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여자축구대표팀 박은선 선수

浮萍草 2014. 7. 2. 10:39
    박은선 “결혼 관심 없어… 해외리그 진출이 꿈”
    ▲ 7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박은선은“더 늦기 전에
    해외리그에 진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박은선이 지난
    20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옆 보조경기장에서 헤딩
    연습을 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의 첫인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2003년 6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선수권대회가 진행 중이던 태국 방콕의 여자 축구대표팀 숙소 호텔. 역대 최연소(16세 6개월)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신예 박은선(28·서울시청)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조별리그 4경기서 3승1무로 당당히 4강에 진출한 대표팀이 잠시 호텔 수영장에서 달콤한 여가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취재를 빙자해 그 자리에 함께 했다가 박은선을 만났다. 그라운드에선 7골을 몰아넣은 무서운 골잡이지만 대표팀 내에서는 영락없는 막내였다. 선배들이 자유롭게 수영을 즐기는 데 반해 그는 물 밖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짧은 머리,반바지 트레이닝복 차림에 긴장을 풀지 않은 표정. 갑자기 자신에게 쏠린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듯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느 수줍음 많은 여고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로부터 11년. 지난 20일 서울시청팀의 숙소가 있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옆 보조경기장에서 박은선을 다시 만났다. 오랜 세월의 간극만큼이나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 177㎝이던 키가 181㎝로 좀 더 컸다. 몸무게도 8㎏쯤 더 늘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겐 그동안 실로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다.
    ㆍ성별 논란 “피하지 않을 것”
    소외된 종목의 선수로서 대중에게 잊혀 있던 박은선이 다시 화제가 된 건 지난해 11월이다. 해묵은 성별 논란이 또 불거졌다. 서울시청을 제외한 여자실업축구 WK리그 6개 구단 감독들이 박은선의 성별 진단을 요구한 것이다. 만약 한국여자축구연맹이 이에 불응하면 다음 시즌에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결의했다. 중학교 2학년 부터 축구를 시작한 박은선은 뛰어난 신체 조건과 탁월한 기량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2003년과 2004년 잇달아 여자월드컵과 올림픽 무대를 밟았고 2005년 8월 동아시아연맹컵에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며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하는‘올해의 선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뛰어난 성적 때문일까. 웬만한 남자선수를 능가하는 그의 체격이 항상 상대팀의 시빗거리가 됐다. 골을 넣으며 활약할 때마다 상대팀으로부터 집요하게 성별 검사 요청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여자로서의 수치심을 참아가며 성별 검사를 받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가 찰 노릇이죠.
    날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저한테 웃으면서 인사하고 걱정하던 분들이 언제부터인가 절 죽이려고 드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한 후 괜찮다는 말만 믿고 실업팀에 갔다가 징계당했던 배신감이 생각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올림픽 때나 월드컵 때 등 성별 검사를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니고…. 예전 같으면 욕하고 포기했겠지만 이젠 피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다시 얻은 축구선수 생활인데요.”
    ㆍ9년 만의 컴백, 득점왕 행진
    박은선은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어마어마한 활약을 했다. WK리그 지난 시즌 22경기에 출전해 19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중간에 수년간의 말 못할 공백기간이 있었던 선수라곤 생각지도 못할 만큼 빼어났다. 득점 랭킹 2위(비야·인천현대제철)와의 격차도 무려 9골이나 됐다. “2012년부터 팀에 복귀했어요. 몸이 다 안 만들어져서 경기를 뛰면서 컨디션을 조절했어요. 처음에 수비를 보다가 중간에 포워드로 올라갔죠. 그래서 10골밖에 못 넣었는데 지난해엔 저도 그렇고 팀도 그렇고 뭔가 해보자는 분위기가 잘된 것 같아요. 저 혼자 잘하는 건 한계가 있지만 팀이 잘 받쳐주니까 더 잘돼요. 제가 후배들의 플레이를 이용할 줄 알게 됐고 후배들도 저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았어요. 비결이라면 그게 비결인 셈이죠.” 소속팀뿐만이 아니다. 지난 5월에는 베트남에서 열린 AFC 여자 아시안컵에서도 6골로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대표팀은 3-4위전에서 중국에 패해 아쉽게 4위에 머물렀으나 박은선은 개인 트로피를 받았다. 중국 선수 양리와 6골로 동률이었으나 도움이 한 개 더 많아서 주인공이 됐다. “상을 타서 기분은 좋지만 팀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 아쉬웠어요. 특히 마지막 경기에서 제가 자책골을 넣은 게 부담이 컸죠. 굳이 변명하자면 햇빛 때문이었어요. 코너킥 상황에서 혼전 중에 볼이 공중에 떴어요. 그래서 그걸 걷어내려고 헤딩을 한다는 게 방향이 잘못됐던 거죠. 헤딩 순간에 너무 눈이 부셔서 그만…. 다행히 나중에 우리팀의 만회골을 도울 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됐습니다.” 어쨌거나 대표팀은 박은선의 활약으로 이 대회 5위까지 주어지는 2015 캐나다 여자월드컵 출전권을 따냈다. 2003 미국 여자월드컵 이후 무려 12년 만이다.
