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거대한 금관 공동체 - 3

浮萍草 2014. 2. 3. 12:59
    "니시하라는 누구인가
    니시하라는 전쟁의 광풍이 세상을 덮은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판매했다 연화총은 이미 도굴 당해 못 하나만 발견되었다(1912년 일본이 한 조사에서)
    ‘니시하라’와 ‘평남 강서군’은 기자의 화두가 됐다. 둘은 이 금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희미한 불빛이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저 불빛은 안전한 항구로 안내해주는 등대불인가. 고구려는 과연 금관을 제작했는가. 이 금관을 갖고 있는 김씨도 궁금했다. 그는 어떤 연유로 이 금관을 소유하게 됐는가. 박선희 교수에게 먼저 이 금관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금관은 도굴 형식으로 나왔을 것이니 도굴과 문화재는 어떤 관계인가. 수많은 궁금증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의문을 풀어보기로 했다.
    ㆍ할아버지가 구입해 서울 집으로 보냈다
    김씨는 이 금관의 출토 경위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대일항쟁기 함남 원산에서 사업을 했던 조부가 ‘니시하라 요우세이’로 읽어야 할 듯한 ‘서원용성(西原用成)’이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이 금관을 구입한 것 으로 안다”는 것이 전부였다. 할아버지가 구입해 아버지를 거쳐 그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는 1917년생, 97세로 현재 생존해 계신다. 그러나 워낙 연로해 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그는 이 금관을 구입한 조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원산에서 만주로 소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해 큰돈을 모았던 조부는 광복 후 월남하지 못했고 그는 6·25전쟁이 끝난 1960년대 초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모는 6남매(2남4녀)를 뒀다는데 장남이 그의 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아버지)은 일본으로 보내 주오(中央)대를 다니게 하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성남중에 다니게 했다. 그에게는 고모가 되는 딸들은 원산에서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플래시 불빛을 받아 그림자 춤을 추는 전강서 금관, 일명 고구려 금관(촬영 이정훈)

    광복이 후 바로 분단이 됐기에 일본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원산으로 가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서울 신길동 집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간 비밀통로가 있어 가끔은 오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할아버지가 골동품 수집에 대단한 취미가 있어 오래전부터 상당한 유물을 수집했다. 할아버지는 이러한 유물을 둘째 아들을 공부시킬 때부터 그랬는지 서울 (신길동) 집에 보내 상당부분을 보관해두었다. 그렇게 양쪽 살림을 하는 상태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
    ㆍ25전쟁 때에도 보관된 유물들
    그의 아버지는 이 유물을 감추고 피난 갔다가 서울 수복 후 돌아와 보니 다행히 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전쟁 통에 남한에 남은 유일한 핏줄인 동생을 잃어버렸다(행방불명). 아버지는 혼자가 된 것. 그러나 한국에는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재산이 많아  아버지는 유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지나 그가 태어났다. 재산이 있었던 그의 아버지도 골동품을 수집했다. 그는 “철이 든 뒤로 우리 집에 골동품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았기에 아버지는 중요한 것만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이 금관이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큰 취미가 없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라고 말했다. 서울 O고를 거쳐 K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화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도 유물 수집을 시작한 것.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기에 보통 사람처럼 먹고사는 일로 급급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재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문화재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즐겨 사용한다. 외부인을 만날 때는 ‘○○역사문화연구소’ 이사 명함을 내놓는다. 그리고 다른 K대에서 문화재보존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집에는 유물이 넘쳐 낳기에 그는 3대에 걸쳐 수집한 유물을 고려대 중앙박물관, 단국대 석주선기념관, 상명대 계당박물관, 전북 부안의 청자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15,6여년 전 그는 인연 있는 상명대 사학과 교수팀과 도예지 답사를 갔다가 함께 온 박선희 교수와 인사했다. 둘은 ‘주체성 있는 역사’에 관심이 일치했기에 가끔 만나면 토론을 하며 교분을 쌓아갔다. 그리고 2003년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동북공정을 펼치는 것을 목도했다. 그는 그의 집에 고구려 금관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중국에서는 금관이 단 한 점도 나온 게 없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에서 제작한 금관을 고구려도 제작했다면 고구려는 우리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라는 생각을 한 것. 그는 금관을 싸놓은 보따리에 들어 있던 명함을 떠올렸다. 그러나 강서군에서 출토됐다는 의미의 글씨가 쓰인 니시하라 명함만으로는 이 금관이 고구려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ㆍ박선희 교수 책 계기로 금관 공개
