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거대한 금관 공동체 - 5

浮萍草 2014. 2. 3. 19:30
    "세계 최고의 금관국가 한국
    기생에게 씌워진 식민지 국가의 금관 경주박물관장이 유물을 밀거래해
    우리 땅에서 최초로 출토된 신라 금관. 경주의 주막집
    주인이 주막집을 넓히기 위해 자주 허물던 언덕에서 발견
    되었다.금관이 나왔기에 이 무덤은 금관총,금관은 금관총
    금관으로 불리게 되었다.국보로 지정돼 있다.
    (출처: 문화재청)
    리나라가 세계적인 금관 국가이다. 전강서금관을 제외하면 현재 전세계에 전해지는 완성품 금관은 열 세 개다. 이 숫자는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세계 최대·최고의 금관 국가가 한국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이중 아홉 개가 한국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홉 개 가운데 신라 것이 여섯 개 가야 것이 세 개이다. 신라의 금관은 금관총 금관·금령총 금관·서봉총 금관·천마총 금관·황남대총 북분(北墳) 금관·교동 금관이다. 가야의 금관은 삼성그룹 삼성미술관 리움이 갖고 있는 일명 ‘리움금관’인 ‘전(傳)고령 금관’과, 서울의 호림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일명 ‘호림금관’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도쿄(東京)박물관이 오구라(小倉) 컬렉션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명 ‘오구라금관’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관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금동관(청동으로 만든 후 금 도금한 것 포함)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금동관과 백제 무령왕릉 등에서 나온 금제 꾸미개따위를 더 한다면 한국은 가히 ‘금관의 나라’가 될 것 이다. 금관·금동관은 반가사유상·석굴암 등과 함께 찬란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엠블럼이 될 수 있다.
    ㆍ아이들이 갖고 놀던 구슬이 단서 우리 금관의 대표인 신라금관은 소설 같은 과정을 거쳐 갑작스럽게 세상에 등장했다. 1921년 경주읍성 남문 밖의 노서동에는 언덕으로 둘러싸인 주막이 있었다. 그 주막 주인인 박모씨는 주막 터를 넓히기 위해 뒤에 있는 언덕을 갂아 내리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그가 무너뜨린 흙더미에서 대접 서너 개에 담을 수 있는 분량의 구슬이 나와 동네 아이들이 가지고 놀게 되었다. 며칠 뒤 한 일본경찰의 순사가 그곳을 지나다가 구슬을 갖고 노는 아이들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그쳤다. 순진한 아이들은 구슬이 주막 뒤에 있는 언덕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즉시 그곳을 파보게 한 순사는 땅 속에는 더 많은 유물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경주경찰서를 통해 이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고고학자를 동원해 그곳을 조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주경찰서장이 더 빨리 움직였다. 경주경찰서장은 몇몇 일본인 유지들과 함께 9월 27일부터 30일 사이 그 언덕에서 나온 유물을 모두 수습해 경주경찰서로 옮겨왔다. 이 유물 중에 금관이 있었다. 세계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것이다.
    그뿐만아 이니다. 제1편에서 사진으로 보여준 금제관모가 나오고 고리자루 큰 갈로 옮기는 환두대도는 세 자루나 출토되었다. 이 대도는 지금 두 자루가 국립중앙박물관에,한 자루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금제관모는 금관 안에 쓰는 상투를 잡아주는 속관이었을 것이다. 상투는 남자만 튼다. 칼도 남자만 찬다. 때문에 이 무덤은 성인 남성 지도자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21년 주막집 뒤에 있는 언덕이었다가 우연히 구슬이 발견돼 일본 경찰이 발굴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금관을 출토하게 된 신라 고분.금관이 나옴으로써 언덕인줄 알았던 고분은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 이름은 일제가 지어준 것이다.
