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거대한 금관 공동체 - 1

浮萍草 2014. 2. 3. 10:36
    "박선희 교수의 도전 “이것이 고구려 금관이다”-신동아 2월호 보도
    상명대 박선희 교수가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한 전강서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는 잘 알려져 있다. 신라 금관은 너무너무 유명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백제의 금관은 있는가? 혹자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금관이 나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나온 것은 금관이 아니라 관에 붙이는 금으로 만든 꾸미개(금제관식 金製冠飾)였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용 꾸미개가 각 한쌍씩 나왔다. 고대에는 비단이나 말총 대(竹), 한자로는 ‘백화수피(白樺樹皮)’로 적는 자작나무 껍질 등으로 고급 모자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자에 금제 꾸미개나 금동(金銅)으로 만든 꾸미개를 붙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관식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백제시대의 무덤에서는 완형의 금관이 출토된 것이 없다. 금동관은 출토됐다. 그런데 마한의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백제 것인지 마한 것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신라 금관은 여섯 개, 백제보다 먼저 사라진 가야의 금관은 세 개나 전해진다. 신라와 가야에서는 금동관도 다수 출토되었다.
    중국이 펼치는 동북공정에 대항할 자료를 찾기 위해 2009년 밝은 모습으로
    중국 내몽고 지역을 답사할 때의 박선희 교수는 건강까지 다쳐가며 고구려
    금관의 실존을 밝히는 책‘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를 썼다.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중국이 펼치는 동북공정을 눌러버리기 위해서였다.(사진 이정훈)

    고구려는 가야는 물론이고 백제보다 오래 존속했으니 고구려의 금관은 있는가. 이 물음에는 매우 빠르게 “없다”라는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이 대답은 “현재까지”를 전제로 해야 한다. ‘현재까지 고구려의 금관은 나온 적이 없다’로 수정해야 옳은 것이다. 고구려의 금동관도 아직 완형이 나온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현재까지를 전제로 해야 한다. 고구려를 많이 공부한 사람은 ‘아직 출토된 것이 없어 그렇지 고구려와 백제도 금관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ㆍ고구려 금관은 없다”는 정설을 깨져야 한다
    고대에는 금과 금동을 지금처럼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는 보지 않은 듯 하다. 자연 상태(광물 鑛物)에서 금과 구리는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 완벽히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금의 성분이 압도적으로 많으면 금제품 그렇지 않으면 금동제품으로 만든 듯하다. 때로는 청동으로 만든 뒤 금도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금관처럼 금 성분이 압도적으로 많은 금제 물건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금동보다는 금을 귀하게 여긴 것 같다. 금동보다는 금을 중시한 것은 금을 정련해내는 기술이 발전한 후대의 일이다. 그 전에는 금동도 금에 못지않게 중요시했다. 그래서 금동관을 만들다 금관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고구려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동관의 흔적이 나왔다. 금관과 금동관에 달았을 것이 분명한 달개장식이 고구려 고분에서 수습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서 나왔고 완형이 아닌 파편만 나왔다. 그래서 아직은 ‘고구려 금관은 없다’를 정설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금관’이라고 주장하는 완형의 금관이 나타났다.
    경인문화사를 통해 지난 해 11월 출간한 박선희 교수의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ㆍK씨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소장해왔다.
    이 주장은 지난 해 말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사학과)의 박선희 교수가 경인문화사를 통해 펴낸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란 책에 실려 있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그가 고구려 금관이라고 판단한 금관의 사진을 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문적인 학자들까지도 ‘고구려 금관은 없다’는 통념에 젖어 인정하지 않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박 교수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가려볼 생각을 하지 않는 ‘학문적 나태’에 빠져있다. 가야 금관보다는 신라 금관이 훨씬 더 화려하다. 이는 가야 금관이 신라 금관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일 수 있다. 박 교수가 제시한 고구려 금관은 고졸(古拙)한 가야 금관보다는 ‘훨씬’ 화려하다. 그러나 곡옥(曲玉)을 달고 있지 않아 많은 곡옥을 단 신라 금관보다는 ‘좀’ 수수한 편이다. 미적 수준만 놓고 따진다면 가야와 신라 금관 사이에 있으면서 신라 금관에 근접하는 멋을 갖고 있다. 박교수는 이 금관의 소유자를 한국인 김○○ 씨라고 밝혔다(그는 익명을 요구한다). 김씨는 서울 △△고와 K대 경제학과(79학번)를 졸업한 재력가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우리 유물을 수집해왔다고 한다. 때문에 생업과는 별도로 ‘문화재평론가’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외부인을 만날 때는 주로 ‘○○역사문화연구소 이사’ 명함을 내놓는다.
    ㆍ복식에서 시작해 冠으로 연구 확대
    다시 박교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중국 사료를 분석해 1980년대 초 ‘고조선은 이북의 평양이 아닌 중국 요서 지역에 있었다. 한4군도 북한 지역이 아닌 요동-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 우리 역사학계를 뒤흔들며 ‘민족사관’의 기틀을 마련한 윤내현 전 단국대 교수의 제자다
    고조선이 북한이 아닌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 우리 역사학계를
    뒤흔들었던 윤내현 전 단국대 교수. 박선희 교수는 윤내현 전 교수의 제자다.

