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21〉 일본 ⑤

浮萍草 2014. 6. 16. 21:11
    ‘육식금지’
    베에 있는 수백 년 전통의 정종회사에서 인상적인 그림을 보았다. 그곳 양조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식사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마치 발우공양을 하는듯한 모습이었다. 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일본사람들의 식사법을 보면 발우공양과 많이 닮았음을 느낀다. 각자 일인용 식기의 밥상을 받아 그릇을 입 가까이 들고 정갈하게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스님들의 식사를 보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본불교는 대처식육(帶妻食肉)으로 ‘계율 없는 불교’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7세기경부터 육식금지령이 내려져 메이지시대인 1870년대 와서야 풀렸고, 이는 불교수행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 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금지가 가능했던 데는 고대 일본인들의 민간신앙에 도살을 부정(不淨)한 것으로 여기던 관념이 불교를 받아들인 뒤부터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도시에서 가축이나 야생의 고기가 유통되기도 했으나 육식에 대한 거리낌은 점차 커져서 에도시대에 이르면 도축과 고기를 혐오 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육식금지는 억압이라기보다 오히려 편안한 정신적 해방감이기도 했던 것이다. 섬나라로서 가축의 개체수가 적었던 환경적 요인도 육식을 멀리하는 데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는 그들의 육식금지가 어디까지나 네발 달린 포유류였고 어류는 제외되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야채와 생선으로 채워졌던 이들의 밥상에 공식적으로 고기가 올라온 것은 1200여 년이 지나서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서구를 받아들였던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함께 서양요리를 보급하고 왜소한 체구를 개선하고자 육식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육식은 다시 문명화된 근대이자 개화의 상징으로 등장한 셈이다. 불교권에서 대처육식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불교는 민간의 육식자유화에 편승할 만큼 계율이 해이했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일본불교의 육식과 대처는 불교의 생존과 직결된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당시는 메이지정부가 들어서면서 신도(神道)를 국교화하기 위해 신불분리정책을 추진하고 폐불훼석의 불교탄압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이에 조동종의 설조청졸(雪爪淸拙) 스님은 승려들의 대처식육을 허용해달라는 건백서를 올리게 된다. 내부반발을 무릅쓴 고육지책으로, 승려의 세속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승려신분의 존속과 불교배척을 중단시키기 위함이었다. 그의 건의는 메이지 정부의 종교정책에 반영되어 1872년 ‘승려의 대처식육은 각자의 임의에 맡긴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불교계를 향한 국가의 육식권장은 승려들의 환속 내지 세속화를 위한 수단이 되었고 승려신분을 호적에 편성하여 신사(神祀)를 대신해 승려를 이용한 교도정책에 박차를 가하였다. 다시 민간의 식생활로 돌아오면 여전히 일본에서는 육식요리가 발달되지 않았고 동물성 단백질을 배제한 사찰음식이 정진요리(精進料理)라는 이름으로 널리 보급 되어 있다. 그들의 식사법이 발우공양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 이전의 사찰음식이 일본요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일본불교 역시 메이지 전까지 계율에 철저했다는 점과 함께 전 국민이 함께 육식금지를 실천한 일본문화를 불교적 관점에서 새롭게 볼 만하다.
    ☞ 불교신문 Vol ☜       구미래 건국대학교 외래교수,불교민속연구소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