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핸드폰 플래시를 받아 화려하게 빛나는 고구려 금관(?).이 금관에 달려 있는 원형 금판인 달개 장식은 숨결을 불자 살랑거렸다.김씨는 이 금관을 조부 때부터 소장해 왔다고 밝혔다.이 금관의 이곳저곳에 찍혀 있는 까만 점에 주목했으면 한다.점의 정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설명한다.ⓒ이정훈
2013년이 저물어가는 휴일 오후 기자는 박 교수 등과 함께 문제의 고구려 금관을 보러 갔다.
동행자는 박 교수와 고구려 금관이 아닌 다른 주제를 갖고 공동 연구를 하고 있는 신용하 서울대 전 사회학과 교수,고구려 해양사를 전공한 윤명철 동국대 교수,민속학의
권위자로 2008년 지식산업사에서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라 책을 낸 바 있는 임재해 안동대 교수 고조선사를 추적하고 있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 등
이었다.
이들은 박 교수로부터 고구려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금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보러가게 된 것인데 운 좋게 기자도 끼게 된 것이다.
김씨는 이 금관을 은행 대여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그 날은 손님을 위해 집으로 가져다 놓았다고 했다.
그의 집은 경기도 한 도시에 있는 큰 평수의 아파트였다.
현관에서 거실로 가는 짧은 복도 좌우에는 여러 고서화가 걸려 있었다.
복도 끝에 있는 넓은 거실 한쪽에는 그의 부인이 과일과 한과로 깔끔하게 차려 놓은 다과상이 눈을 끌었다.
그 집에는 박 교수의 책을 낸 경인문화사의 한정희 사장과 안산대의 허선영 교수가 먼저 와 있었다.
잠시 후 상명대 부총장을 지낸 배경율 교수(컴퓨터학과)가 합류했다.
박 교수와 한 사장을 제외하고는 전부 김씨와 초면인지라 꽤 긴 인사가 이어졌다.
한정희 사장과 박 교수는 책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금관을 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처음인지라 설레는 듯 했다.
ㆍ이것이 고구려 불상이다
▲ 금니여래 입상 <ⓒ이정훈>
▲ 소조보살 입상. 김씨가 먼저 공개한 고구려 불상 두 점(위 아래 사진).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고구려 불상은 열 점 정도밖에 없다. 이것이 고구려 불상임이 분명하다면 국보 등으로 지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정훈>
김씨는 먼저 고구려 불상 두 점부터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高句麗 金泥如來 立像(고구려 금니여래 입상)’과 ‘高句麗 塑造菩薩 立像(고구려 소조보살 입상)’이라는 붓글씨를 붙여 놓은 상자를 들고
왔다.
그 상자를 열자 헝겊으로 싸놓은 것이 나왔다.
헝겊을 풀고 속포장이 나왔고, 속포장을 한참 풀어가자 작은 소조상(塑造像) 두 점이 나왔다. 소조는 진흙을 붙여가며 만든 것이다.
소조상은 작아서 길이가 10cm 남짓인 것 같았다.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고구려 불상은 열 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소조상들이 고구려 불상으로 공식 확인된다면 어렵지 않게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전공자인 윤명철 교수가 상당한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미술 전공이 아니라서인지 감상만 하고 의견을 밝히진 않았다.
금니여래 입상은 말 그대로 진흙으로 만들어 금박을 입힌 서 있는 여래상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탓인지 금박은 많이 벗겨져 있었지만 부처(석가모니) 입상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소조상의 머리는 불뚝 솟아 있었다.
부처나 보살의 머리(정수리)는 상투처럼 솟아 있는데 이를 ‘육계(肉髻)’라고 한다.
계자는 ‘상투 계(髻)’자다. 육계는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는 상투처럼 솟은 혹을 가리킨다.
ㆍ보살상인가 선도(仙道)를 하는 고구려인 상인가
소조보살 입상은 금박을 입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육계가 금니여래 입상의 육계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은 부처나 보살이 하는 ‘수인(手印)’을 하고 있고 귀 또한 상당히 긴 부처나 보살의 귀 형상이지만 육계는 상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난 탓인지 부처나 보살상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다. 소조보살 입상이 입고 있는 옷은 좀 두꺼워 보였다.
기자가 소조불상의 옷차림과 육계에 주목한 것은 우실하 교수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홍산에서 일어난 우리 문명을 추적하고 있는 우 교수는 이 보살입상을 보더니"불교 쪽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의 선도(仙道)쪽으로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상투를
틀고 선도를 한 우리 조상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육계는 기자가 보기에도 부처임이 분명한 금니여래 입상에도 있었다.