    그리고 5년이 지난 2008년 박선희 교수가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지식산업사 간)’란 책을 출간했다며 한 권을 보내왔다. 복식(服飾)사가 주전공인 박교수는 이 책에서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기 전까지 우리는 고조선 시대부터 써온 ‘꼬깔’류의 모자를 써왔는데 여기에서 금동관과 금관이 나왔다고 정리했다. 이 책을 읽어본 김씨가 박 교수를 만나 집에 보관해둔 고구려 금관을 보여주었다. 무릎은 “탁” 친 박교수는 그때부터 고구려 금관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중국에서 나온 여러 자료를 모아 연구한 끝에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란 책을 내놓게 되었다. 이 책에서 박 교수는 전강서금관을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했다. 이런 인연이 있었기에 김씨는 박 교수에게 금관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들었지만 그것으로는 이 금관이 고구려 것이라는 확신을 하기엔 부족했다. 때문에 기자는 이것저것 자료를 뒤적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강서군의 보원면과 학림면을 통합해 보림면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림면은 1914년 이후 등장했으니 니시하라는 1914년 이후 이 명함을 사용한 것이 된다. 그리고 주목한 것이 니시하라의 주소지인 명륜정(明倫町)이다. 명륜정은 지금의 명륜동이다. 명륜정은 성균관이 가까이 있기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1935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 수가 서울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하는 11만 4000여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개항 후 한성(서울)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남산 밑의 명동 회현동 필동 등에 모여 살았다. 그리고 후암동 청파동 등 용산 일대로 거주지를 확대했다. 종로 북쪽은 조선인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일본인들은 신개발지라고 할 수 있는 명동 회현동 일본군 주둔지인 용산 일대에는 많이 거주했어도 사대부 출신 조선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종로 북쪽으로는 잘 진출 하지 못했다. 명륜동에도 일본인이 들어와 살 수는 있지만 명륜동은 그래도 조선인들이 많이 산 곳이니 쉽게 들어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주소로만 본다면 니시하라는 조선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대일항쟁기 고물행상(골동품상)을 하려면 조선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러한 일은 일본인보다는 조선인이 하기에 좋다. 그렇다면 니시하라는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의심은 니시하라의 이름인 ‘용성(用成)’이 일본인에게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욱 커졌다. 用成은 조선인 이름에서 많이 보이는 한자다. 그렇다면 성은 일본식으로 바꾸고 이름은 그대로 쓰는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고물행상이 이 금관을 김씨 조부에게 팔았는지도 모른다.
    ㆍ1943년 종로구 생겼으니 니시하라는 1943년 이후 이 금관을 거래했다
    직업명은 ‘고물행상’, 이름은 ‘니시하라 요우세이(西原用成)’, 주소는 ‘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로 찍혀 있는 니시하라의 명함. 뒷면에는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금관’이라는 한자가 손글씨로 씌여 있다

    일제는 1939년 창씨개명에 관한 법을 만들어 1940년부터 시행했으니 니시하라가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이라면 그는 1940년 이후 이 금관을 김씨 조부에게 판 것이 된다. 그러나 일부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전에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으니 니시하라를 1940년대에 활동한 사람으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명륜정 3정목 77번지를 추적해 보아야 한다. 그곳에 니시하라라는 사람이 실제로 살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물론 전세로 있었다면 추적힐 수 없지만 하는데까지 해보는 것이다. 안전행정부 측에 이 주소지에 대해 알고 싶다고 문의했더니 대일항쟁기 때 일제가 만든 지적도에 그 주소지가 있으면 그 땅 소유자를 찾을 수도 있다는 힌트를 주었다. 대일항쟁기에 만든 지적도는 국가기록원에 있을 것이라는 답도 주었다. 그 즉시 국가기록원에 접촉했더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지적도에 명륜정이 없다고 하더니 좀더 알아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앴다. 대일항쟁기 때 일제가 만든 지적도에 명륜정이라는 지명이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니시하라 명함은 가짜인가? 