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17〉 일본 ①

浮萍草 2014. 5. 19. 10:52
    “은혜를 입었으나 구름처럼 멀리 떨어져 있기에 뵙진 못해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짐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당나라에 머물던 일본의 원인(圓仁)스님이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에게 보낸 편지구절이다. 
    1200년 전 불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일본을 떠나 거친 풍랑을 뚫고 수개월 만에 당나라 땅을 밟게 된 원인스님. 
    그가 무사히 당나라에 머물다 귀국할 수 있었던 데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아시아불교는 험난하고 기나긴 구법(求法)의 대장정에서 시작되어 꽃을 피웠다. 
    중국 현장스님과 신라 혜초스님이 7~8세기에 불교의 근원지를 찾아 이역만리 서역 길에 올랐는가 하면 중국불교를 향한 고대 한국과 일본 스님들의 구법행렬이 끝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 가운데 원인스님의 견당 행보는 구법수행자로서 치열한 배움의 자세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원인스님은 단기체류로 건너왔던 터라 끊임없이 당나라에 더 남아있을 방도를 꾸몄으나 엄한 감시로 번번이 뜻을 꺾이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9년6개월을 지냈다. 
    당 무종의 강력한 불교탄압으로 환속까지 당하는가 하면 돛대가 부러지고 일행이 죽어나가는 뱃길의 고행과 천재ㆍ병마 속에서 보낸 나날이었다.
    그러나 당나라에 머물던 10년 남짓 동안 회창폐불(會昌廢佛)의 시대를 제외하고 스님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매일매일 써내려갔다.‘내 한목숨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그간에 구한 불경을 본국에 전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할 정도로 순교자적 신심을 지닌 스님이었지만 일본 땅을 떠나 배에 탄 순간부터 민속지(民俗誌)를 써
    내려가듯 일상사를 기록하여 자신의 실제 경험을 역사화한 것이다.
    무엇보다 <입당구법순례행기>로 펴낸 기록에는 신라인들의 불교 의식과 민속이 오롯이 담겨 있어 그 뜻이 더욱 깊다. 
    당나라에는 신라인 집단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이곳의 사찰을 적산원(赤山院)이라 했는데 원인스님은 온갖 박해를 피해 피난처와 같은 이곳에 수차례 
    머물며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어서 일본인의 신라 상륙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순례기에서도 신라를 ‘적의 나라’로 표현하는가하면 뱃길에서 만난 신라어부들이 일본인임을 알자 황급히 달아났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신라개국 당시부터 국경을 넘는 왜구가 숱하게 출몰한데다 일본이 백제부흥운동을 도와 적대관계가 가속화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도 원인스님이 일본을 떠날 때부터 신라역관이 통역을 도왔고 신라방과 신라해상의 적극적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순례와 무사귀국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동양사학자 라이샤워도 원인스님의 여정을 도운 신라인들을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표현한 바 있다.
    또 일본으로 돌아온 원인스님은 은혜를 잊지 않고 교토 연역사(延曆寺)에 장보고의 공적비를 세우고 제자들은 그 유언에 따라 888년 적산선원을 지어 신라의 신인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모셨다. 
    정치적으로 적국이었지만 신라인은 이와 별개로 선한 개개인에 대한 인간유대에 적극적이었고 일본인은 그 고마움을 깊이 새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두 나라의 연기적 관계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믿는다.
    
    ☞ 불교신문 Vol 3009 ☜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