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거대한 금관 공동체 - 4

浮萍草 2014. 2. 3. 18:24
    "고구려는 금관과 금동관을 제작했다
    중국이 찾아낸 확실한 고구려 금관과 금동관의 흔적 황금의 나라 부여

    ㆍ이 금관은 현대 기술로 제작한 것이 아니다 장 역사적인 사건은 전쟁이다. 전쟁은 한 시대를 규정짓는다. 기자는 지금의 한반도 체제를 6·25체제로 본다. 6·25전쟁을 한 결과가 지금 한반도 상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분단은 광복 후 군정(軍政)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러한 분단을 고정화한 것이 6·25전쟁이니 전쟁은 광복보다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전쟁 때문에 우리는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갖게 됐고 북한은 계획경제 주체사상식 공산주의 체제를 갖게 되었다. 상당한 국력을 군사비로 쏟아 붓게 된 것도 분단의 유물이다.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섬나라가 된 것도 그러한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G-10 수준의 국가로 발전한 것도 다 전쟁이 가져다 준 결과물이다.
    ㆍ우리는 6·25체제,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체제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체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5대 연합국이 유엔 안보리 이사국이 되어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한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유오(唯五)한 나라가 되었다. 이들이 유엔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은 세계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힘이 된다. 그 다섯 나라 가운데에서 유독 미국이 독보적인 것인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데 미국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미국을 유럽(대 독일·이탈리아전)과 태평양(대 일본전)에서 벌어진 큰 전쟁에 핵심으로 참여해 승리했다. 두 개 전구(戰區)에서 이룬 승리의 주역은 미국이었다. 소련은 유럽 전쟁에서는 큰 역할을 했으나 태평양전쟁에서는 아주 작은 조연이었다. 그러하니 미국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강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어느 한 나라가 일어나 미국을 이겨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한국의 6·25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 코소보전 아프간전, 이라크전 등 소소한 전쟁은 많았지만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못했다. 그러니 세계는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고 미국식 영어를 세계 공용어로 삼아 돌아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로 선출된 지도자는 미국부터 방문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다. 정치는 체제를 바꾸는 큰 전쟁 사이를 이어주는 이벤트의 집합이다. 이러한 정치와 전쟁을 쌓아놓은 것이 역사다. 따라서 역사는 정치가 된다.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는 전쟁부분이다. 역사는 남과 관계된 것이 핵심이다. 역사는 우리만의 역사를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타국과의 관계사를 캐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만의 역사를 파는 것을 역사로 보려고 한다. 관계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ㆍ우리의 국제정치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없다
    관계사는 국제정치학의 보고이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쌓아오는 동안 주변국과 수많은 관계를 맺었다. 안보를 기반으로 한 국제정치를 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정치학계는 우리의 역사를 뒤져 우리의 국제정치사를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인하대 정외과의 남창희 교수 등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노력을 하는 학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배운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학만 강의하는 학자만 즐비하다. 국제정치학과 역사는 구분하기 어려운데, 우리는 너무 뚜렷이 분별한다. 역사는 역사로만 있어야 하고, 정치학은 역사와 관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각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학계는 죽은 역사학을 다루고 국제정치학계는 남의 나라(대개는 미국이나 유럽)의 관계사만 연구하게 됐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 조상이 국가와 개인의 생존을 걸고 혈투를 벌인 파닥파닥한 역사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무덤과 사서(史書)에 남아 있는 ‘박제’를 보고 의견을 밝히는 맹맹한 역사학만 하게 되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영화 제목)’가 아니라 ‘죽은 역사학의 사회’를 만들어왔다.