그러나 소조불상 정수리에 있는 것은 금니여래 입상에 있는 것과 좀 달라 보였다.
금니여래 정수리는 그냥 툭 튀어나와 있으나 소조보살 입상의 정수리는 층이 져 있었다.
때문에 머리카락을 층을 지게 묶어 올린 상투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었다(확대 사진 참조).
소조보살 정수리에 있는 것은 상투인지 육계인지는 전문가들이 판단해야 한다.
이 의문에 대해 김씨는 “부처 머리에는 육계가 있는데 보살 머리에는 대개 상투가 있다”며 보충 설명을 했다.
“우리 불상은 삼국시대에 만들었든 조선시대에 만들었든 부처상은 육계가 있고 보살상은 상투가 있다.
그런데 부처는 그렇지 않은데 보살은 보관을 쓰고 있으니 사람들은 보살 머리에 있는 상투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보살 머리에도 부처와 같은 육계가 있는 것으로 막연히 알게 됐다.
따라서 이 보살상에 상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 상투 튼 고구려 보살상(?). 불교미술 전문가인 정영호 교수는 이 것을 소조보살 입상으로 판단했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상의 머리(정수리)에 있는 것은 육계보다는 상투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정훈>
▲ 소조보살 입상의 정수리에 있는 육계 확대 사진. <ⓒ 이정훈>
ㆍ 정영호 교수는 고구려 불상으로 판단
불교 미술에 관한 국내 권위자는 단국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고 한국 교원대로 옮겨간 정영호 선생이다.
김씨는 “이 불상을 정영호 선생께 보인 적이 있는데 정 선생은 고구려 것으로 보고 이 불상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다”며 논문집을 갖고 와 펼쳐보였다.
정 선생이 쓴 논문 제목은 ‘高句麗 金泥如來 立像의 新例(고구려 금니여래 입상의 신례)’인데 이 논문은 금니
여래 입상을 고구려 불상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기자는 이 취재를 하면서 많은 보충 취재를 해야 했다.
추가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이 금니여래 소조입상이 1999년 대중에 공개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김씨에게 이야기 하니 그는 “맞다”고 했다.
이 공개는 연합뉴스의 김태식 기자에 의해 1999년 10월 14일로 보도됐었다.
기사에 따르면 그 날 서길수 서경대 교수(당시)가 이끄는 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가 광복 전 평양 근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개인소장가의 고구려 금니불여래입상(金泥佛如來立像)을 언론에 공개했는데 정영호 교수는
“이 금니여래 입상은 보존상태가 완벽하고 고구려 최초의 금니불이며 동시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금니불”로 보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김씨는 “소조보살 입상을 정영호 선생에게 보여 역시 고구려 보살상이라는 판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증거로 정영호 선생이 쓴 ‘고구려 니조(泥造)보살 입상 신례(新例)’라는 논문을 제시했는데,
이 논문은 2002년 ‘맹인재 선생 고희 기념 논총’에 실려 있다.
김씨는 이 불상을 “평양에 있는 옛 절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조부가 갖고 있다 전해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발굴지를 확인할 수 없는 유물에 대해서는 자주 논란이 일어난다.
발굴지가 확인되면 그것과 함께 출토된 동반(同伴)유물이 있으니 시대 측정이 그래도 쉽다.
그런데 동방유물 없이 나오면 전문가들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학적인 기법으로 유물을 만든 시기를 측정하는 기술이 발전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물의 일부를 잘라내 시료로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유물의 일부를 잘라내 시료로 쓸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돼 있어 쉽게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ㆍ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금관
▲ 고구려 금관 촬영 동영상 <ⓒ 이정훈
▲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켜기 전에 찍은 고구려 금관 <ⓒ 이정훈>
▲ 핸드폰 플래시를 받아 화려하게 빛나는 고구려 금관(?) <ⓒ이정훈>
이어 김씨는 문제의 금관을 공개했다.
그가 한쪽 벽에 있는 진열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금관은 진열장의 제일 윗칸에 있었다.
사진으로 본 것과 실물을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바빠졌다.
신라금관보다는 소박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화려했다.
그때 윤명철 교수가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휴대전화의 앱을 눌러 플래시를 켰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관이 제대로 빛을 반사한 것이다.
신라 금관은 날 ‘출(出)’자 형태의 세움장식을 하고 있다.
고구려 금관은 불꽃 모양의 세움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 세움장식이 윤 교수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받아 진열장 뒷면에 짙은 불꽃 무늬 그림자를 만든 것이다.
그림자는 윤 교수가 플래시를 옮김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일렁이며 이동했다.