    박 교수의 전공은 복식사(服飾史)이다.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와 시신이 입고 있는 직물을 연구해 고대의 옷을 찾아내왔다. 그는 고대 우리 조상이 입었던 옷은 중국인들이 착용한 옷과 전혀 형식이 다르다고 확신한다. 이는 중국과 우리가 다른 뿌리에서 출발해 문화를 만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문화의 뿌리를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峯)시 홍산(紅山) 일대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홍산문화’로 불리는 거대한 신석기 문명으로 보고 있다. 이 문명에서 하가점 하층 문화라고 하는 청동기 문화가 발생했는데 그 때는 고조선 형성기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홍산과 하가점 일대에는 그 시절 사람들이 옥(玉)을 갈아 사람 모양으로 만든 것이 출토된다. 사람 모양의 옥기가 그것이다. 사람 모양으로 토기(토용)도 적잖게 출토되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 그는 고대 우리 선조가 입은 옷을 추적해 왔다. 홍산문화는 중국 문화를 만든 황화문명과는 멀리 떨어져 별도로 일어났으니 우리 조상은 중국인들과 전혀 다른 말을 쓰고 전혀 다른 옷을 해 입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전 3세기 중국 연(燕)나라의 진개가 이끄는 군대가 고조선을 공격하고 서기전 2세기 말에는 한(漢)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해 한4군을 설치하면서 우리는 중국문화와 본격적으로 접촉했다고 본다. 그리고 서기 7세기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삼국을 통일하면서 우리는 급속히 중국에 가까워졌다고 본다. 통일을 한 신라는 우리 고유의 관복을 버리고 중국식 관복을 도입했다. 중국화의 길로 간 것이다. 박 교수는 신라가 통일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복식이 많이 유지됐다고 보고 그것을 찾아왔다. 요즘 정부에서 내놓은 출판물 중에 단군이나 해모수 주몽 등 우리의 고대 조상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대부분 박 교수의 고증을 거쳐 그려진 것이다. 박 교수의 고증 이후 우표를 포함해 정부에서 나오는 간행물 속의 우리 조상은 더 이상 중국풍의 옷을 입고 있지 않게 되었다. 복식을 연구하던 그는 모자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중국 서안에 있는 진시황 병마(兵馬)용의 토용들. 옆상투를 튼 것이 많다. 정수리에 바로 올리는 상투가 아니라 약간 옆에 상투를 튼 것이다.이들과 비슷하게 우리
    선조 남성들도 상투를 틀었다.(사진 이정훈)

    ㆍ고대의 남성들은 긴 머리카락을 처리하기 위해 상투를 틀었다
    지금은 단발령(1895년 공표) 이후 시대인지라 모자를 잘 쓰지 않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에는 옷을 입으면 당연히 관을 썼다. 옷과 모자는 같이 가는 것이니 복식을 연구하면 자연스럽게도 모자도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화 되기 전 우리의 의복이 중국과 달랐듯 모자도 달랐다는 것을 본 것이다. 그는 ‘중국화로 가기’ 전인 초기 삼국시대까지 우리는 중국인들과 전혀 다른 모자를 썼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자를 써야 했던 이유는 긴 머리를 처리하기 위해서이다. 옛날에는 남성들도 머리를 길렀는데 활동을 하려면 그 머리칼을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상투다. 상투는 우리 남성만 튼 것이 아니라 중국 남성들도 일부 틀었다. 중국 진시황의 병마용 있는 병사 토용(土俑)은 대부분 옆상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남성 헤어스타일은 다양했다. 반면 우리는 영역이 좁아서인지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지 못했다. 우리의 선조 남성들은 대부분이 상투를 튼 것으로 보인다. 단순화된 헤어 스타일을 가진 것이다. 실재로 홍산지역에서 발견되는 남성 토용은 머리에 볼록하게 솟은 것이 있어 그 시대 남성이 상투를 틀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긴 머리칼을 처리하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상투를 튼 것이다. 상투는 북방에 있었던 종족의 남성들이 보편적인 헤어스타일로 보인다. 이는 사료로도 뒷받침 된다.
    고조선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내몽골자치구 오한기의 초모산 유적
    에서 나온 돌로 만든 남성상.당시 남성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그 위에 상투 덮개
    같은 것을 올렸다.이 남성 머리에는 상투를 덮는 절풍 같은 것이 있었다.때문에
    그것(절풍)을 턱밑으로 묶어주는 끈 모양의 선이 얼굴에 파여져 있었다.고대
    남성들은 상투를 틀었다.