    ㆍ일본과 중국은 정치를 위해 역사를 연구할 줄 안다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 그들은 미국정도는 아니겠지만 큰 전쟁을 해봤기에 역사를 정치에 활용할 줄 안다. 역사 속에서 발견한 법칙과 교훈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뱃심이 있는 것이다. 대일항쟁기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연구한 것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대륙 진출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이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추적한다. 중국은 ‘조선족 만주족 등 중국 동북지역에 있는 소수민족은 중국민족이 일부이니 그들이 만들어온 역사도 중국사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이 만든 역사를 정리해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 동북공정을 펼친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는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소심주의에 사로 잡혀 정치와 연결된 역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만들어준 우리 역사를 반복해서 공부하면서 중국이 펼치는 동북공정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ㆍ동북공정을 위해 고구려사 연구한 중국
    2003년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1500년 전에서 2000년 전 사이 동북아 최강자로 활약한 고구려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그때 큰 기반이 된 것이 대일항쟁기 때 일본이 연구해놓은 고구려사 연구였다. 우리는 오랜 세월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기에 고구려 무덤 하나를 우리 손으로 발굴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남이 해준 연구를 토대로 고구려사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니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과 중국이 자유롭게 고구려 무덤을 발굴하며 연구한 가장 큰 이유는 힘 즉 국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중국은 길림성 집안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고분 재조사에 나섰다. 1966년 중국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집안 지역의 고분을 분류해놓았었다. 즉 집안 지역의 무덤군(群)을 하해방(下解放)·우산하(禹山下)·산성하(山城下)·만보정(萬寶汀)·마선구(麻線溝) 묘역으로 나누고 일련변호를 부여했다. 장군총은 우산하 묘역에 있으니 ‘우산 1호’ 광개토태왕릉은 ‘우산 541호’ 식으로 번호를 준 것이다. 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은 땅을 파 들어가 간 다음 나무로 시신과 부장품 등을 넣은 널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돌을 적당히 쌓은 후 다량의 흙을 덮었다. 이러한 무덤을 도굴하려면 두껍게 쌓인 흙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흙이 너무 두꺼워 파 들어가는 도중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도굴꾼이 매몰돼 순장되는 것이다. 때문에 경주의 고분은 도굴이 어려워 도굴을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제법 있었다. 고구려는 다른 방법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고구려는 평지에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테두리에는 큰 돌을 놓아 틀을 잡는다. 그 틀 안에는 강이나 냇가에 있는 강돌을 주워와 채웠다. 그렇게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후 제일 윗부분에 네모지게 잘 잘라낸 큰 돌로 시신과 부장품 등을 넣는 널방(무덤방 한자로는 현실·玄室로 표현하기도 한다)을 만들었다. 널방 위에는 기와지붕을 가진 사당 같은 건물을 세웠다.
    장군총 제일 위에 있는 돌로 만든 무덤방(널방이나 玄室로 부르기도 함). 이 무덤방은 거의 모든 것이 도굴됐기에 벽화 정도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이 무덤방 위에
    사당 같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추측을 하는 이유는 기와와 구운 벽돌(‘塼’ 또는 ‘전돌’이라고 한다) 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무덤방 입구를 중국의
    관리자들이 지키고 있다 (사진 이정훈).

    ㆍ화려하지만 관리가 되지 않으면 도굴 당하기 쉬운 고구려 고분
    좋은 예가 집안에 있는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큰 돌로 테두리를 치며 일곱 계단 형태로 쌓아 올렸다. 테두리를 친 큰 돌 안에는 작은 돌들을 채웠다. 이렇게 피라미드식으로 쌓은 꼭대기에 장방형으로 잘라낸 큰 돌로 널방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었다. 그리고 널방 위에는 기와지붕을 올린 사당 비슷한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덤은 잘 관리하면 정말 멋지게 보인다. 돌은 화려한 장식재이기 때문이다. 녹음이 우거진 시절은 물론이고 한겨울에도 무덤을 이루고 있는 돌은 태양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무덤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석이나 대리석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스가 대리석으로 치장을 했다면 대리석이 나오지 않는 우리는 반짝일 수 있는 돌로 치장을 한 것이다.
    거대한 돌로 테두리를 치고 그 안에는 작은 돌을 채운 일곱 개 계단형의 장군총.시신을 넣는 무덤방은 제일 위쪽에 있다.장군총의 아랫부분은 많은 무게를 받는기에
    하단부가 밀려 터져나올 수 있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지금은 ‘호분석(護墳石)’으로 부르는 아주 거대한 돌로 옆에 비스듬하게 놓아 하단부를 눌러 놓았다.
