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浮萍草音樂/아시아 불교민속

<18〉 일본②

浮萍草 2014. 5. 26. 08:55
    역동성 잃은 일본불교
    
    "일본엔 ‘불교신자’라는 말이 없습니다.” 
    일본 동양대학교 어느 교수의 말이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불교신자인 걸로 알고 있던 터라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곧 의문이 풀렸다. 
    우리가 ‘유교신자’나 ‘무속신자’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유교적ㆍ무속적 삶에 젖어있듯이,일본에서는 불교가 토착신앙화 되어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일본인들은 집집마다 불단과 신단을 모셔놓고 불교와 신도(神道)를 나란히 신앙한다. 
    새해에는 신사(神社)에 가고 추석인 오본(お盆)에는 절에 가며 일상의 기복은 신도에 의지하고 죽음의 문제는 불교에 의지한다.
    불교와 신도는 일본인의 종교적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되어 독특한 신불신앙(神佛信仰)으로 자리한 것이다. 
    신도는 천황과 왕실조상을 정점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을 섬기고 때로 모시는 신격이 분명하지 않은 신사도 있으니 한국이 다종교국가라면 일본은 가히 다신교
    국가라 할 만하다.
    이러한 일본불교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스님들의 가정방문이다. 
    이를테면 사십구재를 절에서 하지 않고 스님이 재자의 집을 찾아 불단 앞에서 극락왕생을 빌어주며 조상제사를 지내는 오본 때도 일일이 신자들 집을 방문하여 조상
    신을 위한 염불을 해주는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일만이 아니라 그 밖의 날에도 주기적인 가정방문이 이루어진다.
    스님과 신자의 관계가 이렇듯 긴밀하게 된 배경에는 사청제도(寺請制度)라는 역사가 자리한다. 
    이는 에도시대에 기독교 탄압을 위해 만든 제도로,모든 주민을 마을의 특정사찰에 소속시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년 주지가 문서로 증명하게 한 것이다.
    사찰에서는 주민들의 호적과 족보 나고 죽는 일을 관리하면서 자연스레 종교적 역할도 전담하게 되었고 주민들은 장례와 제사를 전적으로 사찰에 의지하였다. 
    이처럼 사찰에 소속되어 그곳에 시주하는 신도의 집을 단가(檀家)라 불렀다.
    1660년대부터 자리 잡은 사청제도가 200년 넘게 시행된 데다 일본불교는 스님이 가정을 꾸리고 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구성원이자 종교사제자로서 사찰과 가정, 
    스님과 신자의 뿌리 깊은 연계가 짐작된다.
    단가로 인해 사찰의 경제적 안정은 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수행ㆍ포교와 같은 불교 고유의 기능이 약화되고 국가의 조종에 따라 사찰이 주민통제의 수단이 된 것
    이기에 사청제도의 폐지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1868년 메이지정부 들어서 폐지된 사청제도는 신도를 국가종교로 내세우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신도를 국교화 하려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불교와 신도와의 관계였다. 
    이에 메이지천왕은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내려 신사에 있는 불상과 불구를 철거하고 신사에 소속된 승려를 환속시켜 신관이 되도록 
    강제하였다.
    ‘일본판 분서갱유’라고도 부르는 불교탄압은 10여 년 간 이어졌다. 
    기독교를 내치기 위해 불교를 이용했다가 신도를 격상시키기 위해 다시 불교를 내친 것이다.
    앞서 동양대학교의 교수는 일본불교가 쇠퇴하고 있어 한국불교의 변화상을 연구하여 일본불교 활성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털어놓은 바 있다. 
    지금도 군국주의 부활과 함께 민족종교이자 토착종교인 신도가 주목받고 있듯이 일본불교가 역동성을 잃고 장례불교화 된 데에도 국가의 입김이 컸다.
    
    ☞ 불교신문 Vol 3011 ☜       구미래 건국대학교 외래교수,불교민속연구소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