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한국계 미국인 작가·연세대 교수

浮萍草 2014. 6. 25. 06:00
    크리스 리 “난 실패한 美이민자의 딸… 죽음 앞에 섰을 때 부끄럼 없도록 살고파
    연세대에서 영작문을 가르치는 작가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여교수. 인터뷰 약속을 잡고서 봄날 같은 설렘이 일었다. 그의 인생과 문학을 들으며 세월호 참사의 슬픔과 분노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담쟁이에 덮인 고풍스러운 본관을 배경으로 울긋불긋 철쭉이 만발해 있을 캠퍼스의 풍경도 그리웠다. 캠퍼스에선 그래도 대학생활을 갓 시작한 새내기들의 풋풋한 웃음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기대는 상상으로 족했다. 28일 오후 동문으로 들어선 연세대 신촌캠퍼스는 비에 젖어 있었다. 청송대 갓길을 따라 늘어선 철쭉은 이미 제철을 지났고 마지막 꽃잎도 이틀째 내린 비에 바닥을 뒹굴었다. 우산을 받쳐 든 학생들의 얼굴에도 표정이 없었다.
    ▲ 크리스 리 교수가 28일 연세대 백양관 연구실에서
    자신의 인생여정과 문학을 얘기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munhwa.com
    의 연구실은 백양관 북쪽 건물 3층에 있었다. 회색빛이 가득한 복도의 끝쪽 방이다. 문이 닫혀 있었다. 알림판에는‘부재중’이란 글씨가 선명했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아직 5분이 남았다. 문 앞에 놓인 우편물에 눈길이 잠시 머무는 사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한 단발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환한 미소가 촛불 같다. 막 강의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 했다. “연구실에선 신발을 벗고 지내요.”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구두를 벗었다. 그러고 보니 연구실 바닥에는 조그만 카펫 두 장이 깔려 있었다. 남쪽으로 창이 난 연구실은 아늑해 보였다. 양쪽 벽을 기대선 세 개의 대형 책장에는 낯선 영문 소설책이 빼곡했다. 책상 위에는 소설가 김영하 씨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놓여 있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인 듯했다. 벽에 걸린 대형 액자에는 알듯 모를 듯한 흑백 그림이 소파 옆에도 비슷한 그림의 액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에요. 콘크리트 벽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랍니다. 사진을 찍는 친구가 선물로 줬어요.” 소파의 양쪽 끝에 앉아서야 명함을 건넸다. 언더우드국제대학 조교수 크리스 리. 명함 반대쪽에는 이은경이라는 한글 이름도 적혀 있었다. 나이는 묻지 말라고 했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이라 해도“절대 절대로 안 된다”며 표정까지 바꿨다. “여자로서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고 나이 따라 말이나 작품이 달리 평가된다”는 것이 나이를 밝히지 않는 이유라 했다. 그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어 ‘한국을 떠날 때 몇 살이었느냐’고 과거의 나이를 물었다. 어릴 때 목사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그는 우리말이 유창했다.