    ㆍ우리 선조 남성들은 상투마개로 고깔과 절풍을 썼다
    중국 사서인 ‘사기’는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조선 땅에 들어갈 때 ‘추계만이복(추계蠻夷服)’을 하고 갔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는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고 갔다는 뜻이다. 당시 고조선 사람들은 상투를 틀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우리는 오랑캐이니 ‘만이’가 된다. 연나라 사람인 위만은 우리에 섞이기 위해 상투를 틀고 만이복을 입고 고조선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한전은 남자들이 ‘괴두노계(魁頭露紒)’를 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진서도 마한조에 괴두노계라는 표현을 해놓았다. 괴두는 쪽을 찌거나 상투를 틀지 않아 풀어져 흐트러진 머리이고 노계는 맨상투머리다. 여기서 ‘계’는 ‘상투 계(紒)’자이니 노계는 상투를 그래도 드러낸 머리가 된다. 상투는 우리 조상 성인 남자들 그 중에서 행세께나 하는 이들이 한 보편적인 헤어 스타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상투를 튼 것은 행동을 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인데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상투에서 머리카락이 삐져나오게 된다. 이는 보기에도 좋지 않고 행동을 하는데도 불편하니 상투에서 삐져나온 머리가 흘러내지 않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이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이 주로 썼던 ‘탕건’이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이 상투를 잡아주는 ‘속관’으로 썼던 탕건. 조선의 남성 양반은 탕건 위에 정자관이나 갓을 썼다.탕건은 고깔이나 절풍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으로
    보인다.출처 문화재청

    말 꼬리 털인 말총이나 얇게 자른 대나무를 써서 주로 만든 탕건은 이마까지 덮기에 상투를 완벽하게 고정해준다. 탕건은 순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망건(網巾)’으로 적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망건 위에 갓이나 정자관을 썼다. 망건은 상투를 잡아주는 ‘속관(冠)’ 역할을 한 것이고 그 위에 정식 관인 갓이나 정자관을 썼다. 이렇게 두 개의 관을 쓰는 것은 후대의 일이고 고대에는 상투를 잡아주는 한 개의 모자만 쓴 것으로 본다. 상투를 잡아주는 것이니 전체 머리를 덮지 않는다. 상투덥개, 상투 가리개 역할만 하는 것인데 이를 한자로 ‘변(弁)’으로 적었다. 변(弁)의 뜻은 ‘고깔’이다. ‘상투를 튼 고대 우리 남성들이 상투를 고정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깔을 썼다’는 것은 정설이다.
    ㆍ절풍을 쓰고 새 깃털 꽂아 멋을 내
    이러한 고깔을 탕건처럼 보다 좋은 재질로 멋있게 만든 것이 ‘절풍(折風)’이다. 높은 사람일수록 절풍을 쓰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고깔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절풍은 상투만 잡아주는 것인데 이것이 조선시대에는 이마까지 씌우는 탕건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 그려진 고구려 무사.고구려인은 같은 시기 중국인들과
    전혀 다른 옷과 모자를 썼다.상투를 덮는 절풍을 쓴 것이다.절풍 옆에는 멋을 내기
    위해 새 깃털 등을 꽂았다.위키백과

    그러나 고대에는 두 개의 관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본다. 남성들은 고깔이나 절풍만 쓰고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절풍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시대 무덤인 무용총의 수렵도에 잘 나와 있다. 수렵도에서 사냥을 하는 무사들이 머리에 씌운 것이 바로 절풍이다. 그리고 절풍 옆에 멋을 내기 위해 새 깃털 등을 꽂았다.
    ㆍ정자관은 우리의 고유 모자 아니다.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의 심벌이다
    박 교수는 절풍을 쓰고 그 옆에 깃털을 꽂는 전통에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금동관 금관 문화가 만들어졌다 본다. 그가 금관 금동관은 우리만의 고유 문화라고 하기에 무심코 조선시대 선비들이 쓴 정자관도 우리 고유의 모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가 혼이 났다. 정자관은 5000원짜리 지폐에 있는 이율곡이 쓰고 있는 관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실내에 있을 대는 주로 정자관을 썼고 외출할 때는 갓을 섰다.
    정자관을 쓴 이율곡 초상화를 넣은 5000원권 위키백과