    장군총의 호분석은 한 변에 세 개씩 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장군총을 ‘우산 1호’ 고분으로 명명해 놓았다 (사진 이정훈)


    서기로는 1938년인 소화(昭和) 13년 일본의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池內宏) 등이 만든‘통구(通溝)’라는 제목의 책에 실려 있는 그 시절의 장군
    총 모습. 통구는 집안시를 가로 질러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라는 작은
    강과 집안 시내에 있는 옛 성터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만든 무덤인데도 바람에 날려 온 흙이 덮혀 나무와 풀이
    자라게 되었다(위 사진). 장군총 아래 기단에는 테두리를 이룬 큰 돌이
    무게에 눌려 밀려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더 큰 돌로 받쳐준 호분석(護墳石)
    이 지금과 똑 같이 있는 것이 보인다(아래 사진). 직접 가서 보면 호분석은
    상당히 크다. 호분석과 장군총, 장군총 뒤에 멀리 있는 산의 모습까지 고려
    하면 두 사람 뒤에 있는 거대한 호분석은 기자가 칼러로 찍은 장군총 사진
    오른쪽 끝 하단에 있는 호분석 같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앞에서 소개한
    세키노, 야쓰이 등과 함께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사 등 우리 고대사를
    만들어준 대표적인 일본 역사학자다.(출처 http://rgm-79.tistory.com/460)

    이러한 무덤 양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전방후원분을 만들며 무덤 외부를 강돌로 치장하는 전통을 낳았을 것이다. 일본은 고구려 무덤처럼 화려하게 보이기 강돌로 무덤 외부를 마감하지만 내부는 도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신라처럼 흙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고대의 일본은 우리의 아류(亞流)였다. 돌로 화려하게 치장한 만큼 이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광개토태왕비다. 광개토태왕비에 쓰여 있는 내용의 상당부분은 광개토태왕릉를 누가 어떻게 수호하라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힘이 기세등등할 때는 이러한 지시는 지켜진다. 그러나 고구려가 패망한다면 누구도 지키지 않는다. 누군가가 올라가 돌을 깨고 무덤방으로 들어가 도굴을 한다. 도굴이 된 무덤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게 되니 바람에 날려온 토사가 덮어 1938년대의 장군총처럼 초목이 자라게 된다. 장군총은 용케 호분석이 버텨주었지만 광개토태왕릉은 그렇게 못해 아랫부분이 터지면서 무덤이 허물어져 버렸다. 장군총과 같은, 아니 장군총보다 더 크고 멋졌을 광개토태왕릉은 돌무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광개토태왕릉 앞에 있는 광개토태왕비. 이 비석에서는 누가 어떻게 광개토태왕릉을 수호하라는 내용이
    많이 적혀 있다. 제대로 수호될 때 돌로 만든 광개토태왕릉은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그러나 고구려가
    망해 누구도 돌보지 않으면 금방 도굴을 당하고 허물어진다.(사진 이정훈)

    장군총과 달리 호분석이 견디지 못해 아랫 계단을 이룬 테두리 돌이 밀려 나옴으로써 무너져 버려 안에 있던 잔돌(강돌)이 쏟아져 나온 광개토태왕릉.이 능 하단부
    에는 쓰러진 호분석과 계단식으로 무덤을 만들어주었던 큰 테두리 돌이 무너져 있는 것이 보인다.(사진 이정훈)

    일본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인 인덕천왕릉 모형. 일본은 외부를 강돌로 마감한 거대한 전방후원분을 만들었다. 이는 고구려의 적석총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사진 이정훈)