    (출처http://blog.daum.net/qhrehfdl5468/98027)

    이러한 경찰의 보고가 있었을 때 일본 고고학자들은 ‘동양의 투탕카멘 왕릉 발견’이라며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단 한 점의 금관도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찰이 유물을 수습한 다음에야 경주에 와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보고서 작성이었다. 이들은 세계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이 언덕이 옛 무덤이었음을 알고 그곳을 금관이 나온 무덤이라는 뜻으로 ‘금관총(金冠塚)’으로 명명했다. 일본은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 일을 일본을 홍보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컬러사진과 영문 설명을 곁들인 보고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돌린 것. 이 보고서를 만든 고고학자가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와 3편에서 일본 텐리(天理)대학 참고관에 있는 쇠 관테를 이용해 고구려 금동제 투조관을 만들었다고 한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893~1983)였다. 이들은 ‘조선고적도보‘등을 제작한 세키노 등과 함께 우리 고대사 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메하라는 신라사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2013년 7월 3일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를 보존처리 하다가 칼집 끝의 금동장식 부분 앞면에 ‘이사지왕(爾斯智王)’과 ‘이(爾)’, ‘십(十)’이라는 한자가 선글씨로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경주박물관의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는 ‘십(十)’ ‘이(爾)’ ‘팔(八)’이라는 한자가 선글씨로 새겨져 있다고 밝혔다. 그로 인해 이사지왕이 이 무덤의 주인이냐는 논쟁이 일었다. 이 무덤은 신라가 지도자를 마립간으로 부르던 서기 4세기 말~6세기 초 축조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왕이라는 한자가 나왔으니 해석이 어려워진 것. 한편에서는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포항 냉수리에 있는 신라비석(국보 264호)에 차칠왕등(此七王等)이라는 한자가 있어 마립간이 아닌 사람도 왕으로 불렸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는 이 무덤의 주인이 최고 지도자인 마립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당시의 왕은 지방 호족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자 아사지왕은 이 칼을 만들어 무덤 주인인 마립간에게 제공한 지방 호족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때문에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금관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더 많은 조사를 해봐야 하는 것이다.
    ㆍ오구라에게 금관총 유물 밀거래(?)한 일본인 경주박물관장
    초대 경주박물관장을 하면서 금관총 유물 8점을 팔아
    먹어 일본 경찰에 검거된 모로가 히데오 (출처: 토함산솔
    이파리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704)
    이렇게 나온 금관총 유물이 일본인들에 희롱을 당하게 된다. 시작은 1933년 경주박물관 초대 관장인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경주에서 경찰에 체포된 것이었다. 그의 혐의는 직무를 이용한 문화재 거래였다. 박물관장이 발굴유물을 빼돌려 골동품상과 거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금관총에서 나온 유물 중에서 금제품 8점을 일본인 유력사업가에 넘겼다는 혐의를 받았다. 모로가 히데오로부터 유물을 구입한 이는 대구에서 사업을 한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로 추정 됐다. 오구라는 뒤에서 설명할 오구라금관을 확보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처벌받지 않았다. 모로가 히데오가 넘긴 금관총 유물은 지금 도쿄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이 컬렉션이 공개한 창녕 출토 금동관과 금동제 삼존불 등이 그것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분명한 것은 확인할 수가 없다. 모로가 히데오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것을 결정했다. 지금 우리는 한4군의 대표인 낙랑군이 이북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배우고 있는데 이러한 틀을 만들어준 이가 모로가 히데오이다.