다음날 국가기록원의 담당자가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1912년 일제는 토지조사령을 시행해 토지 소유주를 확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3년에서 1914년 사이 전국의 지적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지적도가 등장한 최초의 계기인데 이 지적도가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다. 그후 지적도는 조금씩 변경돼 왔는데 그때마다 각각의 지번 소유자 이름을 적어놓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기자가 요구한 것은 그 지번이 있어야 땅 소유자 추적이 가능하다.< 때문에 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를 찾아보았는데 국가기록원이 갖고 있는 지적도에는 그러한 주소지가 없었다. 종로구라는 지명도 없었다 보다 상세히 살펴보니 지금의 명륜동은 지적도 상에서는 동부에 속하는 이숭일동(崇一洞) 숭이동(崇二洞) 지역으로 명명돼 있는 것 같았다. 종로구와 명륜동은 상당히 오래된 이름인 것 같은데 왜 일제 지적도에는 종로구가 동부로 명륜동이 숭일동과 숭이동 지역으로 표기돼 있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알아보았다. 그 결과 명륜정이라는 지명은 1936년 탄생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런데 명륜정이라는 지명이 생긴 다음부터는 일제도 중일전쟁을 하느라 그랬는지 지적도 갱신을 하지 않아 기자가 말한 그 주소지가 지적도에 없다는 것이다.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가 지적도에 없으니 그 땅 소유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는 자세하고도 친절한 설명이었다. 꽝 하는 충격이 오는 설명이었다. 그 즉시 서울 종로구 역사를 찾아보니 경성부에 구가 생긴 것은 1943년이었다. 니시하라의 주소는 경성부 종로구 명륜정으로 돼 있으니 그렇다면 니시하라는 1943년 이후 이 명함을 사용한 것이 된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우리는 정을 폐지하고 동을 사용했으니 그때부터는 명륜정이 아니라 명륜동이 된다. 광복 후 우리는 더 이상 일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고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생업을 잃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니시하라의 명함을 근거로 하면 그는 1943년과 광복을 한 1945년 사이에 이 금관을 김씨 조부에게 판매한 것이 된다.
    ㆍ모든 것이 긴박했던 1943~1945년. 그러한 때 이 금관은 매매 되었다
    1943년과 1945년 사이는 모든 것이 긴박했다. 태평양으로 진출했던 일본군이 연속해서 미군에게 패할 때였다. 미국은 폭격기를 띄워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본은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미군의 공격으로 자신들이 희생되지 않을까 불안에 떤 사람들이 많았다.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 주요 도시에서는 주민들이 방공호로 대피하는 소개 훈련을 반복했다. 미군은 1942년 둘리틀 중령이 이끈 B-25 폭격기 편대로 일본 도쿄를 처음 폭격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은 깜짝 놀라 방공호 대피 훈련과 폭격을 받아 불이 났을 때 이를 끄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 시기 일본 해군 함대는 미국 해군 함대와의 싸움에서 패하기 시작했다. 1943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공격에 나선 일본 연합함대가 미국 함대에 걸려 패배하면서 태평양 전쟁의 전세는 미국이 우세한 쪽으로 역전되었다. 그후 미국 해군과 해병대는 일본이 차지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공격해 탈환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는 B-29 대형 폭격기를 개발한 미국이 이 폭격기를 동원해 일본 본토를 때리는 폭격을 재개했다. 그리고 일본의 영토인 이와지마(유황도)를 시작으로 일본의 영토들이 미군에 점령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차지했던 섬을 미군에 내주는 것이었으나 이오지마부터는 본래 일본의 섬이었던 것이 미군에게 넘어 갔으니 일본은 극도로 긴장했다. 당연히 조선의 분위기도 경색되었다. 그렇다면 생존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에 비전해온 보물을 내놓은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김씨의 조부는 그런 상황에서 니시하라의 중개로 이 금관을 구입한 것이 아닐까. 원산에서 사업을 했으면 그는 일본인들과 많은 거래를 했을 터이니 모든 것이 불안해 이 금관을 비롯해 확보한 유물을 아들이 있는 서울 집으로 몰래 보내놓았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1945년 무렵이었다면 그의 할아버지는 더욱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니시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보물은 세상이 불안할 때 나온다. 1943년에서 1945년 사이는 사상최대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으로 온 세계가 전쟁으로 신음을 하던 절망의 시대였다. 1945년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다. 일본은 최악의 상황을 빠져든 것이다. 니시하라가 일본인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생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불안했을 터이니 그때 이 금관을 알고 지내던 유력자 김씨 할아버지에게 판매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추측을 해보았지만 더 이상의 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니시하라에 대해 기자는 여기까지 추적했다. 그리고 전강서금관이 나온 평남 강서군에 대한 추적에 나섰다.