    2003년 중국의 길림(吉林)성 문물고고연구소는 지안(輯安)시 마선향(麻線響) 홍성촌에서 ‘마선 2100호’로 명명해 놓은 대형 무덤을 발굴했다. 이 무덤은 장군총처럼 계단식(4단)으로 돼 있었는데 장군총과 달리 허물어져 있었다. 그 무덤에는 ‘당연히’ 도굴 구멍이 있었고 무덤방은 도굴 후 방치돼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다. 그런데 돌을 긁어내며 정밀 조사를 하자 550여점의 유물과 유물 조각이 수습되었다. 그중에 금으로 만든 달개장식이 여러 개 있었다. 달개장식 중에는 금실(金絲)을 달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금관에 달려 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금관이 있었는데 도굴꾼들이 갖고 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도굴은 근대가 아니라 봉건시대에 이뤄졌을 수도 있다. 고대에도 도굴은 중대한 범죄로 보고 도굴꾼을 검거하면 중벌을 가했다. 때문에 도굴은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활용해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가 아니면 아주 은밀하고 지독하게 행해졌다. 도굴꾼들은 값비싼 청자나 백자가 나오면 원형 그대로 갖고 나간다. 원형 그대로 갖고 나가야 제값을 받고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토기라면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금제품이 나오면 원형 그대로 갖고 나가지 않고 우그러뜨려 부피를 최소화해 더 많이 갖고 나갈 수 있게 했다. 밖으로 갖고 나간 다음에는 바로 녹여서 금덩이나 구리덩이로 유통을 시킨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더 안전하고 이득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미 도굴을 당한 마선 2100호 고분의 돌 틈에서 금제 달개장식이 나온 것은 도굴꾼들이 금관을 우그러뜨려 갖고 나가 녹였다는 뜻이다. 도굴은 어둠 속에서 한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금관을 우그러뜨릴 때 일부 달개장식이 떨어져 돌 틈으로 들어가 세월을 보낸 것이다. 금동관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한 달개장식도 수습했다.
    마선 2100호에서 재조사에서 나온 금제 관식(冠飾)들. 달개와 금줄(金絲) 등이다. 이 무덤에서 이러한 파편이 나온 것은 도굴꾼이 금관을 금덩이로 만들 요량으로
    파손해서 갖고 나갔다는 뜻이다(박선희,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253쪽 촬영)

    같은 해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는 마선향 마선총에 있어 ‘마선1000호’로 지정해 놓은 거대한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冢이라고도 한다)을 재조사했다. 과거 조사에서 이 무덤에서는 무덤방 위에 만든 건물(사당)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굳세게 있어라’는 뜻)’라는 한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됐기에 ‘천추묘’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천추묘 재조사에도 금실과 금으로 만든 달개장식이 발견되었다. 금동으로 만든 관테 조각과 이 금동관에 달았을 수 있는 금동제 달개장식도 여러 개 나왔다. 이것 역시 이 무덤에 금관과 금동관이 있었는데 파손되는 형태로 도굴당했다는 증거였다.
    2003년 광개토태왕릉 재조사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관테 조각. 이는 이 무덤에 금관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박선희, ‘우리 금관의 역사를 말한다’에서 촬영).

    광개토태왕릉 재조사에서 발견된 금동관 파편을 맞춰 놓은 것. 가운데 것은 절풍처럼
    상투를 잡아주는 ‘속관(冠)’이고 그 밑에 있는 것은 금동관의 관테 조각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이 금동관에 달린 달개장식이나 기타 부속품으로 추정된다. 이는 광개토태왕
    릉에 금동관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박선희 ‘고구려금관의 정치사’ 330쪽 촬영).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는 광개토태왕비가 있어 광개토태왕릉으로 확인된 그들은 ‘우산 541호’로 지정해놓은 거대한 돌무지무덤도 정밀 재조사했다. 그곳에서도 금관에 달았을 것이 분명한 금제 달개장식과 금실을 여럿 찾아냈다. 금동제 달개장식은 더 많이 발견되었다. 금동관의 관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관테 조각은 세 개나 찾아냈다. 돌 틈에서 발견된 이들을 모아보자 거의 한 보따리 분이었다고 한다.
