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이순자 “1983년 남편 출장 첫 배웅이 아웅산 테러로 마지막 될 줄이야…”

浮萍草 2014. 7. 31. 10:39
    故 김재익 경제수석 부인…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순자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15일 서울 중구 정동길 인근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munhwa.com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던 이가 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 청와대(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재익(1938∼1983)이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수석 입행한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실력을 인정받아 청와대 비서실로 차출됐다. 이후 경제기획원 장관 비서실장과 기획국장을 거쳐 다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며 금융실명제 수입자유화 등 굵직한 경제제도와 신성장동력인 정보 기술(IT)산업을 국내에 도입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 분야에 대한 업무를 그에게 위임하다시피 했고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런 김 수석 곁에는 이순자(75)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있었다. 그의 첫사랑이자,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였던 부인이다. 둘은 삼청초등학교에서 3학년 때 처음 만났다. 이 교수의 기억 속에 초등학교 동창생으로서의 김 수석은 없지만 김 수석의 기억 속에는 이 교수가 있었다. 경기고 2학년 재학 중에 검정고시로 대학에 1년 일찍 들어간 김 수석은 1년 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 이 교수와 재회했고 수강신청을 핑계로 ‘작업’을 걸었다. 이 교수는“무척 친절한 사람이었고 반듯한 모습이 좋았다”고 그의 첫 모습을 기억했다. “당시로서는 촌스럽지 않은 겉모습도 괜찮았던 것 같아요. 억지를 부리거나 고집을 부리는 성격도 아니었죠. ‘사귀자’는 고백도 없이 그렇게 대학 생활 동안 계속 만남을 이어갔어요.” 두 사람의 혼인 또한“결혼하자”는 프러포즈도 없이 김 교수가 대학을 졸업하던 다음 해 이뤄졌다. 23세 때의 일이다. 어린 시절 류머티즘열을 앓아 심장 판막에 장애가 있던 김 수석이 군 징집에서 면제되자“군대를 못 갈 만큼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맏딸을 줄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둘의 결정을 막지 못했다. 이후 둘은 하와이에서의 유학생활을 포함해 22년간 한 사람은 정부 경제관료로 또 한 사람은 대학 도서관학과(현 문헌정보학과) 교수로 바쁘게 살았다. 두 아들은 무탈하게 커갔고, 큰 다툼 한 번 없던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강한 폭발음이 일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동남아 5개국 순방길에 올라 수행원을 대동하고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려는 일정이 잡혔을 때다. 북한이 전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유례없는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전 대통령은 현장에 늦게 도착해 화를 피했지만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해 이범석 외무부 장관,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17명의 고위 관료가 목숨을 잃었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김 수석도 자리에 있었고, 현장에서 순직했다. 이 교수는“그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더구나 미얀마 출장은 그가 처음으로 공항에 나가 김 수석을 배웅한 출장이었다. “남편이 업무 때문에 해외 출장이 잦았지만 서로 일이 바빠서 공항에 배웅을 나간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수업이 우연히 없었고 불현듯 ‘나도 배웅을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집을 같이 나섰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배웅이 된 거죠.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김 수석을 잃고 허망한 마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 이 교수의 눈에 두 아들이 들어왔다. 당시 이들은 대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애들 때문이라도 10년은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쯤이면 둘째가 얼추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겠구나’ 했습니다. 아빠를 갑자기 잃었으니 아이들도 충격이 컸고 세월이 바윗덩어리같이 짓누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교단에도 서기 힘들어 미국 워싱턴에도 1년 반 정도 연수를 가 있었고 그 덕에 아이들이 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님 세 분이 6·25전쟁 때 목숨을 잃었고 남편까지 그렇게 되니 사실 한국을 떠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렇게 31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김 수석의 장례식에서 이 교수를 부축했던 큰아들 한회(51) 씨와 형 손을 잡고 묵묵히 서 있던 작은 아들 승회(42) 씨는 이제 장년이 됐다. 