    ㆍ일본군 위생병이 강서의 고분을 굴착해. 그의 보고로 세키노가 조사 나서
    평남 강서군 일대에는 ‘강서대묘’를 비롯해 1912년 이전부터 고구려 것으로 판단한 고분이 많았다. 1912년 강서군수는 그 곳에 있는 한 고분을 도굴한 적이 있다. 그러니 정말로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 고구려 고분이 있는지를 추적한 것. 이러한 취재 역시 일본 자료를 살펴보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12년에 강서군수가 그곳에 있는 한 무덤을 도굴했다는 것 등도 전부 일본 기록에 있는 것이 기 때문이다. 대일항쟁기 때 일제는 강서군을 비롯한 평양도 지역과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그 결과를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정리해 놓았다. 때문에 일본어로 쓰여 있는 ‘조선고적도보’는 지금도 고구려 고분을 연구할 때는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고적도보’ 등을 볼 수 있나 찾아보다가 2010년 동북아역사재단이 4권으로 편찬한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이라는 도록을 만났다. 이 재단의 김현숙 연구위원과 경북대 고고인류학과의 정인성 교수팀이 제작한 이 도록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1905년 일본 육군 15사단 58연대 3대대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평양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 부대 위생병인 오타 후쿠조(太田福藏)가 평양에 가까운 강서군에 8개월가량 파견나가 있게 되었다. 그때 오타는 강서군수인 조선인 이우영(李宇榮)이 그 전해(1904) 강서군에 있는 대묘와 중묘를 굴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타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고 이우영 군수와 접촉해 1906년 11월 26일 강서군의 한 고구려 무덤을 굴착했다. 3일 후 이들은 석실에 도달했으나 석실 안에는 이미 도굴당한 듯 부장품이 없고 벽화만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시절 오카무라 코이치(岡村幸一)이라는 일본인도 강서군수와 접촉한 후 또 다른 고구려 무덤을 굴착해 안에 벽화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위생병 오타는 도쿄미술대학에 다니다 입대한 청년이었다. 복학한 그는 그의 학교로 출강하는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1867~1935)에게 강서에 있는 고구려 무덤 굴착을 보고했다. 세키노는 1901년부터 동경대 공대 조교수로 임용된 학자로 1902년부터 이 대학의 지시로 계속 한반도의 고건축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키노였으니 오타의 보고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09년 세키노는 조사단을 만들어 평안남도 강서군 남포부 용강군 등에 있는 고구려 무덤을 집중적으로 발굴 조사하게 되었다. 이 조사에 조수로 참여한 이가 동경제국대 사학과 출신의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1880~1959)였다. 세키노 등은 이 연구로 훗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란 책을 출간해 프랑스에서 쥴리앙 상을 받는 등 한국 전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 강서 지역에 있는 고분을 일본군 위생병이 알고 굴착을 한 후 그의 스승이 나서서 전문적으로 조사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1905년 조선은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를 받는 반 식민지가 되고 1910년에는 일본에 병합됐으니 일본인들은 조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위생병이 조선의 관리와 함께 고분을 발굴하고 그 위생병의 보고를 받은 학자가 발굴을 하고 그런데 그때 이미 일본은 학자들을 동원해 조선의 모든 것을 조사하고 있었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자국의 고분은 발굴하기 어려워도 식민지의 고분이라면 연습삼아 발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찹찹해졌다. 식민지라는 것은 이러한 처지이구나. 우리는 우리 손으로 고구려 고분을 발굴해본 적이 없는데. 우리의 고구려사는 일본인들의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일본인들이 만들어주었구나…
    ㆍ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 있는 연화총
    동북아역사재단이 낸 이 도록에는 조선고적도보 등을 토대로 일제가 조사한 고구려 고분 리스트가 있었다. 이 목록을 살펴보니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일제가 조사한 고구려 고분이 딱 하나 있었다. 무덤 천장에 연꽃무니 그림이 있었다고 해서 일제가 ‘연화총(蓮花塚)으로 명명한 것이 그것이었다.