    “다섯 살 반쯤이오. 부모님은 다섯 살 때라고 했다가 또 어떤 때는 여섯 살 때라고 했어요. 우리 집은 모든 것이 불투명했어요. 나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얘기도 늘 달랐어요. 이민자들은 외국에 살면서 힘드니까 본인도 모르게 진짜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현실에 맞게 과거를 조금씩 바꿔가기도 하고 희망하는 미래를 현실인 것처럼 얘기할 때도 있어요.” 그의 대답이‘동문서답’인지‘우문현답’인지 잠시 헷갈렸다. ‘다섯 살’혹은 ‘여섯 살’이라고 대답하면 족할 질문에 그는 과거·현실·미래라는 단어를 동원하며 이민자의 삶을 설명했다. 순간 미국 출판사들이 인정한 유망 작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미국에서의 초기 생활은 어땠느냐’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아버지가 목사였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미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작은 백인 마을에 정착했어요. 아버지는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이었죠. 백인 전도사의 배려로 지하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냈어요. 우리는 말하자면 미국사회 적응에 실패한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미국사회를 두려워했어요. 문제를 만나면 해결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했고, 그래서 한곳에 정착을 못하고 거의 3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다녔죠. 그럴 때마다 저도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야 하니 적응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청산유수처럼 흘러가던 그의 말이 초기 미국생활에 관한 얘기로 접어들면서 중간중간 끊겼다. 아버지 얘기에선 더욱 그랬다. 두 딸이 미국사회의 개방적인 문화에 젖어들까봐,행여 친구들과 어울리다 마약을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아버지였단다. 당시 자식 가진 이민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모·자식 간에 문화적 갈등도 심했다. “아는 목사님의 두 아들이 자살했다” “부모를 때리는 아들도 있었다” “공식기관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한 적도 있다”는 그의 얘기에 이민가족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아버지와 충돌했던 사건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얘기하지 못하겠다”며 말을 끊었다.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커다란 눈망울은 젖어 있었다. 질문을 돌리려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 목사들은 대부분 가난합니다. 목사가 헌금을 가족을 위해 쓰면 손가락질을 받죠. 특히 이민사회에서 목사 월급의 절반은 다른 데로 갔어요. 우리는 건강보험료를 낼 수 없어서 병원에도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병원비가 비싸기 때문에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많이 아프게 되면 집안이 무너지게 됩니다. 나중에 그걸 피부로 느꼈죠.”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의 집안은 한마디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특히 아버지는 이재에 밝지 못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의 명문고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도 “학자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집안에는 3000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가난한 고학생을 만난 경우였다. 어머니도 미국사회 속에서 섬 같았던 한인교회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책을 좋아했죠. 저도 책으로 영어를 먼저 배웠어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가 글을 가르쳐 주었답니다. 입학했을 때 영어로 할 수 있는 말은 ‘선생님’과 ‘화장실’이 전부여서 친구들을 사귀는 데도 시간이 걸렸어요. 소통이 어려우니까 심심해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현실이 힘드니까 도피한 측면도 있었겠죠. 사실 도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현실은 주어지는 것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좁죠. 하지만 상상은 한계가 없잖아요. 교실에 있는 책을 다 읽고 고학년 반에 가서 책을 빌려볼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그에게 있어 책은 특별한 존재다. 행여 눈이 멀어 책을 읽을 수 없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일 정도다. 그는“죽을 때까지 책을 읽고 쓰는 게 꿈”이라고 했다. 또“책은 스승”이라고도 했다. 어머니를 통해 처음 글을 알게 된 후 책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책이라는 인생의 동반자를 선물한 어머니는 대학 2학년 때 세상을 일찍 떠났다. “어머니는 젊고 예뻤어요. 흰머리도 하나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시름시름 앓았는데 오랫동안 참고 지냈어요. 병원에서 신장암 판정을 받았고 이미 암이 뼈까지 전이된 상태였죠. 우리 가족은 보험이 없으니까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어요. 내가 의사 선생님 얼굴을 처음 본 게 대학 졸업하고 영국에 가서였죠.”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그의 아픈 과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초 ‘아메리칸 드림’을 들어보기 위해 한 인터뷰였다.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슬픔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달려 나왔다. 그의 인생 스토리는 언제쯤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는 것일까.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도 따라 가셨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플 때부터 아버지는 망가지기 시작했고, 아내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했다고 했다. 