현재 이들은 각각 김앤장에서 지적재산권 담당 변호사로 미국 데이라이트 디자인사에서 한국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한회 씨의 경우 공학박사로 평생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지난해 로스쿨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북한이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강제 억류하고 있는 데 대한 책임을 물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한회 씨의 아들이자 김 수석의 손자인 태완(18) 군은 지난해 국군포로 유영복 씨의 수기를 번역해 ‘Tears of Blood(피눈물)’를 출간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여전히 크겠지만 자녀들이 훌륭하게 컸다는 지인들의 칭찬이 이어진다. “아이들을 키울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는 언어 다른 하나는 인성이었어요. 언어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인성은 건강하게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 인성은 밥상머리에서 주로 가르쳤어요. 한 식탁에서 집밥을 나눠 먹으면 사랑과 정성을 표시할 기회가 많아지고 유대감 형성이 잘되거든요. 소통 매체로 음식만 한 게 없습니다. 오감을 자극하잖아요.” 그는 최근 이런 생각을 담은 요리 에세이집 ‘따뜻한 밥상’(청강문화산업대 출판부)을 냈다. 청현문화재단은 젊은 인재들에게 전하고 싶은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향기로운 책’시리즈를 기획했고 이 교수의 집밥 이야기가 첫 주제로 선정됐다. 정희경 재단 이사장이 이 교수의 집에 들러 몇 번 밥을 먹은 게 계기가 돼 그 안에 담긴 철학을 담고 싶어 했단다. 비매품 형식으로 출간된 책은 초판으로 2000부를 찍었는데 이미 소진돼 7월 말부터 판매 형식으로 다시 찍어 서점에 내놓기로 했다. 책에는 야채크림수프, 두부샐러드 연어 술찜 등의 음식을 만드는 조리법이 담겼지만 이보다 집밥에 담긴 속뜻에 집중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풍기는 구수한 음식 냄새,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식탁 화려하지는 않아도 깔끔하고 정성이 담긴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가족과 다른 가족의 식사자리가 식당이 아닌 집에서 이뤄지는 것도 멋진 일이다. “저희 시대에는 가족이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이 너무 당연한 생활의 일부였어요. 그런데 바쁘니까, 귀찮으니까 각자 밖에서 따로 밥을 먹고 들어오는 생활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요즘 저녁에 동네 나가 보면 아빠들이 회사에서 늦게 오니까 엄마들이 애들을 데리고 식당에 와 밥을 먹이는 모습도 많이 봐요. 건강,소통,공동체 의식 형성 등 기능을 하는 밥상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김 교수는“젊은 사람들이 음식 만드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바꿔주고 싶다”고 했다. 실제 그가 소개하는 요리방식은 간단하다. 특별한 레시피는 없고, 있는 재료들을 최대한 활용해 보기 좋게 꾸미는 식이다. “저는 요리를 남편 때문에 많이 배웠어요. 업무차 사람을 만나면 집으로 참 많이 데려왔거든요. 당시 기업체 사람을 끼어서 외부에서 사 먹일 수도 있었을 텐데 남편은 그것을 하지 않았어요. ‘ 숟가락 하나 더 놓을 수 있어?’ 묻곤 했죠. 그렇게 대접을 많이 하다 보니까 음식을 쉽게 차리는 기술이 많이 늘었어요. 또 집밥을 나눠 먹으면 확실히 얘기가 더 잘 통하고 서로 간의 이해도 깊어지더라고요.” 다시 김 수석의 얘기가 나와 이 교수에게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남아 있는 그에 대한 기억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 교수는 무엇보다도“퇴근도 잘 못하고 퇴근을 해도 집에 일거리를 잔뜩 들고 왔던 모습이 많이 떠오른다”며“한마디로 일만 하다 간 사람”이라고 했다. 재계나 학계 관계자들은 김 수석이 추진한 정책들로 우리나라 경제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평을 내리지만 정작 그는 이것들을 누려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남편이 IT산업이 우리나라의 신성장 동력이 될 거라며 통신시스템을 완전히 바꿔야 된다고 열을 올릴 때 사실 저도 그게 무엇인지를 몰랐고 사람들도 잘 알아주지 않았어요. 본래 남편은 공대를 가려다가 색약 때문에 포기한 터라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거든요. 월드뱅크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많았지만 일을 그만두면 제주도에 가서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마 지금 옆에 있다면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앞서 지난 2010년 이 교수는 영원한 동반자인 남편에게 선물을 했다. 김 수석의 이름으로 모교인 서울대에 20억 원을 기부해 ‘김재익 펠로십’을 만든 것이다. 그는 1985년 아들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 고모의 부탁으로 경기 용인에 있는 땅을 산 적이 있다. 그런데 도시 정비를 하면서 시에 수용됐고 기대치 않게 15억 원이 생기게 됐다. “세금을 내고도 11억 원이나 되더라고요. 