    세키노 다다스(좌) 야쓰이 세이이치(우). 세키노는 러일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한 제자가 강서 지역에 파견나가 있다가 그 지역의 고분을 발굴해 본 보고를 받고
    야쓰이와 함께 강서 지역의 고분을 집중 발굴해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사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다. 

    1912년 9월 강서군 학림면(보림면) 간성리에 있는 연화총을 일제가 발굴하기 전에 찍은 사진

    발굴 후 일제 학자들이 그려놓은 연화총의 200분의 1 축약 실측도. 모두 동북아역사재단이 편찬한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제 1권에 실려 있는 것인데 재촬영했다
    (이정훈 촬영) 

    일본인 학자들이 천연색으로 그린 연화총 내부도

    연화총 조사는 바로 세키노 다다스와 훗날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 등을 조사해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구려사를 만든 야쓰이 세이이치가 시도했다. 두 사람은 고조선사도 만들어냈는데 그때 이들은 ‘낙랑군 등 한4군이 북한에 있었다’고 비정해 지금도 우리는 한4군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배우고 있다. 중국의 많은 사료들은 한4군이 요서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데도. 갑갑한 반도사관을 만들어낸 장본인일 수 있는 두 사람은 1912년 9월 12일 연화총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미 도굴을 당해 쇠로 만든 못 하나만 발견했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조사단은 연화총 내부 실측도 등을 상세히 그린 보고서를 남겨 놓았는데, 이 도록에 그것이 실려 있었다. 그때는 보원면과 학림면을 통합해 보림면을 만들기(1914년) 전이라 간성리는 학림면 소속으로 돼 있었다. 그렇다면 1912년 이전에 누군가가 연화총을 도굴해 이 금관을 갖고 있다가 보림면이 만들어진 1914년 이후 니시하라에게 판매했고 니시하라는 1936년 이후 김씨 조부에게 판매한 것일까. 위생병 오타는 강서군에서 조선인들이 고분을 굴착했고 그도 뚫었다고 했으니 그때 어느 고분에서 누군가가 이 금관을 꺼낸 것일까 등의 숱한 의문이 일어났지만 더 이상 답을 찾기 어려웠다.
    ㆍ일본 텐리대학이 갖고 있는 이상한 고구려 금동관
    기자의 관심을 과연 고구려는 금관을 만들었는지로 옮겨갔다. 고구려에서 금관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이 금관도 고구려 것일 수 있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금관이 없다면 금동관이라도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도록을 살펴보던 기자는 2권에서 일본 텐리(天理)대학의 부속박물관인 ‘텐리참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구려 금동관 하나를 발견했다. 텐리참고관은 이 금동관과 함께 고구려 와당 등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유물은 뒤에서 설명할 일본인 고고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제공한 것이라고 한다. 우메하라 스에지는 연화총을 발굴한 세키노, 이에야스와 더불어 반드시 기억해둬야 할 이름이다.  우리가 배우는 반도사관을 만들어준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단순히 고구려 금관을 추적하기 위해 이 연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 금관 추적을 통해 우리 역사학계에 덕지덕지 쌓여 있는 식민사관을 고발하고 이 연재를 시작했다. 이 금동관은 신라의 금관이나 금동관, 가야의 금관이나 금동관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꾸미개 그리고 전강서군금관과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관테와 세움장식이 있는 것은 같으나 사진에서 보듯이 그 모양이 크게 다르다. 텐리대 측은 이것을 ‘금동제 투조관(透彫冠)’으로 명명해 놓았다. 투조는 불필요한 부분이나 여백은 파내 앞뒤가 뚫리게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금동관이나 금관은 나온 적이 없었다.
