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재벌가 인사이드

3 재벌과 정치의 함수(下)

浮萍草 2014. 6. 24. 10:18
    '머슴'이던 전문경영자가 대통령이 되자 재벌 총수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글로벌화 하면서 총수들이 파워를 갖게 된 것이다. 
    특히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으로 굳어지자 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YS집권 시절인 1995년 4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베이징에서 국내 언론사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정치는 4류’라는 폭탄 발언이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이날 이 회장은“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은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면서“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기업은 2류다” 고 정치권에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에 청와대는 발끈했고 삼성의 신규사업 등에 많은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어쩌면 재력으로 권력까지 넘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지 모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1992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직접 정당을 창당 정권에 반기를 드는‘사건’까지 일어났다. 
    이 모험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지만 재벌의 힘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IMF 한파가 몰아치자 재벌들은 다시 위축됐다. 
    국내 재계 랭킹 3위였던 대우그룹이 몰락했고 30대 그룹에 들었던 유명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 재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정권과 결탁으로 부를 챙기던 시대는 지나고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좌파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총수들은 숨죽일 수 밖에 없었다.
    MB 정권이 들어서자 재벌들이 또 한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MB 또한 이들의 생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재벌 총수와 최고 통치자의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증명해준 일화가 2007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사무실에서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들과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MB와의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는 와병중이라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외국에서 급히 귀국해 참석했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난지 얼마 안된 상태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재벌 총수들에게 권력의 힘이 어떠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메시지였다. 
    정치인이나 군 출신이었던 전직 대통령과 달리 MB는 전문 경영인 출신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전문 경영인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오너의 눈밖에 나면 그날로 자리가 없어지는 한시 직장인에 불과하다. 
    MB가 현대건설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이면에는 ‘정주영’이라는 주인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총수와 전문 경영인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1997년 4월 한보철강 비리 사건으로 열렸던 국회 청문회 석상에서 정태수 회장이 ‘머슴이 어떻게 아느냐’고 한 말
    이다. 
    전문 경영인을 한마디로 ‘머슴’으로 정의한 내용이었다. 
    필자가 창업회장을 만났을 때 역시 그랬다. 
    그들은 보통 전문 경영인을 ‘OO군’이라고 불렀다. 
    창업주가 대부분 60대 70대 연장자여서인지 ‘OO사장’보다‘OO군’을 더 좋아했다. 
    전문 경영인들은 연말 연시 정기 인사에서 유임이냐 퇴임이냐를 매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한다. 
    그 키는 전적으로 총수만이 쥐고 있다. 
    실적이나 실력도 중요하지만 정무적인 이유로도 전문 경영인은 옷을 벗어야 한다.
    ‘머슴’이었던 전문 경영인 출신인 대통령 당선자가 그날 주요그룹 총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등을 두드리는 장면을 연출,권력의 힘이 총수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예전에는 만나려고 해도 만나주지 않던 재계 총수들이었다.
    ▲ 2007년 12월 28일 낮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초청 경제인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김승연 한화 회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돈이 있으면 권력을 가지려고 정치권을 기웃거렸고 권력을 잡으면 돈을 챙기려고 혈안이었음은 인지상정이나 다름없다. 1960~70년대는 기업 총수가 정치인으로 변신 정치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과 코오롱 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이었다. SK로 애칭됐던 김성곤 회장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할 정도로 권력과 금력을 함께 틀어쥔 인물이었다. 지난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 개헌을 반대하다 당대의 권력자 김형욱(중앙정보부장을 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나중에 배신,미국에 망명 했다가 행방불명됨)에게 밉보여 콧수염을 뽑히는 등의 망신을 받았다. 쌍용그룹은 시멘트·레저·건설·언론사 등을 소유한 국내 굴지의 재벌이었다. 한 때 국내 기업 서열 6위까지 올랐으나 2대인 김석원 회장의 경영실패로 IMF 때 무너지고 말았다.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역시 기업인과 정치인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정치를 할 때 그룹 경영은 동생인 이원천 회장과 장남인 이동찬(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에게 맡겨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아들인 이동찬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과정에 동생인 이원천 회장과 지리한 집안 싸움을 벌이게 된다. 코오롱 그룹 형제와 조카 사이의 분쟁은 우리 기업사에 한획을 긋는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결국 동생인 이원천씨가 레이온이라는 소재 부품 사업을 분사,‘원진 레이온’으로 독립해 나가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구태회 전 국회부의장도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친 동생이다. 구 부회장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형인 구인회 회장을 도와 화장품을 개발하는 등 깊숙하게 그룹 경영에 관여한다. 그러나 조카인 구자경 회장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정치쪽으로 방향을 틀어 국회부의장까지 올랐다. 지난 2003년 LG그룹이 가족간 재산 분할 때 전선 부문을 물려받아 LS그룹으로 개명하고 현재 2세들이 경영일선에 나서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중견기업주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이는 정권 차원에서 중견그룹 기업주들을 국회의원으로 진출시키면 정치부패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왕상은 협성해운 회장,김진재 동일밸트 사장(현 김세연 의원 부친),박유재 에넥스 회장,고판남 한국합판회장(당시),박재홍 동양철관 회장,이효익 삼익악기 회장 등이 대표적인 인사다. 기업주들이 국회 입성에는 성공했으나 정치인으로 크게 성장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기업도 안되고 정치인으로 발전도 안돼 씁쓸한 말년을 보낸 이들이 많다. 최근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몽준 전의원이 박원순 시장에 참패를 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재벌에게 ‘통치권’이라는 최후의 권력은 주지 않는다는 진리다. 중세 유럽의 메디치 가문이 몇 대에 걸쳐 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정치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고 경주의 최부자집이 300년 넘게 1만석 지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진사 이상의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만 갖고도 온갖 권력을 휘두르는데 통치권마저 갖게 되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부와 권력과 명예 3가지를 한사람에게 주지 않은 것이다. 재벌과 정치의 함수 관계가 그래서 복잡한 것이 아닐까.
    Premium Chosun         홍성추 재벌평론가 sch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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