여기에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사후 기증키로 하니 총 20억 원 정도를 마련할 수 있었어요. 항상 남편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남편과 제가 타국의 도움(장학금)으로 유학을 가 공부했던 것이 생각나 개발도상국 젊은이들의 유학자금으로 썼으면 해서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벌써 4명에게 장학금이 갔어요. 나중에 이들이 성장해 한국하고 일을 할 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무런 재산도 남아 있지 않겠지만 남편의 이름을 딴 기금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많은 가난한 학생들이 도움을 받을 것이다. “왜 본인의 이름을 함께 넣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나는 살아서 많은 것들을 누렸다. 하지만 남편은 일만 하다 갔으니 그를 위한 것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김재익 펠로십’에 대해 남편을 향한 ‘정성’이란 표현을 썼다. 집밥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이 단어는 자주 등장했다. 작은 일을 할 때도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정성’ 이는 그가 지난 세월 걸어온 길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단어인 듯 보였다.
    Munhwa ☜       유민환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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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자 교수의 자녀 교육법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 가르쳐 주세요”
    20대 후반의 김재익(오른쪽)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이순자(왼쪽)숙명여대 명예교수.가운데는 큰아들 한회 씨.
    청강문화산업대 출판부 제공
    순자(75) 숙명여대 명예교수는‘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의 아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지만, 학계에서는 도서관학을 국내에 소개한 여성 원로로 통한다. 이화여중·고를 졸업한 그는 본래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간 불문학도였다. 동대학원 불문학 석사과정도 마쳤고 1961년부터 4년간 모교인 이화여고와 서울예고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김 수석을 따라 하와이주립대로 유학을 가면서 새로이 도서관학을 공부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사서 직종에 대한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김 수석이 학업을 이어가는 동안 생계를 꾸릴 목적이었다. 2년간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 도서관 전문사서로 5년간 일을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도서관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개발연구원 자료실 전문 사서,국제경제연구원 자료실장 등 실무 경험을 거쳐 1976년부터 숙명 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주로 사학이나 한학을 연구한 학자들이 도서관학을 가르치던 시기였는데 이 교수는 미국 에서 직접 관련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국내에서 도서관학이 체계를 갖추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 1989년부터 3년간 숙명여대 도서관장을 지냈고 2001년 퇴임 후 명예교수가 됐다. 그는“공무원 아내는 내조를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할 때였지만 남편이 알아서 잘해 나는 나대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은퇴를 한 이후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삶을 즐기고 있다. “영화와 연극을 보러다니고 여행도 많이 다닙니다. 아들들은 자기네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저는 저대로 재미있게 남은 삶을 살아야죠.” 그는 자녀교육의 팁을 묻는 질문에“한국에서는 부모가 가진 것을 마치 자기가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며“정말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독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남과 비교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부모에게 의존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자기 주관이 없어지고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고민 없이 남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낍니다. 확실한 주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Munhwa ☜       유민환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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