    ㆍ방황과 이탈을 반복한 지난 7년
    그럼 박은선에겐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은선은 2005년 출전 금지 징계 이후 2011년 말에 소속팀으로 복귀하기까지 7년간 이탈과 잠적 방황을 거듭했다. 첫 방황은 상상하지도 못한 일에서 비롯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동산정보산업고를 졸업하고 서울시청 실업팀에 입단했는데 뜬금없이 그게 문제라는 지적을 받았다. 한국여자축구연맹이‘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은 대학에 입학해 2년간 뛰어야 한다’는 선수 선발 세칙 제3조 3항을 어겼다는 이유로‘연맹 주관 대회 2년간 출전 금지’ 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제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박은선으로선 청천벽력이었다. 하루아침에 얼굴을 바꾼 어른들에 대한 불신, 축구에 대한 회의로 수렁에 빠졌다. “터무니없었어요. 일단 경기를 못 뛴다는 사실에 화가 났어요. 그래서 많이 방황했죠. 운동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경기를 못 나가니까 행동을 막 하게 되더라고요. 서정호 감독님이 많이 배려해주시긴 했지만 한 1년간 놀았던 것 같아요. 집에 처박혀 있거나 친구 만나거나 아니면 술도 마셨어요. 그땐 아주 운동을 안 할 작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징계가 철회되고 가까스로 복귀를 했는데 이번엔 대표팀이 말썽이었다. 2006년 5월 AFC 여자 아시안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소집됐다가 두 차례나 숙소를 이탈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대표팀은 왠지 낯설었다. 징계 사건 이후로 자신을 대하는 주변의 시선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트레이너에게 심경을 전하고 허락 없이 숙소를 빠져나갔다. 그때 서정호 감독이 나섰다. 오랜 은사로서 “조금만 버티라”며 박은선을 다독였다. 일주일쯤 후에 복귀했다. 그러나 독방이 배정되고 휴대전화를 압수당했다. 또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2차로 무단 이탈을 했고 축구협회는 ‘자격 정지 6개월’을 명령했다. “그때 이탈한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대표팀에 가보니 저에게 자격 정지 2년을 내린 분들이 대부분 그대로 계시더군요. 게다가 훈련이나 숙소 분위기가 일정 소속팀 출신으로 쏠려 저만 ‘왕따’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2007년 초 자격 정지가 풀렸다. 또다시 대표팀 복귀가 거론됐다. 하지만 이번엔 박은선이 거부했다. “어른들이 너무 싫었어요.” 게다가 1남2녀 중 막내딸인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부친이 돌연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새로운 고민과 방황이 이어졌다.
    ㆍ소중한 가족
    박은선은 어려서부터 유독 부친 박순권 씨를 잘 따랐다. “제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항상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시기도 했어요. 고교 때 처음 부상하고 힘들 때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원에 오셔서 피자 한 판을 사주며 위로해주셨던 기억도 새록새록 해요.” 하지만 부친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 201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최초 암 진단 후 거의 완치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합병증으로 재발하면서 가족과 영영 이별했다. 50대 후반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부친의 사망 이후 가계가 많이 기울었다. 대표팀은 물론 소속팀에도 복귀하지 않고 방황을 계속하던 때가 그때였다. 그러나 남은 가족끼리 서로 돕고 의지했다. 지금은 오빠와 언니 모두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박은선이 이모가 된 지도 4년이 됐다. “언니네 조카가 너무 귀여워 죽겠어요. 걔만 보면 제가 사줄 수 있는 건 다 사줘요. 축구공, 장난감, 옷 등등. 가족이 있어서 행복해요. 이제는 홀로 되신 엄마한테도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에요.”