    ㆍ조선 실학자들의 주장을 이용해 낙랑군을 이북 평양으로 비정한 모로가 중국사서를 분석해보면 낙랑군은 만주도 아니고 요하 서쪽인 북경에 가까운 요서 지역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낙랑의 위치를 찾을 때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이름만 같을 뿐 같은 곳이 아니었다. 인류역사에서 지명 이동은 빈번히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수도 이름인 서울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이 변한 말이다. 경주의 옛 이름인 서라벌이 한강 하구에 있는 대도시 이름이 된 것은 서울(서라벌)이라는 지명이 이동했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서울(서라벌)은 수도를 가리키는 지명이자 보통명사였으니 신라 시절에는 경주가 서울(서라벌)이었고 지금은 서울이 서울(서라벌)이 된다. 중국 사서들은 평양이 만주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이북 펼양으로 천도했다고 배우고 있는데 이는 일본 학자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중국 사서인 요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 중국 요녕성 요양시 부근이다. 더 오래된 중국 사서들은 고조선의 평양은 요서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후대의 사서는 고구려의 평양이 요동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고조선의 평양과 고구려의 평양 고려가 서경이라고 한 평양 그리고 조선시대의 평양이 같은 곳으로 보고 고조선과 고구려는 이북 평양에서 도읍했다는 고정 관념에 빠져 있다. 이러한 인식이 생겨난 데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은 명에 과 을 보내 어느 것을 국호로 삼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이에 명이 조선을 골라줘, 조선은 조선을 국호로 삼았다. 조선은 사대를 기본으로 한 나라였으니 과거에 있었던 조선(고조선) 가운데 중국 은나라에 왔다고 하는 기자가 이끈 기자조선을 조선의 뿌리로 선택했다. 기자조선도 수도를 평양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기자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려면 조선 경내에 기자조선의 수도가 있어야 하니 조선은 이북 평양을 기자조선의 수도인 평양으로 비정해버렸다. 그에 따라 이북 평양에 기자 사당을 지으면 대대적으로 기자가 이북 평양에 도읍했다는 것을 홍보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 지리지로 확인된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를 쓴 이들은 평양이 여러 군데라서 이북 평양이 (기자)조선의 평양인지 헷갈린다는 표현을 넣어 놓았다. 조선 후기 박지원은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을 다녀온 후 열하일기란 책을 남겼다. 이 책에서 박지원은 압록강을 넘어가니 여러 곳에 평양이 있다며 이북의 평양과 압록강 이북의 평양 가운데 진짜 평양이 어디냐고 반문한다. 이는 조선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평양이라는 지명을 이북 평양으로 끌고 왔다는 증거가 된다. 조선이 정치적인 필요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같은 곳이며 이북 평양이라고 해놓은 것을 답습한 이들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실학자들도 근본은 유학자이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야인으로 여겼던 만주족이 일어나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국을 지배한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 하지만 역사 의식은 있어 발해사 고조선사 등을 연구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뿌리가 만주족 땅에 있는 게 싫었는지 고조선이 이북 평양에 도읍했다는 세종실록 지리지 주장을 되살렸다. 이 주장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 일본 학자들이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은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기에 무력해졌다며 실학자들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학자들의 주장을 이용해 기자조선이 이북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기자조선을 위만조선이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니 한4군은 이북 평양에 있어야 한다고 비정했다. 이어 고구려도 장수왕 이후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고 이북 평양을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한4군, 고구려의 중심무대로 만들어버렸다. 이북 평양 지역은 고구려와 쟁패한 초기 백제의 무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고구려와 한뿌리에서 나왓으니 동명왕을 시조로 모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온조왕이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로 동명왕 사당을 지은 것을 적어놓았다. 백제가 평양 지역에 동명왕 사당이나 능을 만들었다면 이 능은 고구려가 시조로 모시는 동명왕 사당이나 능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평양 인근인 강서 지역에 있는 연화총 등 오래된 고분은 중국 길림성 집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과는 양식이 다르다. 그러나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다는 인식 때문에 강서 지역 등에 있는 고분을 고구려 것으로 비정해놓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일항쟁기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의 실학자들을 띄우면서 굳혀 놓은 것인데 우리는 철저히 검증해보지 않고 그냥 따라가고 있다. 일본이 원한 것은 조선은 옛날부터 반도에 처박힌 작은 나라였다는 인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들이 지배하게 된 조선이 과거에는 대륙을 지배한 큰 나라였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오래 전에 임나일본부의 지배를 받은 힘없는 민족이라는 식민사관을 갖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이 구체적으로는 한4군이 북한에 있었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운동을 앞장서 주장한 이가 모로가 히데오였다.