불꽃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금관은 빛을 발하는데 뒤에는 큰 그림자 불꽃이 일렁이니 환상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 금관 옆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기자도 사진기를 맡기고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 금관 옆에 선 박선희 교수 <ⓒ 이정훈>
▲ 신용하 교수와 금관 <ⓒ 이정훈>
▲ 기자도 금관과 함께 “찰칵” <ⓒ이정훈>
달아오른 분위가 탓인지 그 금관을 한번 꺼내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윤명철 교수께 “금관 바로 밑에 앉아주시면 어떨까요.
금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 볼께요.
그래야 금관 크기를 짐작할 수 있잖아요”라고 했더니, 금방 포즈를 잡아주었다.
윤 교수는 자칭타칭 고구려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람이다.
무덤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 남자들은 마른 편이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준다.
장비처럼 우락부락하거나 퉁퉁한 이는 보이지 않는다.
윤 교수가 코 밑에 짧은 팔자수염을 기른다면 바로 그 얼굴이 된다. 전형적인 무사(武士)상이다.
윤 교수는 책상물림이 아니다.
학생 시절에는 동굴탐험반 활동을 했다.
학자가 된 다음에는 뗏목을 타고 서해를 횡단하는 등 ‘인디아나 존스’ 같은 활동을 해왔다.
경기도 구리시에는 광개토태왕 동상이 서 있는데 이 동상은 윤 교수 얼굴을 참고해 만든 것이다.
그런 윤교수가 금관 앞에서 자세를 낮춰 금관을 쓴 모습을 연출하자 여러 사람이 사진기를 눌렀다.
“어울린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ㆍ숨결에도 흔들리는 달개장식과 세움장식
이 금관의 관테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세밀하게 찍은 점으로 만든 무니가 있었다.
신라금관은 곡옥도 달개장식으로 달고 있지만 이 금관은 작은 원형의 금판만 달고 있었다.
그때 가까이에서 금관을 보고 있던 윤 교수가 금관을 향해 살살 입김을 불었다.
그 순간 작은 원판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현란하게 플래시 빛을 반사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박제’인 줄 알았던 그래서 그림자 춤이나 출 수 있는 것으로 알았던 금관이 살아 움직인 것이다.
좀 더 강한 입김을 보내자 세움장식도 흔들거렸다.
당연히 금관은 더 휘황찬란해졌다. 사람 입김에 달개장식을 물론이고 세움장식까지 흔들릴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이 금관을 쓰고 걸으면 얼마나 멋있었겠는가.
눈부신 태양이 내리 쬐는 날 이 금관을 쓰고 걷는 사람은 더 없이 화려하고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지도자를 태왕으로 불렸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 대표적이다.
태왕은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는다.
‘비단결 같다’는 말이 있듯이 비단은 미풍에도 쉽게 살랑인다.
그리고 사이키 조명처럼 온갖 빛을 되쏘는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다면 그의 위엄은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이 금관은 높이가 15.8cm, 관테의 지름은 아래 부분이 19cm, 윗 부분이 19.5cm, 관테의 둘레는 59cm이다.
관테 위에 올라간 세움장식은 모두 일곱 개이다.
세움장식의 높이는 13.7cm이고 세움장식의 폭은 6.3cm다.
관테에는 점으로 찍은(음각) 꽃잎 모양의 무늬 16개가 음각돼 있다.
원형인 달개장식의 지름은 0.8cm이다.
이러한 달개장식 242개가 0.05cm의 금실로 세움장식과 관테에 매달려 있다.
관테에 38개, 세움장식에 204개가 달려 있다.
세움장식에 달려 있는 달개장식은 다섯 개 세움장식에 28개씩 달려 있고(28×5=140) 두 개 세움장식에 32개씩(32×2=64) 달려 있다.
박선희 교수는 이러한 금관을 쓰려면 상투를 잡아주는 속관(절풍 등)을 써야 한다고 본다.
속관은 금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비단이나 대나무 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유기질 속관이라면 썩어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금으로 만들었다면 전해져야 하는데, 이 금관과 관련된 속관은 없었다.
이 금관이 고구려 것이 확실하다면 고구려는 이 금관을 쓴 힘과 위엄으로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다.
제국을 통치한 것이다.
그래서 박선희 교수도 단행본 제목을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로 지은 것이 아닐까.
뒤에서 밝히겠지만 그러나 이 금관을 100% 고구려 것으로 판단할 확실한 근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금관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고구려는 무인의 나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무용총이나 각저총 벽화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화려한 나라였다.
제국은 칼로만 통치할 수 없다.
문화로 지배해야 한다.
압도적인 문화를 가져야 이민족을 고개를 숙인다.
중국 길림성 집안(輯安)시에 가면 볼 수 있는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비가 얼마나 큰가.
거대해야 압도적일 수 있다.