    광개토태왕릉의 널방은 이 무덤의 가장 윗부분에 있다. 네모지게 깎은 돌로 만든 방이기에 쉽게 도굴
    할 수가 있다.지금은 관광객도 들어가 볼 수 있다,2003년 중국은 이미 도굴이 다 된 이 무덤 방을
    재조사해 금관과 금동관 부품을 다량으로 수집할 수 있었다(사진 이정훈)

    이는 광개토태왕릉에 금관과 금동관을 껴묻기(부장품)로 넣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어 ‘우산 1호’로 그들이 명명해놓은 장군총도 다시 조사하자 금동제 머리꽂이와 쇠로 만들 사슬 등이 나왔다. 장군총은 다른 무덤들과 달리 무너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있었으니 보다 철저히 도굴을 당한 것이다. 중국의 재조사는 고구려도 무덤에 금관이나 금동관을 무덤에 넣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의 학자들이 조작까지 하면서 추적했으나 발견하지 못한 고구려 금관과 금동관의 흔적을 동북공정을 한 중국이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김모씨가 고구려 금관이라고 하는 전강서금관을 내놓았다. 여기서 하나 유의해서 볼 것이 있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에서는 곡옥 달개 장식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라 금관과 가야 금관(리움금관)에는 원형의 작은 금판과 함께 굽은 옥(곡옥)이 달개 장식으로 달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 맨 위에 있는 사진에서 보듯 전강서금관에는 굽은 옥 달개장식이 없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 꾸미개와 뒤에서 보여줄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마한의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금동관에도 굽은 옥은 달개 장식으로 달려 있지 않다. 고구려는 유명한 옥 생산지인 수암(岫岩)과 가까이 있다. 수암은 단동에서 가까운 요동반도에 있다. 홍산에서 나오는 옥의 원 생산지는 수암이라는 주장이 많다. 중국에서는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호탄(한자로는 和田으로 적는다)도 유명한 옥 산지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옥이 우리 문화권까지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인근에 수암이라고 하는 풍부한 옥산지가 있기 때문다. 지금 한국의 사우나에 가면 옥으로 마감한 탕이 많은데, 그 옥도 대부분 수암에서 수입한 것이다. 그러한 수암과 가까이 있는 것이 고구려이고 초기의 백제였다. 그런데 이들은 금관에 옥으로 만든 달개 장식을 달지 않았다. 물론 더 많은 고구려 백제 고분을 조사해서 옥으로 만든 달개장식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나온 것으로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금관 금동관에는 굽은 옥(곡옥) 달개장식이 없다. 전강서금관에도 없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굽은 옥이 발견됐지만 관 꾸미개에 달려 있지는 않았다. 고대에는 비단이나 말총 등으로 모자를 만들고 관 꾸미개나 굽은 옥 등을 달았을 수도 있다. 무령왕릉의 관을 유기물로 만들고 관 꾸미개와 굽은옥을 달았는데 그 관이 썩어 없어졌는지는 몰라도 어쨋든 무령왕릉에서는 굽은 옥을 달개로 단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 굽은 옥만 별로도 나왔다. 그렇다면 신라와 일부 가야 금관에 달려 있는 굽은 옥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옥 산지는 춘천이다. 호 사가들 사이에서는 춘천옥으로 치장하는 것이 제법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춘천옥이 고대에도 알려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춘천옥과 수암옥은 연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신라 금관의 굽은 옥은 경옥이다. 경옥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비취다. 이러한 경옥은 아직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미스터리다. 신라의 화려한 금관에 달린 곡옥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경옥을 가장 유명한 생산지니는 미안마인데 미안마 산 경옥이 돌고 돌아 신라에 온 것일까. 고대에도 해상 무역과 실크로드를 이용한 무역은 있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뿐 먼 나라에 있는 물산이 수입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옥은 썩지도 않고 소량으로 운반할 수 있으니 무역품으로서는 최고일 수 있다. 실크로드라도 하는 육로로 들어왔다면 고구려를 거쳐 신라와 와야 하는데, 고구려 무덤에서는 왜 굽은 옥이 발견되지 않는가. 해상무역으로 왔다면 백제를 거쳤을 가능성이 있는데 왜 백제는 금관에 굽은 옥을 달지 않았는가. 이것이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가 같으면서도 다른 점인 것 같다. 같은 형의 금관 금동관을 만들어 썼지만 각각의 특색은 강했던 것이다. 왜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다른 자기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역사는 퍼즐 맞추기이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과 앞에서 보여준 연화총 등 북한 평양 강서 등에 있는 고대 무덤은 같은 양식인가. 백제도 동명왕을 시조로 모셨으니 백제도 동명왕릉은 유지할 수 있다. 이북 평양 일대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다면 고구려 시대 무덤이 즐비해야 하는데 그런가. 역사는 많은 상상과 추리를 하면서 사실에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집안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금 도금한 관 꾸미개. 이러한 자료도 고구려가 무덤에 금관이나 금동관을 넣었다는 증거가 된다(사진 이정훈)

    국립중앙박물관(서울)에 전시돼 있는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판단된 깃털 모양의
    금속제 관 꾸미개.과거 우리 조상들은 새 깃털을 꽂는‘조우관(鳥羽冠)’을 썼다고 하는데,
    조우관에서 이러한 금속제 관 꾸미개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금속제 꾸미개를 관테에
    올리면 세움장식이 된다(국립 중앙박물관).