    일본 도쿄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에 있는 창녕 출토 금동관과 금동제 삼존불. 금동관은 오구라가 붙인 이름이다. 형태로 보면 관이 아니라 절풍이나 상투를 잡아주는
    모자에 가까우니 금동모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모두 모로가 히데오로부터 오구라가 밀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토함산솔이파리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704)

    ㆍ남자 아이의 무덤인 금령총도 발굴하게 된 우메하라
    금관총 보고서 작성으로 신라 금관에 큰 관심을 갖게 된 우메하라는 1924년 금관총 가까이에 있던 또 다른 고분을 정식으로 발굴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 고분 역시 누대에 걸쳐 사람들이 흙은 퍼간 탓인지 스러지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를 사람들은 편하게 ‘폐(廢) 고분’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와 또 한번 세상이 뒤집어졌다. 먼저 금관이 나온 무덤을 금관총이라고 했으니 이 고분은 금관총으로 명명할 수 없었다.
    금령총 금관.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굽은 옥도 달려 있지 않다. 작은 환두대도가 같이 출토됐기에 소년의 무덤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 문화재청)

    그런데 이 금관은 관테의 둘레가 15cm 정도로 작았다. 금관에는 굽은 옥이 달려 있지 않았다. 신라 금관에서 굽은 옥이 없는 것은 다음편에서 설명할 교동금관과 금령총 금관뿐이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총에서 나온 절풍 모양의 속관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환두대도 하나가 나왔기에 성년이 되지 못한 남자 아이를 묻는 것으로 추정했다.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에게는 굽은 옥을 단 금관을 씌우지 않는다는 해석도 나왔다. 굽은 옥은 홍산 옥기에 많이 보는 형태이다. 많은 학자들은 C자용으로 부르는 C자형 옥기(굽은 옥)는 태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왔는데 이는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신라금관에 달린 굽은 옥은 경옥인 비취로 홍산에서 옥기를 만든 연옥과 성질이 다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경옥 광산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ㆍ금관은 왕관이 아니다. 위세품이다
    죽은 남자 아이 무덤에 금관을 넣은 것은 금관은 지도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금관은 왕만 쓰는 왕관이 아닌 것이다. 왕비도 쓸 수 있고 지도자의 자녀와 형제들도 쓸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금관은 요즘 잘 나가는 사람들이 착용하는 명품처럼 아주 힘 있는 사람들이 권세를 자랑하기 위해 착용하는 위세품일 가능성이 높다. 폼을 잡기 위해 쓰는 착용품인 것이다. 금관 금동관은 환두대도와 더불어 최고 지도자의 위세를 드러내는 위세품이며 이 지도자가 부하나 지방의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보낸 하사품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금관 금동관 환두대도가 발굴될 이유가 없다. 위세품 하사 문화는 지금도 존재한다. 군에서 별을 달면 삼정도를 주는데 삼정도 하사와 비슷한 것이 과거에는 환두대도 하사였을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경쟁하던 시절 중앙의 최고 지도자는 부하와 지방 실력자의 충성이 중요했으니 충성을 요구하는 증표로 금관-금동관 환두대도를 보냈을 수 있다. 때문에 한국은 금관 금동관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메하라가 발굴한 고분에는 금관총에서는 보지 못한 금방울과 말을 타고 있는 인물 모양의 토기(기마인물형토기)가 나왔는데 일제는 금방울에 주목해 이 고분을 금령총 (金鈴塚)으로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국보로 지정한 것은 말을 타고 있는 인물 모양의 토기(국보 91호)였다. 금방물은 국보로 지정되지 못했다. 우메하라는 당시의 일본 고고학 기술을 이용해 금령총을 발굴했기에 제대로 된 발굴 보고서를 남겼다. 우메하라는 신라 금관을 거론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일본인이 된 것이다.
