 과거 얘기를 꺼냈다. 대만의 운명이 바뀌는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한국이 관여된 만큼 한국은 대만에 일종의 역사적 연대감을 느껴야 한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대만은 1895년 중·일전쟁 결과 일본에 할양됐다. 중·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에 이어 발발한 것인데 대만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만이 한국 때문에 희생된 셈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정책을 바꿔 중국공산당을 공인했고 그후 대만은 유엔에서 밀려났다. 대만은 또다시 한국 때문에 희생된 셈이 된 것이다. 대만과 한국의 운명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평화, 하이테크로 골든 트라이앵글을 만들어 번영을 이뤄야 한다.” 중국의 현 체제가 지속가능하다고 보는가.
    “중국이 거대한 경제파워로서 성장하면서 주변국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런 만큼 중국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성장을 계속하려면 주변국을 위협하거나 주변국과 분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5월 중순 베트남에서는 반중노동자 시위가 있었는데 베트남의 공단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 가운데 대만인들이 많았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대만인들을 중국인으로 오인해 공격을 한 것이다. 대만인들은 베트남 등에 많은 투자를 해오고 있는데 중국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 우리는 늘 대만이 중국과 다르다는 점을 주변국들에게 설명하고 있는데 외국에서는 대만과 중국을 동일시해서 대만을 공격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중국대표단이 이번에 BPW 제주총회에 70명이나 왔는데 대만에서는 50명이 왔다. 우리가 함께 만나자고 했더니 그들이 거부했다. BPW 총회는 여성들이 협력을 하기 위한 비정치적 모임인데도 중국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5월 24일 BPW 총회에서 ‘21세기 여성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대만 민주화를 위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쏟아놓아 박수를 받았다. 1944년 대만 타오위안(桃園)에서 태어난 그는 대만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69년 도미 일리노이대에서 비교법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1971년 귀국했다. 이후 대만정부에서 일하면서 여성운동가로서 대만 전역을 다니며 강연을 하다가 서른한 살 때인 1975년 갑상선암을 앓게 됐다. “하루에 19시간 일하면서 밤에는 글을 쓰고 낮에는 강연을 했는데 그때 몸이 완전히 방전됐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다행히 1년여 만에 암을 이겨낸 그는 여성운동을 지속하며 하버드대 로스쿨로 유학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79년 귀국, 타오위안 국민대회 대표로 출마하며 여성운동의 범주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사회정치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갑상선암 투병까지 한 상황에서 36세 때 고문 끝에 투옥될 때 심경이 남달랐겠다.
    “그때 나는 한 집회에서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20분 정도 얘기했을 뿐이다. 그 연설 때문에 투옥되어 1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는 계엄령 상태였는데 정부는 내 연설을 혐오했다. 너무 강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여일간 심문을 받은 끝에 시위 주동자 8명이 12년씩 선고받았다. 1979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당시 대만 상황은 거의 1989년 중국에서 발생한 톈안먼(天安門)사태 때와 같았던 것이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반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정확히 1933일 만인 1985년 석방됐다. 석방 4년 후 대만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우리는 복권이 됐다. 나는 당시‘대만을 사랑합니다’(I Love Taiwan) 캠페인을 벌이며 여성의 정치참여 운동을 본격화했고 1991년 의회선거에 선출됐다. 나는 어디서든 정치논쟁을 했고 모든 남성정치인들과 격론을 벌였다. 남녀 간 동등한 권리 등에 대해 전국적으로 얘기를 하고 다녔다.” 의회에서 일하면서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는데.