    ㆍ황금의 나라 부여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고구려와 가장 가깝다고 하는 부여도 금제품을 좋아했다는 것은 사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수가 쓴 중국의 정사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라 밖으로 나갈 때는 비단옷이나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었다. 대인(大人)은 그 위에 여우나 살쾡이 원숭이 흑백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는다.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出國則尙繪繡錦○ 大人加狐狖狸 白黑㹦之裘 以金銀飾帽)’ 위 구절은 외국에 나가는 부여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방문한 부여인의 차림새를 기술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以金銀飾帽)’는 표현이다.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했으면 금관이나 은관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여는 황금의 나라였다는 기록도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부는 위(魏)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전국시대의 위나라 삼국시대 조조가 이끈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北魏)’나 ‘후위(後魏, 386~534)’로 부른다. 이러한 북위의 역사를 북제의 학자인 위수가 정리해 ‘위서(魏書)’로 남겼다.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황금은 부여로부터 온다(黃金出自夫餘)’는 구절이 있다. 유사한 기록이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13년조에서 위(북위)에 조공을 간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 임금을 만나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는데(…) 부여가 물길에 쫓기게 되었다. 그러한 도적 때문에 황금을 비롯한 두 물건을 위나라 임금 창고에 올리지 못한다(但黃金出自扶餘 … 扶餘爲勿吉所逐 …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사서들은 부여와 고구려가 금을 많이 다뤘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금관임을 주장하는 전강서금관을 무시하기 어려워진다. 고구려는 무덤에 금관과 금동관을 넣은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완형으로 출토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씨가 전강서금관을 내놓았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ㆍ현대 금이 아닌 고금(古金)으로 만든 것은 확실
    김씨가 내놓은 금관은 진짜 그관인가. 전강서금관이 금관인지부터 확인해보자. 이것이 고구려 시대에 만든 금동관이었다면 녹이 슬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렇지 않으니 금관으로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과학적인 확인은 해보지 않았다. 전강서금관은 금실(金絲)를 이용해 달개장식을 세움장식과 관테에 달아놓고 있다. 금실은 금을 좁은 구멍으로 사출해서 만든 것이다. 철사(鐵絲)와 같은 개념의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전해지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금실을 단 달개장식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김씨와 박 교수는 그 달개장식과 달개장식에 연결된 금실을 공주대 문화재보존학로 보내 성분 분석을 해보았다. 그 결과 금이 78.5%, 은이 19.&, 기타가 1.6%라는 결과를 받아 냈다. 