화려한 것도 압도적인 것을 이루는 방편이다.
황금으로 만든 관은 고구려의 압도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 김씨 조부가 니시하라 라는 고물행상으로부터 이 금관과 함께 구입했다는 금 귀걸이 < ⓒ 이정훈>
이 금관 옆에 귀걸이로 보이는 유물 한 쌍이 있었다.
과거에는 귀걸이를 한자로 어렵게 ‘이식(耳飾)’으로 불렀다.
김씨는 이 귀걸이도 금으로 만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조부께서 금관과 함께 구입해 집안에 전해오던 것이라고 했다.
박선희 교수는 이 귀걸이가 북한의 평양력사박물관에 있는 평남 강서군 보림리 6호분에서 나온 금귀걸이와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ㆍ니시하라 라는 고물행상에게서 조부가 구입
이어 금관 옆에 있는 비닐로 싸놓은 옛 명함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김씨의 조부가 금관과 금 귀걸이를 구입했다는 고물행상의 명함이라고 했다.
대일항쟁기의 고물행상은 골동품상이다.
명함의 지질(紙質)은 한 눈에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케 했다.
이 명함 전면에는 ‘古物行商(고물행상)’이라는 직업명과 ‘서원용성(西原用成)’이라는 사람 이름 그리고 ‘京城府 鐘路區 明倫町 三町目 七七番地(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라는 주소가 찍혀 있었다.
뒷면에는 ‘江西郡 普林面 肝城里 金冠(강서군 보림면 간성이 금관)’이라는 한자가 손글씨로 씌여 있었다.
김씨는 “평남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이 금관이 나왔다”는 뜻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西原用成이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西原은 일본어로 ‘니시하라’로 읽는다.
그런데 用成을 일본어로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독을 한다면 ‘요우세이’가 될 것 같은데 일본인 이름은 저마다 읽은 것이 달라서 단정을 할 수가 없었다.
▲ 직업명은 ‘고물행상’, 이름은 ‘니시하라 요우세이(西原用成)’, 주소는 ‘경성부 종로구 명륜정 3정목 77번지’로 찍혀 있는 니시하라의 명함. 뒷면에는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금관’이라는 한자가 손글씨로 씌여 있다 <ⓒ이정훈>
자연스럽게 “니시하라가 누구냐”란 질문이 나왔지만 김씨는 답을 하지 못했다.
대일항쟁기 할아버지에게 이 금관을 판 고물행상이라는 김씨의 답 외에는 김씨는 “니시하라가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출토됐다고 했기에 이 금관을 고구려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평남 강서군에는 ‘강서대묘’처럼 고구려 때 만든 것으로 알려진 고분이 즐비한 곳이니 그곳에 있는 고분에서 나왔다면 고구려 금관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명함에 씌인 손글씨를 제외하고는 이 금관이 강서군에서 나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금관인지, 아니면 금동관인지도 아직은 확인해보지 못했다.
금관에 대한 대화는 거기쯤에서 끊어졌다.
손님들은 “잘 봤다”는 인사는 거듭했지만 “고구려 금관이 틀림없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문가인지라 근거 없는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이다.
국내에는 이들 외에도 고구려 전문가들이 있으니 그들도 이 금관을 보고 판단을 해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박선희 교수다.
그는 이 금관을 고구려 것으로 확정했다.
그는 이 금관을 ‘전(傳)강서 금관’으로 부른다.
역사학계에서 ‘전할 전(傳)’ 자는, “뭐~ 뭐라고 전해진다”고 할 때 사용한다.
강서군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금관이면 ‘전강서 금관’으로 적는 것이다.
동명왕릉으로 전해지기만 하고 확인된 것은 없는 능은 ‘전동명왕릉’으로 부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신라 금관은 여섯 개이고 가야 금관은 세 개다.
백제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온 적이 없고 금으로 만든 꾸미개가 무령왕릉에서 나왔다.
전강서금관은 큰 틀에서는 신라금관 가야금과과 마찬가지로 관테-세움장식-달개장식의 세 구조로 돼 있다.
그러나 세움장식이 달랐다.
신라 금관은 ‘날 출(出)’자 형 세움장식을 하고 있고 가야 금관은 나뭇가지 혹은 풀잎 같은 모양의 세움장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전강서금관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 같다.
신라-가야금관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세움장식인 것이다.
큰 틀에서는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른 것이다.
이 금관은 고구려 무덤에서 나온 것이 맞는 것일까.
그쯤에서 일행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즐거운 식사였다.
그러나 기자의 머리 속에서는 니시하라는 누구인가.
과연 저 금관은 고구려 금관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추적을 해보아야 하나….’(신동아 2014년 2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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