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新줌마병법

'생명의 귤'을 나눠 드립니다

浮萍草 2014. 6. 22. 10:24
    머리숱 없고 얼굴 못났지만 어려운 이에겐 인기 만점 배우
    귤에 그림 그려 선물했더니 노숙자 얼굴에 웃음꽃 피네요
    하루가 고단하고 힘드십니까… 누군가의 손을 맞잡아보세요
    ▲ 김윤덕 문화부 차장
    녕하세요? 연극 하는 청년 김건희입니다. '청년'이라고 해서 놀라셨나요? 숱 없는 제 머리 때문에요? 실은 저도 놀랐습니다. 무대 조명이 제 머리에 반사되어 객석을 환히 비추는 걸 보고요. 하하! 배우냐고요? 소도둑처럼 생겼지만, 배우 맞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요? 저는 서울 대학로가 아니라 쪽방촌,보육원,교도소 등지에서 공연을 합니다. 그곳 사는 분들이 연극에 위로받고 힘을 얻으셨으면 해서 달팽이처럼 무대를 짊어지고 찾아가지요. 노숙자분들도 저의 단골 관객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알콩달콩 엮어서 모노드라마로 올립니다. '별 정신 나간 놈' 하며 뜨악하게 바라보던 얼굴들에 웃음꽃, 눈물꽃이 피어납니다. # 2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식당 문을 열고 나오는데 제 앞으로 70대 어르신이 맨발로 지나가셨습니다. 얼른 제 신발을 벗어 노인의 꽁꽁 언 발에 신겨 드렸지요. "어딜 가세요?" 여쭈니 "죽으러 가네" 하십니다. "집에 모셔다 드릴 테니 업히세요" 하고 등을 내밀자 "이래 봬도 내가 해병대야!" 하셨지요. 반지하 셋방엔 곰팡냄새, 음식 상하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사흘을 굶으셨다기에 밥을 지으려는데, 별안간 칼을 내놓으라고 달려 드셨지요. 기어이 죽어야겠대요. 그래서 머리에 쓰고 있던 제 모자를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어르신, 저보다 머리숱도 많으면서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 0.1초쯤 지났을까. 마른 미역 같던 그 얼굴에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제가 만날 웃겨 드릴 테니 다시 사시면 안 될까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단점이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장점'인가 봅니다. 저에게 대인기피증을 안겨준 민둥머리가 한 사람을 살렸으니까요. 어르신과의 '연애'가 시작됐습니다. 어느 날 가 보니 저랑 머리를 똑같이 밀었더군요. 제게 먹인다고 산나물도 뜯어와 무쳐 놓으셨어요. 저는 곰팡이 핀 벽지를 떼어내고 도배를 새로 해 드렸습니다. 솜씨가 없어 울퉁불퉁 엠보싱이 된 벽에 제 사진들을 붙여놓았더니 어두운 지하방이 제 머리 덕에 환해졌다며 웃으셨지요. 제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옆집 아주머니가 집구경을 왔다가 어르신에게 물었습니다. "저 황소 같은 총각이 누구요?" 어르신이 답하셨습니다. "아, 제 아들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파이팅 넘치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요. 그런 저에게 또 다른 아버지가 생긴 겁니다. # 친구 병문안을 가던 날이었습니다. 귤이 먹고 싶다길래 리어카에서 한 봉지 샀습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데 문득 샛노란 귤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별별 모양의 귤을 보고 친구가 깔깔댔습니다. 그래서 이 귤을 우리 '노숙자 아버지들'한테도 갖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바로 지하철역으로 달려갔습니다. 한데 귤을 받은 남자분이 눈물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왜 우세요?" 물었더니 그날 아침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여느 때처럼 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아침 식판을 받아드는데 자기가 꼭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싶어서 지하철 선로에 발을 내밀기 여러 번 술에 취하면 용기가 날까 봐 소주를 구하러 가는데 웬 '빠박이' 청년이 나타나 귤을 건네더랍니다. 집에 두고 온 아들 녀석처럼 해맑게 웃는 귤을요. 그 남자분, 다시 살아야겠다며 역사(驛舍)를 떠났습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대박이지요? 귤 하나가 생명을 살렸으니까요. 이후로 틈날 때마다 귤에 그림을 그립니다. 1년 동안 6만 개 정도 그렸나 봐요. 골목에서 혼자 우는 아이,사랑을 잃고 술 취해 널브러진 청년,실직해서 거리를 방황하는 남자,그리고 사창가의 여인들에게도 나누어주었습니다. 대전역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그 여인은 두 손에 귤을 감싸쥐고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금껏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오늘에야 처음으로 누군가 날 진심으로 안아준 것 같아. 고마워." # 햇살보다는 그늘 아래로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저 또한 그렇게 자라서입니다. 서둘러 세상을 등진 아버지, 늘 아프셨던 어머니, 허구한 날 주먹질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형님….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날이 제게도 많았습니다. 비뚜로, 엉망으로 사는 게 신(神)에 대한 복수라고 여겼지요. 그때 어느 목사님이 저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다가 그분이 울더라고요. 솥뚜껑 같은 제 손을 꼭 잡은 채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의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지요. 벼랑 끝에 있을 땐 '사랑한다'는 말조차 버겁습니다. 함께 울어주는 것, 따뜻이 손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귀한 생명 하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2014년 6월 10일입니다. 제가 처음 살아보는 오늘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무엇을 하셨나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까? ※ 이 글은 지난 10일 자살예방행동포럼이 주최한 '라이프 콘서트'에서 연극배우 김건희씨가 들려준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Premium Chosun ☜        김윤덕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차장 sion@chosun.c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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