금동관이 아니라 금관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것이 박 교수로 하여금 이 금관이 고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 한 이유가 되었다. 이에 대해 김씨는 “현대는 기술이 발전했기에 이러한 순도의 금관은 만들지 못한다. 현재에 금관을 만든다면 99%, 적어도 90%가 넘는 금으로 만든다. 은이나 동은 섞여 있기 힘들다. 그러나 고대에는 금을 완전히 정련해 내지 못했기에 은이나 구리가 섞여 있는 금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 금관은 옛날 기법으로 만든 고금(古金)으로 제작됐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한 이 시도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박물관계는 금관이나 금동관의 성분을 분석해본 적이 없다.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에 충실해 과학적인 분석을 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했다. 그렇다면 우리 박물관계도 신라와 가야의 금관 성분을 분석해 1500여년 전에 만든 금관은 어떤 성분의 금으로 제작했는지 추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시도는 금관과 금동관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ㆍ금관에 붙은 유기물의 때, 침착물은 위조할 수가 없다
    이 금관이 고금으로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는 고대에 제작한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의문에 대해 김씨는 이 금관에 점처럼 붙어 있는 침착물(沈着物)에 주목하라고 했다. 무덤은 갇힌 공간이기에 공기가 적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많은 산소를 소모하고 나면 산소가 사라져 금속의 부식이 억제된다. 때문에 금속 가운데 가장 먼저 부식되는 쇠도 오래 가게 된다. 그러다 발굴되면 갑자기 많은 산소와 접촉하므로 순식간에 부식된다. 현대 기술은 이 기술을 역이용해 1000여년간 부식이 억제되다 갑자기 부식한 금속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하였다. 영악한 골동품상은 이 방법으로 가짜 금속 유물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앤티크(antique) 시장에서 판매되는 금속제품이 대개 이 기술로 녹을 입힌 것들이다. 그러나 순금이나 순금에 가까운 것은 부식되지 않으니 부식 정도로 금관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 무덤 안에서는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난다. 시신과 공기 중에 있는 유기물이 처음에는 빨리 부패하다가 산소가 사라지면 아주 천천히 부패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부패된 유기물은 분해가 되는데 갇힌 공간이다 보니 밑으로 내려앉는다. 유물은 바닥에 있으니 그 위에도 내려앉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유물과 함께 있으며 유물에 침착된다. 이 침착물이 까만 점이나 반점이 된다. 이를 때로 부를 수 있는데 유기물이 변해서 오랜세월 침착되면서 만들어진 이 때는 현대 과학으로도 재현할 수가 없다. 금관이 발굴되면 대개 알코올로 닦아 이물질을 제거하는데 이 때는 알코올로 지워지지 않는다. 때문에 박물관에서는 때가 있는 상태로 금관을 전시한다. 김씨는 이러한 설명을 하며 이 금관에 붙어 있는 때(침착물)을 확대해서 찍은 사진을 제시했다.
    전강서금관에 붙어 있는 때. 이 때는 시신이나 공기 중에 있는 유기물이 밀폐돼 있어 산소가 거의 없는 곳에서 썩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갇힌 공간에서
    부패되는 유기물 성분이 금관에 내려 앉아 오랫동안 침착돼 있으면 이렇게 까만 점이나 반점을 만든다. 이러한 때는 현대 기술로 만들지 못한다.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에 전시돼 있는 가야금관(오구라금관). 이 금관 뒷부분 큰 세움장식이 왼쪽으로 올라가는 관테 부분의 얼룩 같은 검은 반점도
    유기물이 침착돼 생긴 때이다.이때는 금을 벗겨내지 않으면 제거할 수 없기에 일본도 그대로 두고 있다.