    일본 텐리(天理)대학 부속의 ‘텐리참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구려 금동관.신라 고분을 발굴해 금관을 찾아낸 우메하라 스에지가 이 대학에 제공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 금동관 안쪽 아래에는 철판으로 만든 테가 있는데, 이 철제 테는  우메하라나 우메하라 제자가 넣은 것으로 보인다.철테를 밑에 돌리고 금동조각을 붙여 금동관처럼
    만든 것이다.따라서 이 금동관은 조작을 한 것이 된다.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에서 재촬영한 것이다(촬영 이정훈).

    이 금동관의 관테는 쇠로 돼 있는데 이 쇠는 현대 기술로 만든 것이다. 학자들은 이 금동관은 부서진 상태로 나왔기에 우메하라 측이 쇠로 관테를 만들어 세움장식 등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금동관은 대일항쟁기 때 일본인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우메하라가 쇠테로 복원한 부품은 애초 금동관의 부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움장식으로 쓴 금동투조는 금동관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금동 투조는 관이 아닌 전혀 다른 유물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런데 우메하라 세력이 쇠테를 이용해 갖다 붙여 금동관처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품어야 할 궁금증은 우메하라 세력이 왜 이런 장난을 쳤느냐는 것이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우메하라는 세계 최초로 나온 금관인 금관총 금관의 발굴 보고서를 쓴 사람이다. 이어 금령총을 발굴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금관을 발굴해냈다. 때문에 신라 금관 발굴사를 정리할 때마다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일제는 전남 나주시 반남면에서 마한 또는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도 출토했다.
    ㆍ왜 일본 학자들은 고구려 금관·금동관을 추적했나?
    그러니 당시의 일본인 학자들은 고구려도 금관이나 금동관을 제작했다고 보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았는지 모른다. 우리 역사학계는 지금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거대한 금관-금동관 공동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 그때의 일본 학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금관-금동관 공동체 였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우메하라는 고구려 금관과 금동관에 관심이 높았기에 금동관을 이뤘을 부품이 나오자 쇠테를 이용해 금동관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일제의 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추적해 우리 역사의 틀을 만들어주었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우리 역사로 배우고 있는 것이 된다. 일제가 만들어준 틀 속의 것을 우리의 역사로 알고 배우는 것이다.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도록을 통해 일제 학자들이 만든 짝퉁 고구려 금동관 맛을 본 기자는 북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1958년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에 있는 옛 토성에서 고구려 금동관이 발굴됐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금동관도 우연히 세상에 나왔다. 토성을 이룬 흙을 덜어내는 공사를 하다 발견한 것이다.
    1958년 북한이 평양 대성구역 청암리 토성에서 공사를 하다 발견해 고구려 금동관
    이라고 공개한 것. 그러나 이 금동관은 지도자를 묻은 무덤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토성 안에 있던 사찰의 보살상 머리에 씌워 놓은 금동 보관(寶冠)이
    땅에 묻혔다가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금동관은 공사를 하다 땅속에서 발견됐다. 그렇다면 그 땅속에는 고구려 지도자의 무덤이어야 한다. 신라 금관총도 우연히 유물이 나와 발굴했더니 더 많은 유물이 있는 고대의 무덤이 확인됐었다. 그러나 평양에서는 금동관이 나온 땅에서는 무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어떠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 금동관 하나만 나온 것이다. 이 금동관은 신라나 가야에서 나온 금동관 금관과 조금 모양이 달랐다. 때문에 학자들은 토성 안에 사찰이 있었고 사찰에는 머리에 씌운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이 있는데 그 사찰이 스러지면서 보살 머리에 있던 보관도 땅에 묻혔다가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판단했다. 무덤에서 나온 금관이나 금동관의 관테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땅에 눌려 끊어져 있어도 하나로 연결해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이 금동관의 관테는 하나로 연결돼 있지 않았다. 보기 좋게 보살상의 머리에 올려 고정만 해놓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 금동관은 고구려 무덤에서 나온 지도자의 것으로 판단한 수 없었다. 이것이 최근까지의 결론이었기에 고구려는 금관과 금동관이 없다가 정설이 되었다. 그러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하면서 180도 다른 사실들이 나온다. 다음 편에서는 고구려가 금관을 만들었는지의 여부와 전강서금관이 진짜 금관인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맞는지 등을 추적해본다. (신동아 2014년 2월호 고구려 금관 기사 참조)
    Blog Donga   이정훈 동아일보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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