자세한 얘기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시를 좋아했던 그는 UCLA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성적이 우수해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영국 요크대로 유학을 떠났다. “내 머릿속에서 미국은 비극과 얽혀 있어요. 미국을 사랑했지만 가족의 사연 때문에 어렵고 힘든 나라였죠. 엉켜 있는 뭔가를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이 영국이었어요.” 선택은 옳았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영국은 미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사랑인 동시에 질곡이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한국말도 배웠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길로 결혼했다면 지금쯤 영국에서 영국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 했다. 그는 “결혼을 결정할 땐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순위가 다를 수 있지만 대충 돈·외모·성격이 아닐까. 그런데 그가 제시한 기준은 사람·언어·국가였다. 결혼을 망설이던 즈음에 그는 한국으로 왔다. 한국 유학생들과 지내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겼던 터였다. “처음에는 잠깐만 머무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오니까 낯설면서도 편안했어요. 내 뿌리니까요. 그러다 박사학위를 할 게 아니라면 그냥 한국에서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혼을 생각했던 영국 남자는 백인이고, 유럽을 사랑했고,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포기했죠.” 그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한국 소설을 번역하고, 대학에서 영작문을 강의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하지만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국에서 그가 주목한 사람은 탈북자였다. 탈북자 지원 단체에서 일하는 지인을 통해 그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사회에서 이방인이라는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탈북자들의 삶에 푹 빠지게 됐다. 너무나 큰 위험을 안고 탈출하는 그들의 얘기에 마음이 움직였죠. 가족을 잃게 된 사연이나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그들을 돕고 싶었어요.” 실제 그는 10년 가까이 탈북자 지원활동을 해 왔다. 지난 2010년 1월 LA타임스에는 그가 중국에서 탈북자를 남한으로 데려와 돌봐주는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틈틈이 이들의 얘기를 소재로 삼아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2010년 단편소설 한 편을 들고 찾아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북 콘퍼런스가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콘퍼런스는 작가 지망생들이 습작을 발표하고 기성 작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그는 미국의 유명한 출판 에이전트 수전 골롬브의 눈에 띄었다. 골롬브를 통해 크리스 리의 습작을 접한 펭귄그룹, 랜덤하우스, 리틀브라운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대형 출판사 9곳이 그와 계약하기를 원했다. 그는 경매를 거쳐 최종 낙찰을 받은 펭귄그룹과 2권의 책을 내기로 계약했다. 이렇게 나온 단편집이 ‘떠도는 집(Drifting House)’이다. 9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의 표제작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하는 어린 삼남매에 관한 얘기다. 나머지 8편은 기러기아빠, 실직자 등 한국사회의 그림자를 담고 있다. 이 소설집은 ‘더 스토리 프라이즈’ ‘푸시카트 프라이즈’ 등 미국 내 문학상을 휩쓸게 된다. 그는 일약 세계적인 유망 작가로 떠올랐다. 그의 작품이 평가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나만의 목소리, 나만의 언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본래 시를 써서 그런지 시적인 언어라는 평가도 있었고요. 소설에선 캐릭터와 스토리가 중요하지만 자기만의 목소리와 언어가 있어야 하죠. 저의 글은 화려하진 않지만 시구처럼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어 낭비하는 단어가 없답니다.” 그는 지난해 연세대 교수로 임용돼 가을학기부터 언더우드국제대학에서 영작문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 작품을 통해 폭력,사랑,고독,여성,죽음 등 다양한 소재를 가르쳐 주고 싶다”며“모든 테마가 결국은 인간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두 권의 책을 계약해 쓰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장편이다. 여기에도 탈북자가 등장한다.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다만“탈북자를 희생자가 아닌 서바이버(생존자)로 보는 시선이 담긴다”고 귀띔했다. 그는 세 번째 책도 이미 구상 중이다. 이번에는 문학 판타지 장르란다. “다른 세계, 다른 시간과 같은 물리학적인 측면도 있고, 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도 있다”고 설명했다. “꿈이오? 죽을 때까지 동반자와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부끄럽지 않았으면 합니다. 실수할 수 있고 또 실수하면서 살지만, 사과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인생의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실 건물 옆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찾았다. 혹독했던 긴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한 여자의 인생이 ‘서시’ 앞에 섰다.
    Munhwa ☜       인터뷰=박영출 문화일보 사회부 차장 eve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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