    ㆍ스웨덴 왕세자에게 발굴 기회 준 일본 고고학자
    2년 뒤인 1926년 일제는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의 일본인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경주 노서동에 있는 또 하나의 폐고분을 발굴케 했다. 대구-경주-울산-부산을 잇는 협궤(挾軌) 철로를 광궤(廣軌) 철로로 바꾸는 공사가 이 발굴을 하게 된 계가가 되었다. 경주역에 기관차 차고를 짓기로 하고 인근에 있는 고추밭의 흙을 파냈는데 고분이 나온 것이다(그해 5월). 소식을 들은 총독부는 급히 고이즈미 아키오를 파견했다.
    서봉총 금관. 이 금관에는 피식민 국가의 서러움이 가장 많이 묻어 있다. 그러한 잔재를 털어내려면 서봉총이라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그때는 금관총과 금령총 금관이 알려진 다음이라 많은 이들이 이 발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때 그리스의 고분 발굴에도 참여할 정도로 전문 고고학자 활동을 해온 스웨덴의 구스타프 Ⅵ(6세) 아돌프 왕세자(1882~1973) 부부가 일본을 방문했다. 서봉총 금관이 등장할 조건이 구비돼 간 것이다(서봉총 금관 이야기는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겸 문화·체육 에디터를 지낸 이기환 선생 글을 참조함. 이 글 원문은 아래를 클릭하면 읽어 볼 수 있음. http://m.media.daum.net/m/media/culture/newsview/20120215152011786) 구스타프 왕세자는 첫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데 새 부인이 우울증 증세를 보여 44세에 세계 여행에 나서 그해 10월 일본을 방문했다. 이 부부는 나라((奈良)현에 있는 일본 고적 등을 둘러 본 후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일본의 고고학자인 하마다 게이사쿠(濱田耕作)가 “조선반도 경주에서 금관이 나올 수 있는 고분을 발굴하고 있는데 가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왕세자는 당연히 좋다고 했다. 그리고 농담을 던졌다. “그 금관, 혹시 박물관에서 일부러 묻어놓은 것은 아니죠?” 하마다는 “거짓인지 아닌지는 고고학자이신 전하가 확인하고 감정해주시죠”라고 받아쳤다. 하마디로부터 통보를 받은 고이즈미는 왕세자가 대미를 장식할 수 있도록 사실상 출토된 유물을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두게 했다.
    마침 조선을 방문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세자가 금관 발굴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그로 하여금 금관을 발굴하게 하는 사진
    (출처 http://veritasest.egloos.com/viewer/1658404)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세자 입회하에 일제가 발굴하게 된 서봉총 금관의 발굴 직전 모습(출처 http://veritasest.egloos.com/viewer/1658404).

    10월10일 오전10시, 경주 현장에 도착한 황태자가 발굴현장에 나타났다. 왕세자는 전문가 답게 능수능란한 태도를 보였다. 고이즈미가 현장을 싼 흰 천을 걷어내자 거의 노출돼 있는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왕세자 부부는 한쪽 무릎을 꿇고 피장자의 혼령에게 예를 표했다. 고이즈미가 “이 금관을 수습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왕세자는 조심스럽게 금관을 들어 올려 나무상자에 넣었다.
    ㆍ고려청자와 신라 금귀걸이 선물한 조선 총독
    그때 고이즈미가 “박물관에 있던 것을 묻어 놓은 것 같나요?”라고 물으니 왕세자는 “아니요. 지금 박물관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음날 구스타프 왕세자 부부와 만찬을 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이 고려청자와 신라 금귀걸이 한 쌍을 그에게 선물했다. 구스타프 왕세자가 수습한 금관은 금관총이나 금령총 발굴 금관과는 조금 달랐다. 이 금관도 ‘출(出)’ 형태의 세움장식과 함께 다른 세움장식을 갖고 있었는데 다른 세움장식 끝이 새(鳥) 세 마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이즈미 등은 이를 봉황으로 판단했다. 스웨덴은 한자로 ‘서전(瑞典)’으로 적는다. 때문에 서전의 ‘서’에 봉황의 ‘봉’을 더해 이 고분을 ‘서봉총(瑞鳳冢)’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신라금관을 자기 손으로 수습하는 영광을 누린 이 왕세자는 1950년부터 1973년 서거할 때까지 23년간 스웨덴 국왕을 했다. 그는 신라금관과의 인연 때문인지 한국에 가는 외교관이나 무관들이 인사를 하러 오면 서봉총을 둘러볼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딸도 서봉총을 방문했었다. 이제는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서봉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기자는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외세가 우리 금관이 나온 무덤의 이름을 지은 것이 영 못마땅하다. 일제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외에 2편에서 거론한 평남 강서군의 연화총을 비롯해 각저총, 쌍영총 등 수많은 고분의 이름을 지었다.