    ㆍ결혼? 글쎄… 해외진출부터
    땀이 밴 운동복을 입고 있지만 박은선에게서 문득 여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남자친구, 결혼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심심했다. “결혼요? 아직은 아니에요. 얼마나 어렵게 다시 시작한 운동인데요. 운동하는 동안에는 결혼 생각은 없어요. 남자친구도 아직이고… 예쁜 옷이나 메이크업에도 욕심 없어요. 남들은 나이가 나이인 만큼 로망이 있을 거라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아요. 운동이 먼저예요. 새로운 재미도 찾았어요. 어릴 때는 위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지만 이제는 제가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또 거기서 조금씩 배우는 게 재미있어요.” 사실 박은선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다. 지난 5월 말 잉글랜드 여자 프리미어리그 첼시 레이디스에서 돌아온 지소연(23)이“은선 언니는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귀띔해줬다. 일부러 후배들과 장난도 많이 하고 우스갯소리도 즐긴다는 것이다. “서울시청 팀에서 제가 ‘넘버3’입니다. 미정 언니, 윤주 언니 다음이 저예요. 그런데 제가 딱딱하게 굴면 팀 분위기가 삭막하잖아요. 제가 막내였을 때 대표팀에서 이명화 언니와 성현아 언니가 저를 잘 챙겨줬듯이 저도 그렇게 해야죠. 그래도 선후배 질서 하나는 확실해요.” 이제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박은선은 꿈이 하나 있다.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더 잘하고 그 여세를 몰아 더 늦기 전에 해외리그에 진출하는 것이다. 기왕이면 여자축구 강국인 스웨덴이나 프랑스 리그에 가보고 싶다. “끝까지 저를 받아주신 서정호 감독님과 팀 선수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아울러 여자 축구에 관심 좀 부탁드려요. 저희 숙소가 3인 1실 혹은 5인 1실로 좀 열악한 편인데요. 박원순 시장님께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하하.”
    Munhwa ☜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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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선의 롤모델은… 佛리그 즐라탄의 팬, 별명 역시 ‘박라탄’
    국내선 안정환 존경… 지능적 플레이 탁월
    ▲ 박은선이 지난 5월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에서 6골로 득점왕 트로피를 수상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박라탄’이란 별명 마음에 듭니다.” 박은선의 별명은 박라탄이다.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공격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33·파리 생제르맹)에서 따온 것이다. 이브라히모비치는 프랑스 프로축구 리그에서 지난 시즌 득점왕을 차지했다. 34경기에서 30득점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는 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의 조국 스웨덴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박은선은 이브라히모비치의 열렬한 팬이다. 자신의 페이스북 대표 이미지로 이브라히모비치가 팔을 번쩍 든 모습을 올려놨다. 큰 키(195㎝)와 건장한 체격 공격적이고 민첩한 플레이가 바로 박은선이 축구선수로서 추구하는 모습과 딱 맞아떨어진다. 남자라면 정말 이브라히모비치처럼 됐을지도 모른다. 이 별명은 팬들이 붙여줬다. 박은선의 단단한 체격 거침없는 플레이가 ‘여자 즐라탄’ 같다는 데서 비롯했다. “박라탄이라는 별명을 잘 알고 있어요. 분명히 제가 갖고 싶은 능력을 가진 선수입니다. 롤모델이죠. 그래서 즐라탄과 비교되는 것이 좋아요.” 그럼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중에는 롤모델이 있을까. 바로 안정환(38)이다. 안정환은 2002 한일월드컵의 영웅이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MBC 해설위원으로서 경기장을 누비고 있다.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대표적인 축구스타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에요. 2002 한일월드컵 때 정말 좋아했었죠. 지능적이고 유연한 플레이에 반했어요. 제가 대표팀에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던 선배입니다. 하지만 이상형 같은 건 아니었으니 오해 마세요. 그저 선배로서 좋아했던 거니까요.” 이브라히모비치와 안정환이 그에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롤모델이라면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은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켜준 고마운 은사다. 박은선의 성별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기자회견까지 열어 박은선을 옹호했던 게 서 감독이었다. 박은선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탈과 잠적을 거듭할 때도 서 감독은 끝까지 믿고 받아줬다. “서 감독님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저를 이끌어주신 분이에요.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절 붙들어주셨어요. 이제는 감독님의 사랑에 봉사하는 마음에서라도 한눈팔지 않을 겁니다.”
    Munhwa ☜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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