    정자관(程子冠)이야말로 모화(慕華)사상과 사대(事大)주의의 심벌 아닌가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략을 받기 전 송(宋, 금나라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간 남송과 구분하기 위해 북송으로도 적는다)나라를 대표한 유학자가 정호(程顥,1032~ 1085)-정이(程頤,1033~1107) 형제인데 그들이 썼던 것이 바로 그 관입니다. 주돈이한테 공부를 해 유학의 대가가 된 이들은 2명의 정자라는 뜻으로 ‘이정자(二程子)’, 줄여서 ‘정자(程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형제의 학문을 발전시켜 집대성한 이가 훗날 ‘주자(朱子)’로 불리게 된 남송 때의 학자 주희(朱熹, 1130~1200)고요. 정자와 주자가 한 유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 하다가, 주자만을 강조해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주자학이 바로 조선의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신봉한 성리학(性理學) 아닙니까. 원-명 시절을 거치면서 중국은 더 이상 성리학을 중시하지 않았는데 조선은 끝없이 받들다 몰락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조선의 사대부들이 주자학-정주학을 한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쓴 것이 정자관입니다. 그런 관을 대한민국의 상징일 수 있는 화폐 인물에 씌워놓다니 말이 됩니까. 아니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이 절정에 올라 의복과 관이 전부 중국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방법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주체성 있는 역사’는 중국에 갇혀 있는 역사가 됩니다. 그러니 중국은 항상 우리를 얕잡아 보는 것입니다.
    ㆍ깃털 장식 역할을 한 금동관 금관
    정자관에 대한 정리를 해준 그는 금동관과 금관이 등장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추정해주었다. “혹자는 금동관 금관을 죽은 지도자를 위한 부장품을 보는데,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고대의 우리 지도자가 금동관과 금관을 바로 썼다고 보면 이는 착각 입니다. 남성 지도자라면 상투를 잡아주는 절풍을 반드시 쓰고 금동관이나 금관을 썼다고 봐야 합니다. 이때의 금동관 금관은 무용총 무사가 절풍 주위에 꽂은 깃털 장식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봐야 합니다. 깃털 대신 번쩍이는 금속 장식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장식을 머리에 꽂을 수 없으니 그것을 붙일 수 있는 ‘관(冠)테’를 만든 것 같습니다. 관테 위에 붙여 놓은 세움장식이 바로 깃털입니다. ‘세움장식’을 화려하게 하기 위해 많은 ‘달개장식’도 달았습니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 우리는 일본이 싫다고 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일본인이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금관에서 머리에 올리는 부분을
    일본인이 지은 대로 대륜(臺輪)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관테’로 관테 위
    에 있는 입식(立飾)은 ‘세움장식’으로 관테와 세움장식에 달랑달랑 달린
    금판과 곡옥은 영락(瓔珞)이 아니라 ‘달개장식’으로 불러야 한다.용어
    부터 우리화하는 것이 민족사관을 세우는 길이다.이 금관을 앞에 사진
    이 있는 고구려 금관과 비교해보면 다른 특징이 발견된다. - 문화재청

    ㆍ금관 금동관은 절풍과 한 세트를 이뤘다
    그는 금관과 금동관을 고대의 우리 지도자들이 의식을 할 때 쓴 관으로 보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넣은 부장용품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살아 있을 때 의식용으로 썼으니 죽은 다음에도 부장품으로 넣어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거듭해서 금관 금동관은 절풍과 한 세트라는 것을 강조했다.
    천마총과(좌) 금관총(우)의 금제관모. 이것은 상투를 잡아주는 절풍으로 보아야 한다. 문화재청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절풍을 외면하고 금관 금동관만 보고 있어요. 금관이 나온 신라 고분에서는 절풍이 나왔는데 금관 별개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절풍은 상투를 잡아주는 것이니 작아서 머리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자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고대인의 모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입니다. 금관총과 천마총에서는 금으로 된 절풍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금제관모(金製冠帽)’로 명명해 놓았는데 저는 ‘금제절풍’으로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금제관모는 모자가 아니기에 머리에 쓸 수 없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데 관모라고 해놓았으니 고대 유물에 대한 해석이 계속 어긋나는 것입니다. 금이나 금동으로 만든 절풍은 실생활에서는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절풍은 부드러워야 하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행사라면 금제절풍으로 상투를 고정하고 금관을 쓰고 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온 머리가 황금으로 빛나는 화려한 모습이었겠지요. 절풍이나 절풍으로 묶어준 머리에 다른 관을 쓰고 금제 꾸미개로 치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예가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꾸미개입니다. 꾸미개로 할 것이나 관으로 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기술적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박 교수로부터 고대의 모자에 대해 긴 설명을 들은 것은 고구려 금관을 소재로 한 우리의 금관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고대인들이 쓴 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박선희 교수가 김모씨가 내놓은 금관을 고구려 금관으로 규정했다. 그것도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라는 단행본을 통해서. 고구려는 과연 금관을 만들었을까. 지금부터 길고 긴 금관 탐험을 해보기로 한다. 금관에 대한 탐구는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상 최초의 고구려 금관 출현에 대해서는 신동아 2014년 2월호가 상세히 보도했다. 신동아 2월호 참조 요망)
    Blog Donga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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