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新줌마병법

김 부장의 글쓰기 숙제

浮萍草 2014. 3. 6. 10:40
    내 인생, 우담바라처럼 사라질까 나이 오십에 시작한 글쓰기 수업
    첫 숙제 '아버지'라서 막막했는데 추억이 꼬리를 물고 되살아나네
    일등항해사가 꿈이었던 아버지… 그 헌신의 삶을 글로 새겨봅니다
    김윤덕 문화부 차장
    녕하세요? 행복한 글 한 편 읽는 것이 한 끼 밥보다 좋은 글쓰기 수강생 김철민입니다. 수업 첫날 지각해 '벌'로 칠판에 적힌 시(詩)를 버벅대며 낭송했던 그 어리바리 꽃중년 기억나시지요? 회사가 여의도라 저녁밥도 굶고 달려간 건데 숨도 돌리기 전 시를 읊으라 명하시니 어찌나 무색하던지요. 글쓰기 수업에 웬 시인가 의아했는데, 집으로 가는 길 버스 안에서 그 시를 다시 꺼내 읽다 그만 울컥했습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했던가요. 시심(詩心)을 지펴야 좋은 글 쓸 수 있다는 말씀, 명치 끝에 새겼습니다. # 한데 '숙제' 말입니다. '아버지'와의 추억담을 글로 써오라 하시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다섯 줄짜리 이메일도 절명시(絶命詩) 토해내듯 머리털을 움켜쥐며 쓰는 마당에 원고지 여덟 장,게다가 어머니도 아니고 아버지라니요. 동네 세탁소 주인으로 평생 빨랫감 다리미질감이랑 씨름하며 살아온 아버지는 오로지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평범한 남자랍니다. 술도 여자도 모르고 주야장천 일만 하시니 별명이 '만리동 황소'였지요. 척추협착증으로 세탁소 막살하시고도 구질구질하게 자식 덕 안 본다며 아파트 경비로 취업한 고집불통 노인네일 뿐입니다. 어머니는 "총각 땐 나훈아 뺨치게 노래도 잘하두만 월남 파병 다녀온 뒤로 저이가 돌부처가 되었다"고 하시니 드라마가 있을 리 없지요. 그저 소주를 반주 삼아 저녁밥 드시면 다락방 올라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개다리소반 위엔 낡은 성경책과 헤밍웨이 소설 몇 권 자식들이 쓰다 만 공책들이 굴러다녔고요. 추억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소풍날 반장이 싸왔던 통닭이 너무나 먹고 싶어 틈만 나면 통닭 타령을 하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문간에 들어서는 제 손을 잡아끌고 "통닭 먹으러 가자" 하십니다. 동생들까지 사 먹일 돈이 없으시니 장남인 저만 몰래 데리고 나섰지요. 그날 만리시장에서 먹은 통닭처럼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물녘 시장 골목을 타박타박 돌아 나오는데, 아버지가 묻습니다. "네 꿈은 무엇이냐?" 열 살 아들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당신 혼자 중얼거립니다. "나는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바다 사나이가 되고 싶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아버지는 아들이 증권회사에 취직한 걸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수십억원을 굴리는 펀드매니저가 당대의 유망 직종으로 각광받는데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명절엔가는 "가난을 죄로 몰아가는 세상을 만들지 마라"고 하시니 무척 야속하더군요. 그러다 금융 위기가 왔습니다. 저에겐 죽음보다 잔인한 악몽으로 남아 있는 2008년 빗발치는 고객들 항의와 밤낮없이 이어지는 대책 회의에 시달리다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습니다. 뇌경색이었지요. 여섯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생명은 건졌으나 의식이 돌아오기까진 열흘이 더 걸렸습니다.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나의 몸을 누군가 붙잡고 있다고 느낀 것은…. 그 손은 거칠고 딱딱했지만 따뜻했습니다. 간간이 희미한 울음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그건 내가 아는 어머니의 통곡 소리와는 달랐습니다. 수업 첫날, '왜 글쓰기를 배우러 왔느냐'고 물으셨지요? 글쓰기는 제가 건강을 되찾은 뒤 세운 첫 번째 계획입니다. 내 인생, 우담바라처럼 덧없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신자유주의의 탐욕에 내 영혼을 팔지 않으려면 저도 '생각'이란 걸 하고 살아야겠어서 감히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 글을 써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버지입니다. 지난해 겨울 저희 아버지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시든 화초처럼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중환자실로 실려가는 아버지의 두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지요. "얼마나 무섭고 아팠으면 저 목석 같은 양반이 눈물을 다 흘렸겠느냐"며 흐느끼는 어머니 옆에서 저도 울었습니다.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볼이 그렇게 야윈 줄, 아버지의 어깨가 그렇게 작은 줄, 아버지의 두 다리가 그렇게 앙상한 줄….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면 함께 바다 여행을 떠날 겁니다. 갑판 너머 웅대한 바다에 붉은 노을이 내리면 작가 최인호가 '광대한 우주 같다'고 노래했던 아버지의 품에 저도 용기 내어 안겨보렵니다. 밤마다 당신 살아온 이야기도 꼼꼼히 받아 적을 겁니다. 인생 그 두 번째 항해를 위해 화려한 '타이타닉'에서 내려'노아의 방주'로 옮겨 타려는 저에게 당신의 지혜와 영감은 무엇보다 정확한 나침반이 되어줄 테니까요. 근데 참 신기하네요. 선생님 왈, 생각이란 게 우물과 같아서 퍼올리면 퍼올릴수록 새로운 물이 고인다더니, 백지로 제출하게 될까 걱정했던 내 아버지 이야기가 벌써 열두 장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걸 또 줄이려면 밤을 새워야겠지요. 글쓰기, 왜 이리 어려운가요? 왜 이리 행복한가요?
    Premium Chosun ☜   김윤덕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sion@chosun.co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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