    “내가 처음 입법원에 들어갈 때 여성의원 비율이 7%였는데 요즘엔 30%가 넘는다. 감옥에서 나온 뒤 당시 나는 대만 전역을 방문하며 남녀평등 기회 균등 동일임금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오랜 투쟁 끝에 남성들이 내 주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새로운 세대가 내 의견에 공감을 표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2000년 천수이볜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출마해 당선됐다. 첫 여성부총통으로서 8년간 일하며 가장 보람있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굿 하우스 키퍼’(Good House Keeper)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대만에는 3개 그룹의 여성이 있다. 1그룹은 직장을 원하면서 훈련을 원하는 여성 2그룹은 직업을 갖고 집안일을 하는 여성 3그룹은 전문직 여성이다. 전문직 여성들이 밖에서 100% 일을 하도록 하려면 부모와 아이들을 케어하고 집안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굿 하우스 키퍼 제도를 도입 정부차원에서 17만 명의 대만 여성을 훈련시켰다. 그간 전통적으로 대만의 상류층은 동남아시아 여성을 데려와 전업적으로 육아와 집안일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내 아이디어는 대만여성들을 전문적인 하우스 키퍼로 육성해 하루 4∼6가족을 한꺼번에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육아도우미나 가사도우미가 필요한 사람들은 시간제로 이들을 고용해 비용을 줄이고 이 일을 하는 여성들은 시간제 계약으로 여러 가정을 방문하면서 결과적으로 더 많은 수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가사도우미가 필요한 사람들은 오전이나 오후 시간을 정해서 연락을 하면 거기에 맞는 인력이 가정을 방문해 일을 한다. 정부는 각 지역에서 희망자를 인터뷰해서 훈련시킨 뒤 각 가정에 투입했다. 이 결과 많은 여성 전문가들 교수나 법관들이 일에 전념하게 됐다. 말하자면 ‘여성이 여성을 돕는다’(Women help women)는 시스템이 마련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전문직 여성들이 조선족 여성 등을 비공식적으로 고용 육아 및 집안일을 맡기는 일이 많은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문화적 차이로 인해 불안정한 부분이 많고 갈등도 많다고 했더니“그런 일을 정부가 나서서 투명하게 해야 여성들이 집밖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된다”고 재차 하우스 키퍼제도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요즘 환경운동에 깊이 빠져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일본의 동일본대지진을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면서 정치활동을 접었다는 것이다. “2011년 내가 총통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예비선거에 나갔는데 그때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사태를 보면서 나는 정치를 포기했다. 더이상 내 삶을 정치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동일본대지진 현장에도 가봤다. 빈부격차도 긴급현안이지만 전 지구적 차원의 기후변화도 아주 중요한 이슈다.” 뤼슈롄의 나이는 올해 칠순이지만 그의 말 그의 행동에선 노년의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위엄이 배어있고 메시지가 분명했다. 평생을 지탱해준 열정의 뿌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의외로“어렸을 적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덕분”이라면서 가족 얘기를 꺼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은 내가 좀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부유한 집에 입양을 보내려 했다. 그렇지만 오빠와 언니들은 어렵더라도 함께 공부하겠다고 그때마다 저지했고 우리들은 함께 성장하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언니와 오빠는 늘 내게‘위인은 대개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들도 남성을 보고 배울 수밖에 없어 문제’라는 얘기를 했다. 그때 나는‘내가 성장하면 여성에게 롤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내가 살아온 얘기를 담은 책을 펴낸 것은 여성으로서 하나의 롤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성에겐 더 많은 롤 모델이 필요하다. 그것도 남성의 시각이 아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씌어진 게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런 시각에서 나의 지난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대만에게 공통으로 남겨진 문제라면서“일본이 반성을 안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며, 그것은 역사의 실수”라고 말했다. 그가 부총통으로 있을 때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대만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하며 그들의 희생을 위로해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화를 마친 뒤 일어서며 그는“대만에 와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10여년 전에 고궁미술관의 그림을 보러간 적이 있다고 답했더니“나는 그곳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고선“그곳의 전시물은 모두 중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덧붙였다. 뼛속깊이 대만 독립주의자인 그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말이었다.
    Munhwa ☜       글·사진 이미숙 문화일보 국제부 부장 muse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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