    ㆍ서봉총은 전형적인 식민지 이름
    각 고분의 특색을 찾아 이름 지은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가 발굴 했더라도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무덤 이름을 꼭 어려운 한자로 할 이유가 있는지는 되묻고 싶다. 관테라고 하면 될 것을 대륜 세움장식이라고 하면 되는 것을 입식 식으로 일제가 만든 어려운 한자를 우리가 사용할 이유가 있는가? 그 한자가 우리 사서에 나오는 것이라면 수용할 수 있는데, 그렇지도 않다. 처음으로 발굴을 한 일본 학자들이 일본식 한자 작명법으로 만든 것이다. 각저총(角抵塚)의 각저는 씨름을 가리킨다. 이 무덤의 벽화에 씨름하는 것이 그려져 있어 각저총으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알기 쉽게 ‘씨름무덤’으로 불러도 된다. 쌍영총(雙楹塚)의 ‘영’자는 기둥 영자이다. 무덤방에 두 개 기둥이 있어 이런 이름을 지었다. 이 무덤이 일본 무덤이라면 쌍영총으로 지어도 좋지만 우리 무덤이라면 우리가 알기 쉽게 ‘쌍기둥 무덤’으로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서봉총은 최악의 이름이다. 일제가 스웨덴에게 선물로 헌납한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주인도 아닌 일제가 왜 주인 행세를 하면 선물을 주는가. 스웨덴은 우리와 적국이 아니니 우리도 스웨덴 왕세자의 방한에 맞춰 이 무덤을 발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닌 일제가 그 짓을 하고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 지은 이름을 독립국가인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일제의 역사 식민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박선희 교수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이 무덤 주인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봉총 이름을 우리 식으로 새로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ㆍ기생에게 씌운 서봉총 금관-부산일보의 놀라운 보도
    이 서봉총 금관이 ‘희한’한 꼴을 당하게 되었다. 피식민 국가의 치욕을 느끼게 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 꼴은 당시 일본어로 발행되던 ‘부산일보’ 1936년 6월 29일자가 평양발로 쓴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서봉총을 발굴한 고이즈미가 1935년 평양박물관에 서봉총 금관 등을 특별 전시한 후 축하연회
    를 하면서 평양 기생 차릉파에게 서봉총에서 나온 금관과 금 허리띠 등을 매고 나오게 했다고
    보도한 1936년 6월 29일자 부산일보 기사.

