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20〉 일본 ④

浮萍草 2014. 6. 9. 09:03
    순례문화의 저력
    백 년 전 에도시대의 어느 마을에서 다섯 명의 처녀가 서일본의 33개 사찰로 순례를 떠났다. 
    두 달 예정으로 다녀오려던 이들의 순례 길은 다섯 달이나 걸리고 말았는데 돌아온 일행은 한 명을 여읜 채였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하루 종일 굶주리며 걷기가 일쑤였던 힘든 여정이었기에 한 친구는 길 위에서 삶을 마치고 종이위패로 돌아온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서민과 여성에게까지 순례의 길이 열려있었고 지금도 순례문화는 일본불교의 중요한 특성으로 꼽힌다. 
    성지를 영장(靈場), 순례를 편로(遍路)라 하는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영장을 다양하게 세트화 해놓은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서일본과 관동지역에 각 33개와 지치부(秩父)에 34개로 백 개의 관음영장(觀音靈場)이 있는가하면 진언종의 88개소와 정토종의 25개소 등 종파별 영장도 있다. 
    이들 사찰에는‘사이코쿠 관음영장 ○○번’처럼 현판에 번호를 매겨놓았고, 순례자들은 방문을 증명하는 도장을 받으며 순례를 이어간다.
    특히 에도초기인 17세기에 순례가 서민들에게까지 활성화된 데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의 영향이 컸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지방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격년마다 에도에 살게 한 제도로 전국각지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토와 에도를 오가며 1년씩 생활
    하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에도로 통하는 길목마다 여관과 상업이 발달하고 도로가 정비되어 이전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계층에서도 순례에 대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봉건체제 아래서 거주지를 자유롭게 떠날 수 없었던 서민들도 순례에는 관의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부모ㆍ가족의 허락은 물론, 주인허락 없이 순례를 떠나는 고용인들도 적지 않았다.
    종교적 순례를 막으면 신의 벌을 받는다는 담론이 널리 퍼져 있어 보호자나 고용인에 대한 큰 두려움 없이 개인적ㆍ집단적 순례가 이루어졌다. 
    그들에게 순례는 종교적 참배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바깥세상을 향해 내딛는 자유이기도 하였으리라.
    순례는 속계에서 성(聖)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떠나기 전 가족과 떨어져 정진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며 떠날 때는 목욕재계한 뒤 신에게 참배하고 가족과 
    이웃이 모여 의식을 치른다. 
    근래에도 순례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은 일종의 계이자 결사의 성격을 지닌 고(講)를 조직하여 해결하고 있으니 일본인들에게 순례란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의미를 지닌 듯하다.
    순례를 떠나는 복장에서도 순례의 전통과 정신을 가늠할 수 있다. 
    “거지든 병자든 부잣집 딸이든 시코쿠 헨로(四國遍路)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행의(行衣)ㆍ각반ㆍ삿갓ㆍ지팡이ㆍ바랑ㆍ허리받침ㆍ손등싸개 등 
    순례에 맞는 복장을 갖춤으로써 속계의 자신을 내려놓고 일시적 출가수행자로 걸음을 내딛는다.
    일제강점기에는 목포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유달산 주변에 88구의 불상을 모시고 주변을 돌았다니, 
    순례는 그들과 뗄 수 없는 신행이었던 것이다.
    출가수행자가 되어 걷고 또 걸었던 그들. 저마다 지닌 염원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한편으로 치열하게 한편으로 번뇌를 내려놓으며 수행의 길을 걸어왔을 그들…. 
    그 저력이 오늘날 개개의 일본인이 지닌 미덕을 이룬 것이 아닐까.
    
    ☞ 불교신문 Vol 3015 ☜       구미래 건국대학교 외래교수,불교민속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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