    김씨는 이 금관이 고금으로 제작됐다는 것과 함께 1500여년이라고 하는 오래 세월 동안 무덤이라고 하는 갇힌 공간에서 부패된 유기물이 침착된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 금관은 1500여년 전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삼국이 통일한 후로는 금동관 금관을 만들지 않았으니 이 금관은 삼국통일 이전인 1500여년 전에 제작한 것이어야 한다 끝으로 그에게 미안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조(祖)-부(父)-자(子) 3대에 걸쳐 금관을 비장해왔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 금관을 구입한 것은 김씨인데 구매처를 감추기 위해 니시하라는 고물행상으로부터 얼굴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가 구입한 것으로 꾸민 것은 아닌가란 의심을 해본 것 이다. 한동안 서울 인사동에서는 북한산 골동품이 거래된 적이 있었다. 중국을 출입할 수 있는 북한의 실력자들이 북한 지역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을 중국으로 갖고 나가 밀매한 것이다. 북한산 골동품인 만큼 구입자는 한국인 그중에서도 인사동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한 정보세계를 아는 이들 세계에서는 이는 소문이 파다한 진실이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북한산 골동품 거래를 이용해 북한에 ‘망원’을 구축하기도 했다. 북한산 골동품을 갖고 나오는 이로부터 골동품을 좋은 값으로 사줘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그를 통해 북한 내부 정보를 빼낸 것이다. 이러한 망원을 확대 강화하면 북한에 반 김정일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다. 김씨는 재력가이고 골동품 수집에 이력이 났으니 중국에 들어가 북한산 골동품을 사올 수 도 있다. 김씨에게 “이 금관은 혹시 북한에서 밀반출 해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출처를 밝힐 수 없어 ‘할아버지가 니시하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물어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답변을 했다. “북한산 골동품이 국내에 들어오면 매수자를 찾기 위해 사진을 돌리지 않느냐. 이 금관이 북한에서 왔다면 내가 공개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사진이 돌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금관은 내가 박선희 교수에게 공개하기 전까진 단 한 번도 사진이 돈 적이 없다.” 그는 북한산 유물이 한국에 유입되는 과정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북한에서 나온 유물의 유통 정보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금관은 그러한 루트를 거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끗하게 설명해주었다. 인사동을 거치지 않으면 북한산 유물은 한국에서 유통되기 어렵다. 이제 남은 의문은 ‘이 금관이 진짜로 고구려 것이냐’란 것뿐이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금관은 신라나 가야 금관과 기본형은 같으나 부분 모양이 다르니 금관이 신라나 가야 금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부여는 서기 346년 결국 전연의 모용황 군 공격을 받아 사실상 붕괴됐다가 41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결정타를 입는다. 그리고 494년 말갈의 침을 받아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투항했다. 그러한 부여가 금과 은으로 모자를 치장했다고 하니 부여의 금관일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백제의 금관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의문을 풀려면 우리의 금관과 금동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취재를 해봐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고대사를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역사 추적을 통해 민족의식을 갖는 것이니 정치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고대국가가 사라진 것은 전쟁과 같은 격변을 통해서였다. 고대국가가 번창한 것도 승리를 이끌어낸 전쟁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무역과 문화를 왕성하게 하는 것도 부국을 만드는 길이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전쟁과 무역이 강국을 만드는 길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시절은 각국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전쟁을 하고 동맹을 맺고 외교를 하던 가장 화려한 국제정치의 시절이었다. 중국도 그런 시기를 갖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위진남북조시대가 그런 경우다. 여러 나라고 쪼개져 있던 그 시기 각국은 살기 위해 전쟁을 하고 무역을 하고 동맹을 맺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외교전략이 합종-연횡이라는 것을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은 그러한 역사에서 나온 국제정치학적 지혜를 갖고 지금도 외교를 한다. 베트남 필리핀 등과 섬 영유권을 놓고 부딛칠 때 중국은 자국 역사에 얻은 지혜를 활용하고 있다. 일본과 다툼이 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 사태에도 적용하고 있다. 대국 행세를 하며 강하게 엄포를 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진짜 실력을 알기에 강하게 맞서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경쟁하던 시절 우리는 가장 치열한 국제정치를 겪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금관 금동관일 수 있다. 중국에는 없는 금관 금동관을 만들어야 했던데는 문화적 뿌리와 함께 정치적인 결정도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지금 한국이 처한 외교적 난제를 극복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경쟁한 시절은 최고의 전쟁기였고, 최고의 국제정치 무대였다는 것을 이해했으면 한다. 그 시절에 나온 전강서 금관의 정체를 추적하며 지금 우리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정치를 해볼 수 없는가 할 수 없는가. 표를 얻기 위해 구걸하는 그러한 정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는 거대한 정치를 그러한 노력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은 역사만 반복해서 배우는 그렇고 그런 나라의 국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동아 2014년 2월호 고구려 금관 기사 참조)
    Blog Donga   이정훈 동아일보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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