    서봉총 금관이 출토되고 9년이 지난 19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경성(지금의 서울)박물관으로부터 서봉총 출토 유물을 대여 받아 제1회 고적 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게 되었다. 이는 그때의 평양박물관장이 서봉총을 발굴한 고이즈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특별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뒀다. 특별전시회가 끝나자 박물관 측은 축하연회를 하게 되었다. 평양의 유지란 유지는 다 모이고 평양의 유명 기생들도 총출동했다.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취흥(醉興)이 도도(滔滔)해질 때 용서받지 못할 일탈행위가 벌어졌다. 박물관 측이 평양 제일 기생이라는 차릉파(車綾波)에게 서봉총 금관과 금목걸이 금제 허리띠를 하게 나타나게 한 것.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금관을 기생 머리에 씌우다니….’ 서봉총에서 나온 금관을 기생에게 씌웠다는 사실은 금방 퍼져나갔다. 당황한 박물관 측은 소문을 내지 말아달라고 입단속을 했다. 그러나 사진까지 찍었으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9개월이 지난 1936년 6월 29일 부산일보가 이를 보도함으로써 세상은 경악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일보는 일어로 인쇄를 했지만 기자정신과 문제의식은 살아 있었다. 이 신문은 서봉총 유물을 쓴 차릉파 사진을 싣고 지금 말로 바꾸면 ‘금관 파문 박물관 추태’라는 큰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국가의 보물을 기생의 완롱물로 평양에서 문제 심각해져’라는 소제목을 붙이고 자세한 사연을 보도했다. 일본의 금관이었다면 고이즈미는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식민 국가는 국민뿐만 아니라 유물도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친 김에 피식민 조선의 유물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기로 하자. 경주에서 나온 3점의 금관은 세계 최초로 나온 금관이었다. 그 시기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 본국인 일본가 식민지인 조선은 똑 같다며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렇다면 일제는 이를 국보로 지정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닌 식민지이니 식민지에서는 아무리 좋은 유물이 나와도 나라의 보물(국보)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에서 나온 귀한 유물은 전부 보물로 지정했다. 일제는 서울 숭례문을 보물 1호, 동대문을 보물 2호 순으로 지정했는데 그러한 지정이 대한민국이 독립한 후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동대문처럼 일부만 국보로 빠져나가고 보물이 국보로 바뀌어 일제가 정한 순서대로 국보 번호가 매겨진 것이다. 철저한 역사 식민지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은 독립 70년을 바라보지만 역사 주체성에 있어서는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 그리고 일제가 만들어준 고조선사와 고구려사 삼국시대사, 고려사, 조선사를 반복해서 배우고 있다. 일본 학자들이 발견해 해석해준 대로 삼국사기를 풀고 있으니, 우리의 삼국시대 역사는 반도에 갇힌 답답한 역사가 된다.
    ㆍ대일항쟁기 우리 손으로 꺼내 우리가 소유한 유일한 금관이 전강서금관
    전강서금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금관은 대일항쟁기 때 도굴로 세상에 나온 것이 확실하다. 일본군 위생병이 강서의 무덤을 굴착하기 전에 출토됐더라도 그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위협은 대단했으니 그 이전(러일전쟁 이전)도 대일항쟁기로 볼 수 있다. 이 금관이 일본인의 손을 탔다면 그 운명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을 것이다. 금관총이나 금령총 서봉총 금관처럼 일본 기관이 개입해 출토된 것이라면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박물관에 있는 유물은 패전 후 일본인들이 갖고 가지 못해, 우리가 인수하게 되었다. 조선인이 도굴해 일본인에게 판 것이었다면 뒤에서 설명할 오구라 금관처럼 일본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패전을 하기 전 조선에서 유물을 모았던 일본인들은 그것들을 미리 일본으로 빼돌렸다. 전강서금관은 그러한 운명을 맞지 않았다. 니시하라라는 일본 이름을 쓴 거간꾼이 등장하지만 이 금관은 다시 조선인 손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이 금관은 대일항쟁기 우리 손으로 꺼내 우리나라 사람이 보관하게 된 유일한 금관이다. 때문에 서봉총 금관처럼 욕을 보지 않았다. 대일항쟁기 때 전형필 선생이 도굴과 비도굴을 가리지 않고 우리 유물을 대거 매입해주었기에 우리는 많은 우리 유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이 금관은 남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도굴로 나왔다고 외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광복 후 우리 정부는 금관총에서 나온 최초의 금관을 ‘국보 87호’로 지정했다. 금령총에서 나온 금관은 최초의 금관이 아니기에 ‘보물 338호’로 지정했다. 이어 서봉총 금관을 ‘보물 339호’로 지정했다. 이렇게 우리는 대일항쟁기 세계 최초로 금관 세 점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잔치였다. 그러한 잔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일항쟁기 때 우리 손으로 꺼내 우리나라 사람이 보유하게 된 전강서금관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런데 피식민 교육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조사를 해볼 움직임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Blog Donga   이정훈 동아일보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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